“한 어깨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어깨가 굉장히 넓다.” “어깨에 실리콘 맞았다. 엑스레이 찍으면 실리콘 나온다. 으하하하.” 그가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즐기는 사람인지 몰랐다. 박유천도 아이돌 출신이기에, 소속사의 ‘주입식’ 인터뷰 교육의 영향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습니다’로 요약되는 인터뷰 말이다. 박유천은 달랐다. 주관이 뚜렷했고, 그 주관을 밝히는 데 거침없었고, 분위기를 주무르는 능력도 탁월했다. 동방신기로 데뷔한 지 꼭 십년 만에 첫 영화 <해무>를 찍은 박유천을 만났다.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던 ‘아이돌’ 박유천이 아닌 ‘배우’ 박유천이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왔다.
“동희야 내일 몇시야?/ 음, 정리해서 말해드릴게요./ 야, 얘길해줘야 내가 오늘 한잔하든지 하지./ 간단하게 한잔할까요, 형님?/ 어, 좋지. 소주.” 7월29일 발매된 JYJ의 정규 2집 《JUST US》에 수록된 박유천의 자작곡 <서른>의 가사 중 일부다. 여기서 동희는 박유천의 매니저.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박유천이 “내 일상을 담은 평범한 노래”라며 인터뷰 말미 <서른>에 대한 얘기를 짧게 꺼냈다. 그 뒤 찾아본 <서른>의 가사는 서른을 앞둔, 군입대를 앞둔, 소주의 쓴맛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사회생활을 경험한 어느 평범한 청년의 이야기였다. 2004년 동방신기로 데뷔, 10년째 스타로 우뚝 서 있는 박유천이지만 그는 평범하게 살고자 무던히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사생활을 검열당해온 아이돌로서는 당연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박유천에게서 특별한 느낌을 받은 건 그가 그 바람을 실현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영화의 경험에 대해 얘기하던 그는 종종 주제를 벗어나 뒤풀이 자리 얘기를 꺼냈다. 같은 소속사인 최민식, <해무>에 함께 출연한 김윤석이 술자리에서 어떤 얘기를 들려주었는지 박유천은 성대모사까지 해가며 전해주었다. “많이 배웠다”, “너무 좋았다”, “멋있었다”는 말은 술자리 에피소드 뒤에 마침표처럼 따라붙었다. 박유천은 영화 현장의 자유로움과 치열함에 완전히 매료된 듯 보였다. 봉준호 감독, 심성보 감독, 홍경표 촬영감독 등 많은 이들도 박유천에게 “영화가 어울린다”,“앞으로 영화했으면 좋겠다”고 영화를 권유했다. 심성보 감독은 말했다. “영화에 굉장히 목말라 있는 게 보였다. 영화는 대사 한줄을 가지고도 오랜 시간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나. 그렇게 고민하고 함께 얘기할 수 있다는 데 유천씨가 행복해했다.”
봉준호 감독이 제작하고 심성보 감독이 연출한 <해무>는 밀항 일을 하게 된 전진호 선원들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해무 낀 망망대해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제 존재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이야기다. 박유천이 연기한 동식은 전진호의 막내로, 밀항자 홍매와 사랑에 빠지는 캐릭터다. “크랭크인 전엔 숫기 없고 조용조용한 순둥이 캐릭터로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까 순둥이가 꼭 숫기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순수한 청년이지만 뻔뻔하고 대담한 모습도 간직한 캐릭터로 그리려 했다.”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여자 앞에서 동식은 수줍고, 살갑고, 귀엽고, 든든한 남자가 된다. <해무>엔 박유천의 익숙한 얼굴도 있지만, 낯설디낯선 얼굴도 있다. 뻣뻣하고 고지식한 양반 자제(<성균관 스캔들>), 훌륭한 성품까지 갖춘 리조트 후계자(<미스 리플리>), 시차적응 못해 굴욕당하는 왕세자(<옥탑방 왕세자>), 첫사랑 때문에 가슴 다 타버린 외로운 형사(<보고 싶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집념의 대통령 경호관(<쓰리 데이즈>). 그간 드라마에서 박유천은 부족함 없이 자란 백마 탄 왕자의 옷을 주로 입었는데, <해무>에선 그런 비현실적이고 거추장스런 이미지를 완전히 벗었다. 물론 그 훤한 얼굴이야 어디 가겠냐마는.
“가수에서 배우로 전향하는 사람들 중에 사극으로 연기 시작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거다. (<성균관 스캔들> 할 당시) 연기 못해서 욕먹을까봐 엄청 걱정했었는데 시기를 잘 탔고 운도 좋았다.” 거의 유일하게 연기력 논란에서 자유로운 아이돌인 것 같다는 말에 돌아온 대답이다. 연기하는 박유천을 보고 있으면 물 만난 물고기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해무>를 보는 동안에도 그랬다. “Life is more than ever you think.” <서른>의 후렴구 가사처럼, 이제부터 만날 박유천은 당신이 생각한 것 그 이상을 들려주고 보여줄 것이다.
-<쓰리 데이즈> 끝나고 두세달쯤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무얼 하며 지냈나.
=<쓰리 데이즈> 끝나고 나 뭐했지? 뭐했더라? 일단 음반 준비했고. 그외엔 뚜렷하게 한 게 없다. 평범하게, 얌전하게 집에 있었다. 올레tv보고, 친구들이랑 한잔하고.
-<해무> 막바지 촬영과 <쓰리 데이즈> 초반 촬영이 겹쳤었는데, <해무>에서 채 빠져나올 시간도 없었겠다.
=<쓰리 데이즈> 선배님들은 먼저 촬영에 들어가 계셨기 때문에 늦게 합류하게 된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컸다. 동식이 캐릭터를 벗고 한태경 캐릭터를 빨리 입어야 되는데 입는 속도도 좀 더뎠던 것 같고. 급하게 빨리빨리 찍어야 하다보니 드라마 초반엔 놓친 것들이 좀 있어서 아쉽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데 드라마 때문에 부산과 서울을 계속 왔다갔다해야 했다. 죄송했다. 정말 고마웠던 건 김윤석 선배님도 그렇고 감독님도 그렇고 ‘유천이 빨리빨리 찍어서 보내야 된다’면서 촬영 컷 순서까지 배려해주셨다는 거다.
-엄청난 배려다. 이제 영화 개봉까지 한달 남짓 남았다. 긴장이 좀 되나.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두근거림, 초조함, 불안함이 커지는 것 같다. 드라마도 피드백이 빠르고, 앨범도 준비해놓고 8개월 기다렸다 발매하진 않잖나. 피드백이 바로바로 오는 일들을 주로 하다가 영화를 하니 하루하루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걸 놔버린 상태랄까. 개봉 전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해무>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지 계속 얘기했다. NEW에서 완전 미는 영화라고. 다들 기대가 커서 자신감이 좀 사라지는 것 같다.
-첫 영화라는 게 의외다. 그동안 영화 출연 기회가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가 들어오긴 했다. 영화에 대한 욕심도 컸고. 그런데 아직은 영화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나이대에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드라마로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군대 갔다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해무>를 만났다. 고민할 것도 없이 하고 싶었다. 회사 입장에선 내가 그동안 가져온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 <해무>를 하는 게 개인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지 시간을 갖고 고려를 해보자더라. 군입대를 앞두고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몰랐고 또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고 멜로도 아니었으니까. 진짜 촌스러운 뱃사람으로 나온다. 그런데도 <해무>를 하게 된 건 멀리 봤을 때 내 연기 인생에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성보 감독이 그러더라. 보통의 아이돌이라면 <해무> 같은 영화는 하려고 들지 않았을 거라고. 말랑말랑하지도 않을뿐더러 호락호락하지도 않은 작품이니까. 그런데 유천씨는 이 영화에 대한 열의와 열정이 대단했다고 하더라.
=시나리오가 좋으면 거기에 홀딱 넘어가는 편이다. <해무>도 그런 작품이었다. 감독님과 첫 미팅 땐 긴장해서 제대로 말도 못했는데, 영화가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새롭고 낯설었던 것 같다. 드라마쪽이 세련된 느낌이라면 영화쪽은 구수한 느낌? 아무튼 긴장이 좀 풀렸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캐스팅해주셔서 감사합니다’였다. 그 언제더라. 선배님들이랑 다같이 리딩 끝내고 회식을 했는데, 어우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는 거다. 윤제문 선배님 계시고, 김윤석 선배님 계시고, 봉준호 감독님 계시고…. (웃음) 술은 또 대낮부터 마신다. 고사 지낼 때도 맥주를 박스째 갖다놓고 마셨다.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았다.
-범접하기 힘든 사람들과의 회식자리 난관은 어떻게 돌파했나.
=술. 그냥 술과 대화였다. 영화와는 무관한 얘기인데 그런 게 있었다. 우리가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 감춰야 할 게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활동해왔다.
-우리라면?
=우리 셋(JYJ 멤버). 내년이면 서른인데 아직도 담배 피우면 안 되고 술 마시는 모습 보이면 안 된다. 그런데 영화계 선배님들 보면 굉장히 프리하다. 그런 게 좋았다. 처음엔 현장에서 담배 피울 때 밖에 나가서 혼자 피웠는데,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영화계에선 그러는 거 예의 아니다. 여기서 펴~” 이러시기도 했고. (웃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드리게 된 것 같다. 그 모습을 또 예뻐해주셨고.
-심성보 감독은 유천씨에 대해 “본성이 착한 사람”, “주위 사람들에게 선함을 전해주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 이미지가 동식과도 잘 맞았다면서.
=내게도 비슷한 얘기를 하셨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선함 그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동식이한테도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동식과 철주(김윤석)는 영화에서 각각 선과 악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두 캐릭터의 힘의 균형이 중요한 영화인데, 그런 점에서 상대배우가 김윤석이라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부담은 있었지만 그걸 이렇게 바꿔서 생각했다. 극중에서 김윤석 선배님은 선장이고 나는 막내다. 막내가 선장한테 함부로 할 수 없지 않나. 어차피 동식에게 선장은 어려운 인물이니까. 동식이로서 긴장했지 유천이로서는 긴장하지 않았다.
-마치 누가누가 더 촌스럽나 경쟁하는 듯 보이는 다른 선원들에 비해 동식은 좀 평범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막내니까. 뱃일을 가장 덜했기 때문에 피부톤도 조금은 밝아야 했다. 진짜 까매지고 싶었고 촌스러워지고 싶었는데 동식이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런데 애초부터 사람들한테 어떻게 비칠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뱃사람이어야 했고, 그래서 뱃사람이 되었고, 뱃사람으로 살았다. 행동, 걸음걸이, 표정. 일부러 촌스럽게 보이려고 한 건 하나도 없다. 촬영이 끝나고 나니까 비로소 ‘사람들이 뱃사람으로 봐줄까?’, ‘뱃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만들어온 이미지의 벽을 스스로 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런데 정말이지 촬영하는 동안 ‘일을 한다, 촬영하고 있다’는 생각은 거의 안 했던 것 같다.
-ADR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후시녹음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고 하더라.
=(웃음) 나로선 내 연기를 다시 보는 게 어색했다. 당시에 어떻게 연기했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났다. 사람들은 첫 영화니까 모든 일이 세세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거라 짐작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런 거다. 나는 지금 박유천으로 살고 있다. 어제 뭐 먹었는지 종종 까먹는다. 그게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촬영하는 동안 나는 동식이었다. ‘동식이로 살아야지’가 아니라 내가 동식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거다. 후시녹음할 때 그게 낯설고 어색해서 당시의 감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수중 신 촬영 당시의 고생담도 어마어마하던데.
=말도 못하게 물이 차가웠다. 무거운 옷을 껴입고 인공파도를 헤치며 수영해야 했다. 한번은 순간적으로 공포가 엄습했다. 공포심에 손발이 마비됐고 숨도 못 쉬겠더라. 결국 사람들이 나를 끌어냈다. 표정은 신경 쓸 새도 없었다. ‘홍매(한예리)를 빨리 구해야지만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고, 이 촬영도 끝난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영은 잘하는 편인가. 심성보 감독은 유천씨가 원래 수영을 잘 못하는데 악으로 연기한 것 같아서 더 미안했다더라.
=감독님한테는 수영 못한다고 말했다. 수영 많이 시킬까봐. (웃음) 원래는 수영 좋아한다. 물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할 정도로.
-어느 인터뷰에서 ‘예전엔 현장에서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현장이 너무도 편해졌다’는 얘길 했다. 현장이 편해진 계기가 있나.
=모르겠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예의를 차리는 건 항상 기본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태도인 것 같다. 그런데 옛날엔 사람들이 어려워서 뒤풀이 가서도 말 못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긴장을 많이 하니까 뒤풀이 끝나고 집에 오면 너무 힘들고 지치고. 요즘엔 그런 거 없이 편하고 즐겁다. <해무>가 끼친 영향이 큰 것 같다.
-박유천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 욕심이 없다. 돈 많이 벌고 싶다? 광고 더 찍고 싶다? 인기 더 올려야지? 욕심 없다. 오로지 욕심이 하나 있다면 좀더 연기 잘하고 싶은 거! 내게 소중한 건 굉장히 평범한 것들이다. 좋은 일 들어오면 즐겁게 일하고 거기에 감사한다. 앨범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래도 우리가 아직까진 앨범을 낼 수 있는 위치에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다. 성격상 어디 나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회사에 웬만하면 공식적인 자리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얘기한다. 요즘엔 선배님들(최민식, 설경구, 이정재 등이 같은 소속사다)이 많이 들어오셔서 어쩔 수 없지만. 시사회도 가야 하고. (웃음) 사람들도 나를 평범하게 봐줬으면 좋겠다. 유천이가 이런 작품을 했는데 연기 너무 잘하더라, 그거면 충분하다.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다보면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한 걸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돼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최)민식이 형님이 소주 마시면서 그런 얘기를 하셨다. “천만원을 벌든 천억을 벌든 엄청 유명해지든 그렇지 않든 사람은 다 포차에서 만난다. 소주 마시면서 만난다. 얽매이지 마라. 소소한 거 챙기며 살아라.” 너무 멋있지 않나.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