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빛고을에서 온 영화 초대
2014-08-13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제14회 광주국제영화제, 8월28일부터 9월1일까지
개막작 <봄>

가끔씩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가혹하게 싸운다. 때로 전쟁을 치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란의 상태는 모두 평화를 위한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때의 ‘평화’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으로 평온한 상태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완전한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소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상태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올해 제14회 광주국제영화제의 주제는 ‘평화를 위한 기억’이다. 8월28일(목)부터 9월1일(월)까지 닷새간, 피폐했던 기억을 간직하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다양한 영화들이 한데 모인다. 총 25개국에서 초청된 91편의 장/단편영화를 롯데시네마 충장로관과 광주복합영상문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폐막작 <베를린 장벽>

개막작, 조근현 감독의 <봄>

개막작은 조근현 감독의 신작 <봄>이다. 전후 60년대를 배경으로, 서서히 죽음을 향해가는 조각가 준구의 이야기가 스크린에 담긴다. 남편의 마지막 조각품 완성을 돕고자 아내 정숙은 누드모델 민경을 찾아간다. 민경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파병을 겪으며 그 상처를 생활에 새긴 여성이다. 세 사람의 짧은 만남은 독창적인 정치의 알레고리극으로 완성된다. 한편 폐막작은 독일 크리스찬 슈뵈초브 감독이 연출한 <베를린 장벽>으로 정해졌다. 70년대 후반 남편을 사고로 잃은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함께 동독을 빠져나온다. 그녀가 베를린에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그저 ‘서쪽’에 도착하는 것만으로 자유가 획득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드러낸다. 어쩌면 억압된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기반으로 한 현재 통일의 패러다임이, 자본주의의 쾌락을 무조건적 우위에 둔 모순을 낳지 않느냐고 영화는 되묻는다.

영화제의 얼굴이라 부를 만한 ‘GIFF 초이스’ 부문의 프로그램들은 모두 다큐멘터리영화로 채워진다. 그중 무려 3년에 걸쳐 제작된 박봉남 감독의 <김대중>은 월드 프리미어로 관객을 만난다. 영화는 7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치열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김대중’이란 키워드를 통해 되짚는다. 재일동포 출신 양영희 감독의 <굿바이, 평양>과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 제이슨 리가 완성한 <평양에서 온 편지> 등 두편의 영화도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길 것이다. 정치적 갈등에서 시작된 개별 가족들의 문제를 남한이 아닌 한국 사회의 바깥에서 제3자의 눈길로 관찰하는 이들 작품을 통해 북한을 바라보는 진보적인 시선을 찾을 수 있다.

<남색골두>

영화제의 메인 섹션인 ‘휴머니티 비전’의 프로그램 면면도 화려하고 실속 있다. 중국의 유명 로큰롤 가수 추이젠은 <남색골두>를 통해서 연출자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로 구성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70년대 억압된 문화혁명 기간과 현재의 팝문화 세대를 비견해서 살핀다. 이 과정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던 감독 자신의 음악이 사용된다.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감성적으로 묘사한 크리스토퍼 도일의 표현주의적 화면 역시 볼거리다. 한편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처음 영상 작업에 뛰어든 헨릭 퍼셀 감독의 <파비스씨의 마지막 날>은 보기 드문 완성도를 보이는 데뷔작이다. 원제는 ‘시오세 폴’로, 이란에 실재하는 33개의 아치가 있는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 내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퍼셀 감독은 이상징적 오브제를 통해서 현대 유럽이 처한 정체성 문제와 스페인이 직면한 경제 붕괴의 상황 등을 빗대어 그린다. 한편 날렵한 HD화면 질감과 풍요로운 롱숏의 사용으로 이색적 풍광을 잡아내는 <빙독>의 연출자는 1982년 미얀마 태생의 타이완 감독 미디 지이다. 그는 음악이 없는 느린 움직임의 화면을 통해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자연주의풍 영화언어를 완성해낸다. 미얀마의 외딴 산골, 농사를 짓던 남자가 수확량이 줄어들어 고민에 빠진다. 결국 도시로 나간 남자는 스쿠터 택시기사가 되어 한 여성과 만나고 그는 그녀의 권유로 마약 운반책으로 일하게 된다. 영화는 이렇듯 사회 하층부를 맴도는 인물들을 통해 개발도상국이 처한 빈곤한 사회 시스템을 우회적으로 비난한다. 21살의 필리핀 신예 미하일 레드의 데뷔작 <레코드> 역시 젊고 세련된 실험을 시도하는 영화다. 유명 실험작가 레이먼드 레드의 아들인 미하일 레드는, <레코드>를 통해 과거 영상 매체가 거쳤던 역사적 포맷들을 거슬러 훑는다. 필름에서 시작해서 CCTV 푸티지와 미니DV 화면, 고해상 HD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면의 영역이 이야기에 더불어 몽타주된다.

<김대중>

세계 영화계의 진화를 살피는 ‘월드 비전’ 섹션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은 쿠앙후이 감독의 <탤런트>를 들 수 있다. 십대 때 이미 유명 밴드의 키보드를 맡았던 쿠앙후이의 개인적인 경력이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십대 초에 그는 베트남 최초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러한 재기 넘치는 경험이 작품에서 화려하게 되살아난다. 천부적 재능이 있는 아티스트들이 펼치는 사랑과 우정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이다. 이외에 브뤼셀국립영화학교에서 연출을 공부한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미스터 노바디>, 스페인 출신의 작가 겸 프로듀서 아마트 에스칼란테가 연출한 <헬리> 등 유럽 차세대 감독들의 다양한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가 선보였던 너비와는 다르게 이들 작품은 각 대륙의 영화에 대한 색다른 감흥을 느끼게 해준다.

<평양에서 온 편지>

‘중국영화 특별전’에 주목

영화제 기간 중에는 ‘시네마실크로드’라는 타이틀로 ‘중국영화 특별전’도 열린다. 지난 4월 중국 산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을 개최한 데 이어서 이번에는 중국 영화계의 대표와 단체장들이 대거 한국을 방문한다. 상영작은 장밍 감독의 로맨틱 드라마 <9호 여신>, 한쯔 감독의 역사극 <명장 위츠공>, 실화를 모티브로 삼은 동링 감독의 <한 엄마의 자녀들> 등 향후 중국영화를 이끌어갈 다양한 작품들로 채워진다. 그중 까오펑 감독의 <황하 결혼식>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30년대 황하 주변에서 시작된 한 일가의 운명적 사랑이,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 혼사를 앞둔 손자 왕꾸이의 이야기와 맞닿는다. 그는 이혼녀에다 세살 연상인 서양 여인 리샹샹과 결혼하려 하는데, 이 일로 어머니 장난화가 쓰러진다. 결국 화해에 도달하는 과정의 드라마가 까오펑 감독의 안정적 연출력으로 통찰력 있게 그려진다. 이 밖에 지난해 영화제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어린이극장’이 올해에는 확대 편성되고, 역대 광주국제영화제 최고 예매율을 자랑하는 ‘애니메이션 특별전’ 섹션을 비롯해 한국영화의 현주소와 흐름을 예측할 수 있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선’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함께 마련돼 있다. <봄>과 <파비스씨의 마지막 날> <레코드> <탤런트> 등은 GV(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예정돼 있으니,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www.giff.org)를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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