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모험의 성패는 뒷전이고, 얼렁뚱땅 은하계의 수호자가 된 5인조와 어울려 실없이 죽이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영화다. 결전에 나서는 주인공들의 출정 장면은, 히어로다운 명분과 영화가 가진 재미의 실체를 조율하는 제임스 건 감독의 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웅출두’의 전형적 구도대로 멤버들이 하나씩 프레임에 보무도 당당히 입장하는 가운데, 가모라(조 살다나)는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로켓(브래들리 쿠퍼)은 사타구니에서 바지를 잡아 뺀다. 슬로모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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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어빙의 소설 <가아프가 본 세상>에 나오는 간호사 제니는 병동에서 근무하는 동안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사실 두살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겠는가? (중략)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요구가 많아지지만 늙은이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동경가족>을 보다가 제니의 견해를 불쑥 떠올렸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원작과 마찬가지로 <동경가족>의 히라야마 부부(하시즈메 이사오, 요시유키 가즈코)는 도쿄에 사는 삼남매를 방문하기 위해 상경한다. 맏아들과 딸에게 가장 까다로운 과제는 노부모를 어디서 묵게 하느냐다. 대뜸 호텔을 예약할 수도 없지만 집에 모시고 보니 어딘가 불편하다. 결국 요코하마의 특급 관광호텔이 대안으로 선택된다. 그러나 히라야마 내외는 청정 공기와 라운지 뮤직에 감싸인 어색한 호강을 하루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 딸을 난처하게 만든다. 장남 코이치(니시무라 마사히코)와 딸 시게코(나카지마 도모코)가 특별히 부모를 싫어하거나 불효하는 자식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가아프가 본 세상>에서 제니가 말한 대로라면, 나이가 든 사람들은 실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요구가 많아지고, 주변 사람들은 채워주어야 할 노인의 결핍들을 은연중에 감지하여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딸의 미용실 손님은 부모가 올라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거 큰일이네요”라고 반응하고, 시게코 역시 곧장 맞장구를 친다. 아버지가 오랜만에 재회한 옛 친구와 소회를 주고받으며 잔을 기울인 술집에서, 같은 바에 앉았던 직장인들은 ‘영감들의 대화’에 연신 눈총을 보내다 일찍 자리를 뜬다. 따라 나온 술집 주인이 그들에게 머리 숙여 미안해한다. 문 너머의 늙은 손님들은 본인들이 누군가에게 사과할 거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모른다. 폐를 끼칠 행동을 딱히 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거나하게 취한 히라야마와 친구는 “이 나라는 언젠가부터 잘못되어버렸다”고 한탄하지만, 그들을 서운하게 만드는 문제의 정체는 어쩌면 사회 변화보다 훨씬 장구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아도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짐스러움과 모멸감. 그것은 어찌할 도리도 없어서, 태산처럼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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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싸서 이 집 저 집 전전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에게 문의해야 한다. <프란시스 하>의 포스터와 예고편은 그리 상서롭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러나 청춘이라 괜찮다. 게다가 뉴욕의 청춘이라면 더 괜찮다”식의 스케치가 아닐까 불안했다. 영화 초반도 나쁜 예감을 뒤집지 못했다. 무용가 지망생 프란시스와 친구는 공원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밤 외출의 흥에 취해 지하철에서 방뇨를 하는가 하면 춤추듯 뉴욕 번화가를 질주한다. 이것은 혹시 흑백 동영상 포스트로 채워진 페이스북 같은 영화일까? 그러나 영화를 지켜보는 동안 이해하게 됐다. 페이스북에 일상을 열심히 전시한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자랑할 만큼 인생을 만족스러워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족하려고 열심히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셀프 이미지와 현실을 혼동해 허방을 딛는 철없는 캐릭터를 지켜보는 스트레스가 <프란시스 하>의 난점이라면, 이 인물의 객관적 미숙함과 허영을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프란시스 하>의 강점이다. 남들이 보기에 프란시스는 개똥철학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자아도취적 젊은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녀는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매 순간 자각한다.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서면서도 캐릭터가 선택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나 <카모메 식당> 같은 영화와 다른 대목이다. 프란시스 할라데이(Frances Halladay)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중간에서 자른 영화 제목은 ‘신의 한수’인데, “나는 아직 제대로 된 1인분의 사람이 아니다”(I’m not a real person yet)라는 인물의 자괴감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사는 다른 표현으로도 반복된다. 파티에서 받은,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프란시스는 설명하기 힘들다고 답한다. 곧이어 “하는 일이 복잡해서냐?”고 묻자 “그게 아니라 그 일을 진짜로 ‘하고’ 있는 건 아니어서”(I don’ t really do it)라고 부연한다. 하고 있으나 정말로 하진 않는다는 느낌, 살고 있지만 내가 살고 있지 않다는 감각이다. 경제적인 궁핍은 둘째고, 프란시스는 성공이건 실패건 아직 제 삶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내다보고 계획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직업적으로는 목표를 세울 단서가 부족하고, 주거 면에서는 제대로 계약한 세입자가 아니므로 이사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 ‘가난한 예술가’라고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해보기도 하지만 뒷부분이 애매하다. 쪼들리긴 하는데 ‘예술가’인지가 불확실한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프란시스는 진짜배기 재능도 없고, 일심동체인 줄 알았던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진짜 반려자도 없으며, 심지어 진짜로 가난하지조차 않다(그녀에게는 구석에 몰리면 마지막에 기댈 중산층 부모가 있다). 프란시스가 주체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소비하는 순간뿐인데, 세금 환급금으로 부유한 친구에게 밥을 사고 홧김에 신용카드를 긁어 파리 여행을 떠나는 두개의 에피소드는 헛헛한 쓴맛으로 마무리된다. 이 성장영화의 결론에서 프란시스가 처음으로 온전히 제것으로 취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체념이다. 꿈꾸던 일은 아니지만 그 언저리에서 사회가 사줄 용의가 있는 능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솔메이트라고 집착했던 친구와 적정거리를 둔다. 우편함이 작으면 이름표를 접어 끼운다. 그녀는 보헤미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닫고 조촐한 유산자가 되어간다. 히치하이킹의 나날은 끝났다.
예고편에서 다 큰 여자들이 실없이 투덕거리는 광경을 볼 때만 해도 혀를 찼지만, 나는 <프란시스 하>가 여자들의 우정을 그리는 방식에 결국 호감을 느꼈다. 남자와의 연애 및 섹스가 관심사에서 배제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고민거리는 일과 여자친구끼리의 관계다. 그런데 프란시스와 소피(미키 섬너)의 우정은 큰 감동 없이 흘러간다. 그들은 어린아이 같은 뻘짓으로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술에 취해 부질없는 맹세를 주고받는다.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 사이의 우정이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경우의 대부분은 연애의 대립항으로서의 관계 아니면 의미심장한 자매애다(이런 영화도 귀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영화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탓일 터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 정도가 언뜻 떠오르는 예외다. 중년 남자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생처럼 티격태격하는 주드 애파토우 감독의 코미디나 세스 로건 주연의 영화들, <21 점프 스트리트>가 융성한 것과 대조적이다. 여자들에게도 시시껄렁하고 유치한 우정을 허하라.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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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즐 그레이스의 차림새
난치병을 앓는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그린 최루성 하이틴 멜로 <안녕, 헤이즐>은 “영화와 책 속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진실은 미안하지만 이거예요”라고 선언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예고한 바와 달리 <안녕, 헤이즐> 역시 질병의 무게와 냄새를 영화 속으로 깊이 들이지는 않는다. 적당히 설탕을 씌운 이 로맨스에 그나마 현실적 기운을 불어넣는 요소는 헤이즐(셰일린 우들리)의 화장기 없는 연기다. 여기엔 외양도 한몫한다. 영화 내내 호흡관을 코에 끼고 산소탱크를 끌고 다니는 그녀는 유행에 무심한 모양으로 잘린 쇼트커트 헤어와 티셔츠, 편한 바지와 운동화를 고수한다. 첫 데이트 날조차 예외는 아니다. 이 소녀는 꾸밈새로 남자애의 호감을 사고 점점 진심을 열어가는 통상적 구애 절차에 들일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