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크리스티는 1960년대 소위 ‘영국의 점령’(British Invasion) 시대의 아이콘이다. 팝 음악, 패션, 문학, 생활 스타일 등 영국의 문화가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로 퍼져나갈 때의 이야기다. 비틀스로 대표되는 로큰롤, 트위기 같은 모델이 입고 나온 모던한 의상, 그리고 존 오스본 같은 작가가 주도하던 ‘성난 젊은 세대’(Angry Young Men)의 문학이 전후의 세대 교체를 선언하며 청년들의 환대를 받을 때다. 정치적 위상은 약화됐지만 영국은 문화 영역에선 여전히 ‘제국주의’의 지위를 향유했다. 줄리 크리스티는 이때 등장한 ‘영국 뉴웨이브’(British New Wave) 영화의 신데렐라였다. 그녀의 등장에선 청춘의 상징인 자유와 독립, 그리고 ‘속도의 삶’이 느껴졌다.
<닥터 지바고>의 스타에 대한 저평가
줄리 크리스티는 존 슐레진저 감독에 의해 발굴됐다. 그는 토니 리처드슨, 카렐 라이스 등과 더불어 영국 뉴웨이브를 이끈 주인공이다. 이 감독들이 주목한 것은 청년 세대, 대도시 런던,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켄 로치의 선배들이다. 이들의 영화는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강한 부친 세대와 충돌하며, 자기 선언에 안간힘을 쓰는 노동자 계급 아들들의 분투기인 셈인데, 슐레진저는 진지하고 반항적인 동료들과 달리 청년 세대를 풍자하는 코미디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슐레진저의 출세작은 <거짓말쟁이 빌리>(1963)이다. 부모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 빌리(톰 코트니)는 온갖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볼품없는 현실을 위장하는 위험한 삶을 산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티는 빌리의 애인 역을 맡았는데, 충동적으로 미래에 도전하는 변두리의 위험한 인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통해 크리스티는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다. 금발의 푸른 눈, 바싹 마른 몸매, 세련된 패션 감각, 자신감 넘치는 인상, 그리고 자유분방한 태도(특히 성적으로)는 당대 여성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는 슐레진저의 후속작 <달링>(1965)에서 드디어 주연을 맡는다. 지루한 것은 잠시도 참지 못하고, 부와 명예를 좇아 변신을 거듭하는 여성이다. TV의 스타 방송인, 광고계의 큰손, 이탈리아의 귀족 등 수많은 남자를 섭렵하며 삶의 속도를 즐기는 당돌한 인물을 연기했다. 이 영화로 불과 24살이던 줄리 크리스티는 아카데미 주연상까지 받는다. 졸지에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신데렐라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곧이어 자신의 평생의 영화인 <닥터 지바고>(1965)에서 지바고의 연인 라라로 나왔다.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한 청년(톰 코트니)의 어린 애인이자 모친의 정부(로드 스테이거)를 뺏는 당돌한 딸, 그리고 지바고(오마 샤리프)와 질긴 인연을 이어가는 연인 역이었다. 필름누아르의 감성으로 보자면, 남자들을 전부 파멸로 이끈 팜므파탈이다. 그럼에도 라라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녀 자신도 남성들과 더불어 시대의 희생양으로 고통받기 때문일터다. 데이비드 린 감독 특유의 광활한 화면만큼이나 지바고에 대한 라라의 사랑은 한계가 없었지만, 그녀의 헌신은 끝내 보답받지 못했다.
그런데 <달링>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닥터 지바고>로 흥행 스타가 됐지만, ‘배우’ 크리스티를 따라다닌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운 좋게 성공한 신데렐라일 뿐 연기력은 형편없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돌이켜보면 빨리 유명해진 젊은 여배우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일 수도 있지만, 이런 혹평이 결과적으로는 1970년대 ‘연기파’ 크리스티의 탄생을 알리는 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70년대 들어 크리스티는 좋은 감독들을 많이 만난다. 사실 이것도 스타의 주요한 조건 중 하나인데, 그 시작은 조셉 로지였다.
조셉 로지의 <사랑의 메신저>가 전환점
20대의 폭풍 같은 인기가 식을 무렵, 크리스티는 조셉 로지를 만나 <사랑의 메신저>(The Go-Between, 1970)에 출연한다. 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그녀는 하층민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귀족여성으로 나왔다. 영화의 회화주의에 관한 한 이탈리아에 비스콘티가 있다면, 영국에 로지가 있는데, <사랑의 메신저>도 마치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의 고독한 풍경화를 보는 듯한 표현법이 압도적인 걸작이다. 그런 신화적인 배경에서 크리스티는 육욕의 사랑 때문에 가문의 명예를 위협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악녀로 나온다. 어린 남동생의 친구를 메신저 삼아 비밀 연애편지를 주고받는데, 남자의 몸이 그리워 메신저 역할을 거부하는 순진한 소년을 협박하는 장면은 그녀를 악질 이기주의자로 둔갑시켰다. 그런데 대중적 이미지를 바꾼 이 영화를 통해 크리스티는 비로소 배우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사랑의 메신저>는 크리스티에게 배우 경력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크리스티는 미국의 스타 워런 비티와 연인사이였다. 미국에 진출해 워런 비티와 함께 출연한 영화가 로버트 알트먼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이다. 역시 20세기 초가 배경인데, 크리스티는 서부의 탄광에서 매음 업소를 운영하며 떼돈을 벌려는 매춘부로 나온다. 어느덧 탄광까지 밀려난 나이 든 매춘부, 그렇지만 일확천금을 포기하지 못하는 파멸이 예정된 세속적인 여자 역할이었다. 눈이 끝없이 내려 세상이 온통 진창으로 변한 모습에서 그녀의 운명은 충분히 상상이 되는데, 바싹 마르고 얼굴에 핏기가 없는 크리스티는 비평가 폴린 카엘의 말대로 진짜 탄광의 창녀처럼 보였다. 미국에서도 ‘배우’ 크리스티에 대한 상찬이 줄을 이었음은 물론이다.
연이은 문제작은 영국 감독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1973)이다. 그녀는 연못에 빠져 죽은 어린 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정신적인 병을 앓는 여성으로 나온다. 물에 빠져 죽은 딸, 물의 도시 베네치아, 딸의 복원을 꿈꾸는 크리스티, 부식된 교회를 복원하는 남편(도널드 서덜런드) 등 뢰그 특유의 대칭적인 모티브들이 기하학적인 화면 속에 조합된 작품이다. 특히 남편과의 실제 같은 섹스 장면은 최근 개봉한 <님포 매니악>에 비교될 정도로 충격적이다. 말하자면 70년대 들어 크리스티는 거장들을 만나, 마치 스크린 속이 일상인 듯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줬다. 이때가 연기자로서는 절정이었다.
외모로 신데렐라가 됐지만 결국 뒤늦게 연기에 눈을 떠, 영화사의 스타로 성장하는 대표적인 배우가 줄리 크리스티다. 신데렐라로 끝나는 배우가 얼마나 많은가. 크리스티는 지금도 연극 무대에서, 스크린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엔 사라 폴리 감독의 <어웨이 프롬 허>(2006)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