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투명한 영화
2014-08-21
글 : 김혜리

※7월20일 일기에 <언더 더 스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허큘리스> 시사회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터스텔라> 예고편을 보았다. 황폐해진 지구를 대체할 인류의 서식지를 찾아 우주로 떠나는 주인공으로 매튜 매커너헤이가 나온다. <싸인> <아폴로 13> <그래비티>에서 본 듯한 예고편의 이미지와 사건은, 소문이 떠들썩했던 것치고 평이했지만 마이클 케인의 대사는 철렁했다. “우리는 이 세계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이 세계를 떠나려는 것이다.” 놀란은 이번에도 관객에게 독한 선택을 요구할 모양이다.

7/20

<언더 더 스킨>은 배짱이 굉장하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틀어 관객이 알아볼 만한 유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완벽한 진공에 가깝다는 점이 놀랍다. 외계에서 온 인간사냥꾼 로라(스칼렛 요한슨)는 대사와 행위는 있으나, 개성이 텅 비어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외계인’이라는 신원조차 극중에서 한번도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동료 외계인과 대화하는 장면도 없으며 포식자의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에도 괴물로 변신하는 일 따위는 없다. 그저 스칼렛 요한슨의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게 전부다. 그러면 홀린 듯 뒤따르던 희생자들을 검은 물이 삼킨다. 로라가 무감동하게 동일한 작업을 반복하는 전반부는 물론이고, 심적 동요를 맞는 영화 후반에도 관객은 그녀의 내면에 제대로 발을 들이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로라는 형체 없는 존재로 영화에 당도해, 바람에 흩날리는 재로 떠난다. 무(無)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셈이다.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스타가 체현한 로라는 오직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부정의 명제로만 정의내릴 수 있는 ‘순수한’ 타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反)성격화’(anti-characterization) 노선은 온전히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독자적 선택이다. 원작인 미헬 파버르의 동명 소설은 영화화하기 까다로운 소재이긴 해도 플롯과 캐릭터가 선명하다. 주인공이 수행하는 업무의 성격과 과거사를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상세히 묘사하고 내적 갈등을 줄곧 문장으로 옮긴다. 반면 언어 매체의 특성상 외계인 주인공의 외양은 모호하다. 원래는 네발과 꼬리를 가졌으나 끔찍한 외과 수술을 당해 지구인과 비슷하게 성형됐다는 설정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미지를 상상에 맡겨둘 수 없는 영화는, 소설과 반대 전략을 취한다. 섹시하고 육감적인 외모만이 제시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영화 <언더 더 스킨>에서 관객이 공유하도록 허락받는 부분은 로라의 사고와 감정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의 자료가 될 감각적 정보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로라가 보고 듣는 바를 추체험하는가?

우선 <언더 더 스킨>의 음향과 음악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가청 범위를 벗어나거나 우리가 관습적으로 귀를 닫고 있을 법한 사운드를 표현한다. 익숙한 동시에 기괴한 이 소리들은, 판단과 해석 이전에 로라가 감지하는 현기증과 경이감을 우리에게 타전한다. 하지만 로라가 없는 장면에서도 일관된 음악과 음향의 스타일을 100% 인물의 주관적 사운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이방의 존재가 들어옴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무드가 변질되고, 음향과 음악이 그것을 표현했다는 편이 맞다. 촬영 역시 에일리언의 1인칭 시점숏에 의존하는 길은 택하지 않았다. 로라는 관객의 시야에 포함돼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외계인과 일체가 되는 대신, 그녀를 ‘걸고’ 세계를 바라본다. 로라가 이방인으로서 목격하는 것들을 목격자인 로라의 모습과 더불어 목격하는 것이다(영화의 오프닝에서 로라는 하나의 눈동자로 등장한다. 그녀의 첫 번째 정체성은 목격자다).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은 로라가 글래스고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찍기 위해 10대의 특수 소형카메라를 자체 제작해 자동차 실내와 도시 시설물에 설치했다. 로라에게 시민들이 보이는 반응의 큰 부분은 실제다. 요컨대 로라는 리액션을 추동하고 비추는 거울이다. 그녀는 외계인 아지트의 검고 고요한 수면처럼 인간 사회와 지구의 풍경을 반영한다. 내 기억 안에서, <언더 더 스킨>의 로라와 가장 유사한 영화 속 존재는 <엉클 분미>에 등장했던 붉은 눈을 가진 말 없는 그림자 괴물이다. 로라도, 그림자 괴물도, 암흑의 공동(空洞)이다. 들여다보아도 거기 아무것도 없기에 그들에게 던진 시선은 우리 자신을 향해 반사된다.

7/22

<명량>의 이순신은 <언더 더 스킨>의 로라와는 상반된 맥락에서 ‘투명한’ 인물이다. 그의 충(忠)과 위대함은 대낮처럼 명명백백하다. 실존 인물 이순신이 마땅히 경험했을 균열과 불행은 <명량>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이 영화는 동시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세목을 스스로 인지하고 특정한 대사와 액션으로 확실히 못 박는다. 이순신의 아들 이회는 현대 관객을 대신해 스크린에 들어가 장군의 진의를 중계하며, 울돌목 전투가 끝난 다음 조선 수군 병사들은 과연 조국을 지켜낸 할아버지들의 공적을 알아줄 거냐고 후손/관객에게 묻는다. <명량>의 투명함이 절정에 달하는 대목은 울돌목 해전의 공간 설계다. 러닝타임 1시간에 걸쳐 명량대첩이 재연되는 해협은 영화 안에서 일종의 툭 터진 원형극장으로 기능한다. 언덕 위의 백성- 그리고 그들과 동일시하는 객석의 관객- 들은 국가가 당면한 위기를 툭 터진 전망과 카메라 렌즈의 권능을 빌려 원근법의 한계까지 초월해 명징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거기 대응해 지도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관전한다. 심지어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의도와 철학까지 플래시백으로 끼어드는 이회의 도움에 힘입어 확신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명량>은 백성이 어느 타이밍에 어디에 지렛대를 넣어 힘을 실어주면 사태를 역전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고 마침내 승전의 주역으로 기여할 자리까지 마련한다. 백성들이 함성으로 위험을 알려 승리에 일조하는 시퀀스는 <명량>의 전투 장면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불명확하고 늘어지는 대목이다. 연출자는 이 장면에서 극적 무리수를 상쇄하는 감정적 파괴력을 보았으리라. 국가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진상과 해결책이 한줌의 의혹 없이 보이고 들리는 이 상황은, 2014년 현재 한국 사회에 무겁게 드리운 무력감의 대척점이라고 해도 좋을 터다. 이윤 말고는 한국 사회를 실제로 작동하는 가치가 전무하다는 참담한 현실, 공익성의 보루여야 할 국가 인프라의 총체적 역기능 상태, 혁신이 긴급함에 공감하면서도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 그것을 해소해줄 개혁의 프로그래밍에 뜻이 없는 정치 리더들의 무능. <명량>은 그 모든 폐단을 울돌목이라는 콜로세움에 몰아넣고 부수는 스펙터클을 전시한다. 물론 엄밀히 말해 이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승리라기보다 도움되지 않는 국가를 감수하고 초인적 능력을 발휘한 이순신 개인과 영웅을 알아본 백성의 승리다. 여전히 해결책은 뛰어난 개인으로 귀결된다.

2014년 여름 <명량>의 대중적 호소력이 여태 알려지지 않은 이상적 리더십의 제시에 있다고 보긴 어렵다. 비우호적인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품위 있고 유능한 군인, 존경스런 지도자로서 이순신의 면모는 이미 문학작품과 드라마로 각인돼 있다. 오히려 이순신에 대한 <명량>의 해석은 기존의 이순신 서사에 비해 둔탁한 편이다. <명량>이 새롭게 한 일은 그의 싸움을 거대한 스크린 위에 단순 명백하게 무대화하고 전망 좋은 특석에 대중을 초청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위로받으라고 만든 영화에 위로 받지 못했을까. 역설적으로 역시 투명성 때문이다. 투명함은 불가피하게 단순화를 경유한다. <명량>의 전투 스펙터클이 환유하는 이상적 정치에는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돼 있다. 의사소통의 잡음과 지체, 눈에 보이는 것 바깥의 비밀이 없다. 누가 무엇을 왜 했는지 모두 안다.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를 마비시킨다. 오직 극장지배로서의 정치만이 비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썼다. 우리가 명량대첩이 재현되길 꿈꾸는 현실 정치의 장에서 진심은 확인하기 불가능하거니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그의 진실이 투명해서 만사를 맡길 수 있는 영웅이 아니라, 불투명함을 감안하고도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들과 국가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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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의 재발견

족구가 언제 이렇게 의미심장한 스포츠로 거듭났을까? 오래전 캠퍼스를 떠난 관객으로서 <족구왕>을 보며 깜짝 놀랐다. 비빌 언덕 따위 하나도 없으면서도 공무원 시험 준비는 내키지 않는 복학생 만섭(안재홍)은 족구에 열정을 쏟는다. 학우들이 꺼려해도 스펙에 도움이 안 돼도 즐거우니 족하다. <족구왕>에서 족구는 오늘날 청춘에게 죄악시되는 실속 없고 폼 안 나며 무용한 모든 활동을 상징한다. 플러스, 족구는 ‘초기자본’도 조직도 필요 없다. 단둘의 친구와 공(없으면 우유팩), 그리고 한뼘의 공터면 행복하니 이 어찌 군자의 놀이가 아닐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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