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2011)을 10년 만에 기어이 완성했던 안재훈, 한혜진 감독이 좀 이르다 싶게 작품을 내놓았다. 이번엔 한국의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 <소중한 날의 꿈> 개봉 때부터 얘기됐던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리즈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봄봄>을 엮은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다. <운수 좋은 날>의 더빙 작업 직전인 지난 3월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스튜디오 연필로명상하기를 찾았다. 그리고 개봉을 앞두고 스튜디오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스튜디오에서 키우는 강아지 나동이는 여전히 싹싹하게 손님을 맞았고, 안재훈 감독의 작업실은 여전히 골동품 가게 같았다. 공동연출자인 한혜진 감독은 역시나 자취를 감추었다가 인터뷰가 끝나고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한혜진 감독은 오늘도 자리를 피한 것 같다. 극구 인터뷰를 사양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그냥 특이하게 공명심이 없는 사람이다. 모든 예술가는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작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하는데, 한 감독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역할 분담은 명확한 것으로 안다.
=컴퓨터를 잘 못 다루는 관계로 시나리오나 캐릭터 작업 같은 손일을 주로 내가 맡고, 레이아웃, 배경 등은 한 감독이 한다.
-부부가 함께 일할 때의 장단점은 뭔가.
=좋은 영감은 미팅 때가 아니라 일상에서, 지나다니면서,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한 감독에게서 그런 영감을 종종 얻는다.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는데 특이하게도 나와 한 감독은 입맛이나 옷 입는 취향조차도 완벽히 다르다.
-서로의 영역을 완벽히 존중하는 건가.
=그건 근사한 표현이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구석이 있는데, 나는 독특의 최상을 만났다. 그런 데서 느끼고 깨닫는 것들이 있다. 단점은, 자잘한 단점이야 왜 없겠냐마는 딱히 큰 단점은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 오후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GV(관객과의 대화)를 하러 대전과 광주에 간다고 들었다.
=<소중한 날의 꿈> 때는 GV를 100번도 넘게 했다. 전엔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면 그것으로 감독의 역할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중한 날의 꿈>을 하면서 관객과의 대화가 감독의 부연설명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요즘은 사전 시사회도 많이 하던데, 개봉하기도 전에 이 영화를 응원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성심성의껏 그들을 만나려고 한다. 그런데 <소중한 날의 꿈>은 내 고민에서 출발한 이야기였지만, <메밀꽃…>은 이효석, 김유정, 현진건 선생의 소설이 출발점이라 GV 전에 준비를 더 하게 된다. GV 노트도 미리 만들었다. (프린트물을 붙여놓은 뚱뚱한 노트를 보여주며) 구인회는 뭐고, 동반자작가는 뭔지 정리해놨다. (웃음)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어린 시절 내겐 애니메이션보다 문학이 먼저였다. 언젠가는 문학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했었는데 이렇게 일찍 이 일을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이 오십 넘어 혹은 육십, 칠십이 돼서 이런 작품을 하면 응원해주는 분들이 더 많이 생길 테고, 그러면 남에게 크게 도움받지 않고도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소중한 날의 꿈>에 투자지원했던 EBS 담당자들이 ‘<소중한 날의 꿈>을 만든 곳이라면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했을 때 믿고 지원할 수 있겠다’고 해서 예상보다 일찍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소중한 날의 꿈> 공동체 상영이 있어 어느 시골의 문화센터에 갔다. 영화 보러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면서 처음 본 애니메이션이 <소중한 날의 꿈>이라고 하더라. 그동안 애니메이션은 우리네 어르신들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무엇이었던 거다. 그날 한 할아버지가 본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애니메이션을 더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작업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한국 단편문학 시리즈라면 충분히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업을 서둘렀다. 나머지 이유들은 작업을 하면서 차츰 생겨났다.
-나머지 이유들도 궁금하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세계 명작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고 자랐다. 요즘 아이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자란다. 그런데 이왕이면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정서가 담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이성과 감성을 키우면 좋지 않을까 싶더라. 또 2D애니메이션의 역사가 한국에선 한번도 꽃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져갈 상황이 돼버렸다.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험을 해봐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사실상 사라졌다. 그런데 한국 단편문학 시리즈가 계속 만들어진다면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을 꿈꾸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연필을 들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거니까 그 또한 근사한 일 같았다.
-<메밀꽃…>은 기본적으로 소설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설과 애니메이션은 닮은 듯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각색 과정에서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작품을 각색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대사를 바꾸는 거다. 대사를 바꾸면 사람들은 작품 전체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단편문학 시리즈는 그 반대로 대사는 똑같이 가되 다른 것을 바꾸는 쪽으로 각색의 방향을 잡았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메밀꽃밭에 대한 묘사는 한두줄이 전부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선 인물들이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그런 장면을 통해 소설의 정서를 살리려 했다.
-대부분 십대 시절 교과서에서 접했던 작품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원작 소설을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진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라는 표현만 해도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나 어제 누구와 잤어’ 이 이야기인데, 그걸 “무섭고도 기막힌 밤”으로 표현한 거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지, 하고 여러 번 감탄했다. “저 달 보며 이 길 걸을 테야”라는 구절에선 내 인생을 비추어보기도 했다. 내가 택한 이 일에 거추장스러운 의미는 다 떼고, 그저 라이트박스에 앉아서 연필 깎는 소리 들으면서 일하면 되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소설을 다시 본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봄봄>에는 판소리 도창(導唱, 소리나 아니리로 흥을 돋우고 이야기를 서술해주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해설자)을 접목했다. 절묘하게 작품과 어우러지더라.
=<봄봄>은 대사가 정말 많다. 그런데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대사를 온전히 살리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할 방법을 찾다가 판소리 도창을 떠올렸다. 도창은 젊은 국악인 남상일씨가 도와줬다. 워낙 마당놀이를 좋아하는데, 이번에 국악을 원 없이 썼다.
-소설과 애니메이션이 가장 다르다고 느꼈던 작품이 <운수 좋은 날>이다. 경성이라는 공간을 묘사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그리고 그 경성은 굉장히 우울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현진건 선생이 소설 쓸 때의 마음이 그래서일 거다. 일제시대 경성은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조선인들은 매일매일 울화가 치미는 삶을 살았다. 현진건 선생 역시 일장기 말소사건을 겪으면서 옥고를 치렀고, 가슴속에 화가 많았다. <운수 좋은 날>의 핵심도 마찬가지다. 경성이라는 놀라운 시대가 있고 거기에 가난하고 우울한 도시 하층민의 삶이 있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서도 단순히 일상의 아이러니함이 아니라 시대적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데 신경을 썼다. 경성의 화려함과 김 첨지 방 안의 쾨쾨함을 대비한다든지. 개인적으로는 이제까지 경성을 다룬 실사영화나 드라마는 전차라는 비주얼, 중절모를 쓴 신사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은 판타지로서의 경성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운수 좋은 날>의 경성은 시대 그 자체다. 그 시대는 절대 판타지가 될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은 너무 아픈 도시였다.
-배우 장광이 김 첨지 목소리를, 류현경이 김 첨지 아내 목소리를 연기했다.
=<메밀꽃 필 무렵>과 <봄봄>은 문어체와 고어체가 많아서 처음부터 성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 첨지는 배우 경험도 있고, 성우 경험도 있는 사람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장광 선생님이 딱 맞게 잘해주셨다. 김 첨지 아내 캐릭터는 류현경씨와 닮지 않았던가. 그림 그릴 때부터 류현경씨를 염두에 두고 그렸다. 사실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는 실사 연기와 달리 배우가 캐릭터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연기하기가 힘들다. 감독이 그림 그릴 때부터 캐릭터의 목소리 톤까지 머릿속에 그려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류현경씨는 캐릭터를 완벽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 연기하더라.
-<메밀꽃…> 이후 계획된 작품은 <소나기> <무녀도> <벙어리 삼룡이>다.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소나기>는 현재 60% 정도 작업이 진행됐고, <무녀도>와 <벙어리 삼룡이>는 콘티 작업 중이다. <무녀도>는 굉장히 토속적인 작품이지만 비주얼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쪽으로 가려 한다. <무녀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비슷하다. 그런데 실제로 그려보니 안 예쁘더라. 오히려 일러스트의 느낌을 살려도 괜찮을 것 같다. <벙어리 삼룡이>는 굵은 붓터치 느낌으로 갈까 한다. 이두호 선생님에게 캐릭터를 만들어주십사 청했는데 <이두호의 한국사 수업> 작업으로 바쁘시다더라. 선생님의 그림체를 참고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소나기> <무녀도> <벙어리 삼룡이> 이후 진행할 단편문학도 정해졌나.
=아마도 <날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독 짓는 늙은이>가 될 것 같다. <날개> 같은 작품은 좀 궁금하지 않나? 분명 이야기는 19금인데.
-그렇다고 감독님이 19금 애니메이션을 만들 것 같진 않고.
=그건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들이 융통성 있게 해야 하는 부분 같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작품인 건 분명하니까.
-한국 단편문학 이외에 진행 중인 작품도 있지 않나.
=머릿속과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 치면 꽤 되는데…. 우선 <황토빛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어서 원작자인 김동화 선생님한테 말씀드렸다. <도래샘 숲>은 <소중한 날의 꿈>처럼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창작 장편애니메이션인데, 제목도 수시로 바뀌고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도깨비와 정령들이 이 시대엔 더이상 자신들의 존재가 필요 없다고 판단해 서울을 떠나기로 한다. 그들이 떠나기로 한 날 꼬마 여자아이가 그 정령들을 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나간 것, 사라져가는 것에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 같다.
=몇달 전 몸이 너무 아팠다. 사람이 죽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무섭더라. 그래서 실크로드에도 훌쩍 다녀왔다. 어릴 때부터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집착해서 일기를 쓰는 것도, 그날 만난 사람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사라져가는 게 너무 슬퍼서 그랬던 것 같다. 지구의 역사로 보면 60년, 70년이라는 내 삶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물론 ‘나를 기억해주세요’는 아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후세 사람들이 조금 더 기억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실크로드는 무척 좋았다. 둔황의 석굴에 가면 몇 천년 전에 그려진 벽화들이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렸을까’ 거기서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 (웃음)
-이상욱 프로듀서는 기자들이 <메밀꽃…>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걱정이던데.
=그런가? (웃음) 그런데 엄청난 마케팅비를 들이는 영화가 아니라면 초연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잘 만들어야 하고. <메밀꽃…> <소나기> 이런 작품은 사람과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로선 즐거운 일이다. 세월호를 비롯해 모든 것을 빨리빨리 잊어버리는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우리의 노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할지 그럼에도 들여다봐줄지, 그 반응도 궁금하긴 하다.
3월 말, 연필로명상하기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데 안재훈 감독이 기자와 사진기자의 사진을 한장씩 찍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만난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는 한 방편으로, 인물의 그림을 그려 선물하곤 한다는 거였다. 7월 초, 그림이 완성됐다는 메일이 왔다. 첨부파일은 총 세개. 원본, 휴대폰용, 색을 입히지 않은 스케치 버전. 8월에 다시 스튜디오를 찾았을 땐 “원본이 어딨더라” 하면서 원본 그림부터 찾았다. 안재훈 감독의 아날로그 감성, 아날로그 방식은 사람을 쉬 감동시킨다. 그의 삶의 방식은 고스란히 작품에도 반영된다. 연필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 그것이 안재훈 감독의 직업이자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