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후배가 같은 회사 동료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며 울고 있었다. 40대 유부남은 다정한 말로 애를 달랬다. “야, 회사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봐,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 마음 착한 30대 싱글 여성(나)도 상심한 후배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거들었다. “그래, 남자는 진짜 많아. 이 남자 저 남자 마음껏 만나다가… 내 나이 되는 거지.” 우왕, 후배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쫓겨나다시피 술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회한에 잠겼다. 하늘을 우러러 몇점 부끄럼 있게 살아온 3X년, 후배가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아요”라며 통곡하다니, 싱글이 죄인가요. 그렇다, 죄다. 일찍이 그것은 죄가 되리라 예언한 분이 계셨나니 내 나이 스물다섯에 만났던 마담뚜님이셨다.
남들 4년 만에 나오는 대학을 5년 만에 마치고도 좋다며 메이크업받고 사진찍던 그해, 졸업 앨범에 실린 번호를 보고 전화했다는 마담은 당당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나를 설득하면서 칭찬은 한개도 안 해주고 나무라기만 했다. 인문대 나와서 취업을 해봤자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을 것이며, 연봉은 얼마나 될 것이며, 지금은 결혼할 마음이 없겠지만 결혼을 안 하면 이익보다 손해가 많을 것이며, 직업이 빵빵한 후보를 내가 줄줄이 대기시키고 있는데 이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며, 서른 넘으면 그대, 후회할지니….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전부 맞는 말이었지(먼 산).
그처럼 끈질겼던 마담뚜는 내 한마디로 깨끗하게 마음을 접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키가 몇이에요? ” “160이요.” “네.” (전화 끊고) 뚜뚜뚜뚜…. 이래서 마담뚜인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후회가 막심하다. 그 시절 내가 철이 들었더라면 나는 160이지만 우리 엄마는 167인데 격세유전이라고 들어는 봤냐며 마담의 번호를 땄을 텐데.
스물다섯의 나는 마담에게 면박만 주었지만 3X살의 나는 새삼 분개한다. 설득 30분 만에 나를 포기하다니, 프로라면 보다 끈질기게, 보다 집요하게, 보다 현란하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나는 키가 160이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프로 중매쟁이란 어떤 것일까? 결혼정보회사에 다니는 지인이 있긴 하지만 그 앤 나한테 지금은 재혼 리스트에 들어갈 것이며 그나마 몇년 지나면 딸린 자식은 몇명까지 괜찮은지 선택해야 한다며(근데 몇년 지났다, 애는 두명까지 괜찮습니다) 상처만 주었다. 아니야, 이 세상 어딘가엔 나에게 초혼을 주선해줄 아름다운 중매쟁이가 있을 것이야. 그래서 봤다, 반세기 중매 역사에 빛나는 영화 <달콤한 중매쟁이>를. 술과 노래의 나라, 맥주는 아가들이나 마시는 거라며(스물한살짜리 아일랜드 아가가 나한테 그랬다) 위스키를 퍼붓는 아름다운 나라 아일랜드. 그 땅의 중매쟁이 더모트 옹은 짝 없는 관광객이 눈에 띄기만 하면 자기가 맺어준 부부가 몇쌍이나 되는지 아느냐며 아무한테나 찍어 붙이는 것이 필생의 업이자 낙이다. 근데 자기는 미혼. 중매 축제가 열리는 그 동네엔 다른 중매쟁이도 많던데 왜 더모트 옹은 결혼을 안 한 걸까, 결혼은 인간의 본성이라더니. 어쨌든 이 영감님의 최대 무기는 막무가내다. 사냥감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틈만 보이면 파고들어 짝짓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짝을 만들기만 해선 진정한 프로라고 할 수 없다. 때로는 찢어놓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딴사람하고 맺어주지. 주민이 서른세명뿐인 마을에서 중매 사업하느라 고생하는 소설 <페리고르의 중매쟁이>를 보면 중매쟁이로 성공하기 위한 중대한 밑천 중의 하나는 두터운 미혼자 명부이다. 문제는 <헬로 돌리>의 프로 마담뚜 돌리(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한쌍을 갈라놓으려는 이유가 남자를 향한 사심 때문이라는 것. 암요, 중매쟁이도 결혼은 해야지요. 더모트 옹과 돌리 여사가 소규모 자영업자라면 기업형 중매쟁이도 있다. 하늘도 땅도 모르게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다. 스타일 담당, 사투리 교정 담당, 대사 담당 등을 두루 갖춘 이 전직 극단은 위장 취업자를 고용하고 강우기를 동원하는 탄탄한 자본과 조직력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서 만나 결혼하면 축의금도 보내준다, 훗.
하지만 아무리 기업형 중매의 성공률이 높더라도 골목 상권은 지켜야 한다. <러블리 로즈>의 꽃 파는 소녀 투이는 자기 마음에 든 남녀를 맺어주려고 한턱 내겠다며 그들을 따로따로 초대해 만나게 한다. 열살짜리 가출 소녀가 꽃 팔아 번 코 묻은 돈으로 염소전골을 먹는 어엿한 어른 두분. 목적이 있다면 돈은 아깝지 않다.
첫 직장에 다니던 시절, 나도 한번 짝짓기를 계획한 적이 있다. 사무실 대장 세명이 이혼남과 독신남, 기러기 남편이었던 관계로 나는 주말에도 출근해 그들과 놀아주는 게 일이었다. “주5일 근무긴 한데, 우린 다 토요일에도 나와. 너도 나와라, 집에 있으면 뭐하겠어.” 스물다섯 꽃다운 처자가 주말에 할 일이 없겠습니까. 놀아줘, 놀아줘, 두눈을 반짝이는 아저씨들에게 시달리다 못한 나는 왠지 아는 여자가 많을 것 같은 잘생긴 선배에게 비싼 청담동 커피를 사며 아저씨 대상 미팅을 주선해달라 읍소했으나 기러기 남편이 검열에 걸려 한잔에 8천원짜리 커피값만 날리고 말았다. 내 코 묻은 돈 8천원, 아니 두잔이니까 1만6천원, 흑.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시간 많은 상사가 괴롭힐 때마다 중매쟁이를 꿈꾸었다. 전전 직장의 이혼남도 그랬지만, 저 사람을 누군가에게 소개한다는 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인 것만 같아, 안 그래도 산처럼 쌓인 업보에 하나를 더 얹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포기했다. 그래서다, 사라진 일곱 시간에 관한 소문이 나돌 때마다 내가 시간은 많고 하는 일은 없는데 성격은 나쁜 상사를 모시는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은. 4대 보험만 됐지 되는 일이 없는 정직원들이여, 중매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니.
잘생기고 착한데… 게이야
중매쟁이도 불가항력인 두세 가지 것들
욕심 1남4녀의 장녀로서 남매 중에 유일한 미혼인 후배가 메일을 하나 받았다. “이번 여름 산사(山寺)에서 꽃피는 사랑! 선남선녀 30쌍 선착순으로 받습니다!” 후배는 울었다. “이젠 남자 만나러 절까지 가야 하는 건가요.” 얘야, 내 선배는 성당에서 남자 만나려고 세례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몰랐던 사실이 있으니 한국엔 10년 동안 1500쌍의 결혼을 주선한 중매의 고수 스님이 있다! 그분 혜철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매쟁이 최고의 적은 ‘욕심’이라고. 한마디로 눈을 낮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러블리 로즈>의 스튜어디스 란은 제대로 된 방 한칸 없지만 마음 착하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행복했다는 이야기. 참고로 그 후배가 원하는 남자는, 키 크고 잘생기고 학벌 좋고 지적인 남자. 뭐, 성(城)이나 작위 같은 건 없어도 되겠니?
무념무상 영화 <엠마>와 <클루리스>는 모두 동네에서 중매 서느라 바쁜 처녀가 나오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가 원작이다. 그중 <클루리스>는 현대가 배경이기에 설정이 조금 다르다. 모든 소녀가 꿈꾸는 남자, 잘생기고 착하고 섬세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귀염둥이가 드디어 나타났는데… 게이야. 영화 <고>에서 섹시한 남자는 왜 몽땅 게이냐고 투덜거리더니 그 말이 맞았어. 천하의 중매쟁이(라고 자기는 믿고 있는) 셰어(알리시아 실버스톤)도 이건 안 된다.
진상 키 크고 잘생기고 학벌 좋으며 지적인 (후배야, 네가 원하던 남자구나) 현수(정준호)는 결혼을 할 건지 말 건지 맞선만 잡았다 하면 한 시간 지각하거나 일찌감치 헤어진다. 그보다 심한 건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열두장짜리 쿠폰에서 몇번은 빼달라고 주장하는 그의 엄마. 그걸 직접 겪고도 이 진상 집안 고객과 사귀다니,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커플 매니저 효진(신은경)에게 무서운 건 진상보다 외로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