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여자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아든 여자가 계단에서 휘청거리자 편지가 땅에 떨어져버린다. 편지의 순서는 뒤섞이고, 여자는 그중 한장을 빠뜨리고 줍는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에 들어온 여자가 편지를 읽기 시작하고, 뒤엉킨 시간의 편지 내용이 펼쳐진다. 흩어진 편지, 생략된 한장, 낯설어진 시간.
홍상수 영화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선상에서 ‘흐른다’는 인상을 준 적은 없다. 시간의 인과론이나 명확한 선후 관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최소의 일관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심축이 그의 영화에서는 늘 모호하고(<하하하> <북촌방향>), 나아가는 것 같지만 무언가에 막혀 있거나 제자리다(<밤과낮>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그의 시간관은 줄곧 반복, 폐쇄된 순환 등의 용어로 말해져왔지만, 고정된 시간적 틀을 거부하는 그의 영화들 앞에서 그런 용어는 비평적 무력감에 더 닿아 있다. 더욱이 최근 몇년간, 홍상수의 작업방식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최소의 안전한 틀조차 버리고 촬영 당일의 날씨, 장소, 배우들에게 거의 모든 걸 걸기 시작하면서, 그 세계의 시간을 설명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틀 없이도 저기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생생한 덩어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그의 영화에 대해 쓴다는 것은 결국 실패를 전제한 이 질문과 대면을 하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의 또 다른 시간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전과는 무언가 좀 다른 일이 이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다니는 모리(가세 료)는 영선(문소리)에게 말한다. “시간은 실체가 아니에요.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어요.” <자유의 언덕>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시간의 틀을 해체하는 영화다. 여기서 해체의 결과만큼 중요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틀이라는 전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영화도 최소의 얼개는 필요하겠지만, 홍상수의 최근 작품들 중에서도 <자유의 언덕>은 파편화되기 이전의 틀, 즉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통념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장 많이 의식하게 만든다. 시간의 덩어리들이 붙여지고 분리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시간을 뒤섞기 이전의 상태에도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머무르게 한다. 홍상수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언급한다. “뭘 뒤섞으려고 해도 뭐가 먼저 있어야지, 존재도 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해서 그것을 또다시 뒤섞는다는 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찍었는데, 찍을 때는 ‘흐트러질 순서’란 의도를 최대한 생각 안 하고 찍었습니다.”(<씨네21> 970호) 홍상수의 영화가 대부분의 경우 장면을 찍은 순서로 배열한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순서대로 찍은 “재료”(홍상수는 위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첫 번째 편집본을 그렇게 표현한다)들을 뒤섞는 편집의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며 편지의 내용을 시간 순으로 복구해보려는 욕구는 얼마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물들이 입은 옷이 바뀌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추측해보거나, 인물들이 이전 장면에서 말하는 내용의 원인이 될 만한 것들이 뒤에 나오면 상황의 전후 관계를 파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선이 다짜고짜 모리를 찾아와 자신의 강아지를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친밀감을 표시하는 순간의 난감함은 모리가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골목에서 마주하는 장면이 나온 뒤에 이해되고, 모리가 영선의 남자친구에게 갖는 적대감은 영선의 남자친구가 모리를 대하는 무례한 태도를 본 다음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사상의 인과관계가 홍상수의 영화를 감상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컨대, 모리가 강아지 꾸미를 발견하는 장면이 없다고 해도 영선과 모리가 서로를 탐색하는 앞선 장면의 활력이 사라지지 않으며, 영선의 남자친구와 모리의 불편한 만남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도 모리의 날선 반감이 드러나는 앞선 순간의 미묘한 결은 충분히 체감된다. 오히려 이 뒤바뀐 순서, 즉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이 불러일으킨 사후의 감정이 앞서 제시되는 방식은 쓸데없는 형식적 절차 없이 솔직하게 밀고 나오는 감정의 맨 얼굴을 먼저 대면하게 하는 쾌감을 안긴다. 혹은 과거와 현재의 순서가 뒤섞이고 둘의 자리가 멀어지자, 각각의 장면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충만한 세계로 숨 쉬며 내용적인 관계를 압도한다.
이미 도착해 있는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단순한 서사적 인과론의 차원을 벗어나서도 여전히 시간적 전후 관계의 틀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자유의 언덕>의 뒤섞인 시간은 현재의 무한 반복을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미래일 수도 있다는 느낌, 즉 정해진 미래가 여기 어딘가에 이미 도착해 있다는 기분에 종종 사로잡히게 한다. 우연의 활동 속에서 시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반복되는, 그러니까 끝이 없어서 불안한 여행이 아니라 뒤엉킨 시간의 면들 어딘가에 미래가, 달리 말해 끝이 존재할지도 몰라서 불안한 여행이 여기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틀이 분해되고 있고, 그 분해된 조각들을 틀로 소급하려는 관습화된 시간의 힘과도 싸우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그 틀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상하고 힘겨운 자리에 <자유의 언덕>이 있다. 틀 밖으로 도망치지 않고, 틀 안에서 틀을 부술 수 있는가.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도 맹렬하게 이를 질문하고 있다.
이 영화의 시간을 희미하게나마 지탱하는 축이 있다면, 그건 모리가 쓴 편지를 읽는 권(서영화)의 시간일 것이다. 영화는 모리와 주변 인물들의 일화들을 보여주고 중간중간 편지를 읽는 권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편지의 시간은 뒤죽박죽 펼쳐져 있고 그걸 읽는 권의 시간은 하루 안, 같은 장소에 정적으로 놓여 있다. 권이 읽고 있는 편지의 내용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들이라고 짐작되지만,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자유의 언덕>에는 이 편지가 포괄하지 못하는 잉여의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가장 극명한 예로,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영선과 모리의 관계가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거나 권이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편지(를 읽는 권의 시간)가 이 영화의 축이라고 해도 그 축이 알지 못하는 부분들, 그 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들이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우리는 이미 홍상수의 지난 영화에서도 이러한 순간들과 대면한 적이 있다. <하하하>에서 흑백사진의 현재와 컬러 동영상의 과거가 교차할 때, 둘 중 어느 한쪽을 시간의 축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웠고, 축으로 포괄되지 못하는 잉여의 기운들이 이 영화를 현재와 과거, 현실과 그 너머 어느 한편에 정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잉여의 순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리를 연기한 배우 가세 료는 <자유의 언덕>에 대한 인상을 “프리즘” 같다고 표현했는데, 그 멋진 묘사가 영화 속 편지의 비밀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편지의 문자들은 모리의 통제하에 쓰인 것이지만, 권이 그 편지를 읽는 ‘자유의 언덕’이라는 시공간의 프리즘을 통과하며 편지는 모리의 의식, 의도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갈라진다. 마치 프리즘이 백색빛의 파장을 굴절시켜서 무지갯빛 스펙트럼으로 분리시키며 자기동일성을 여러 갈래로 해체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권에게 도달해야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편지는 시간 관계가 흐트러지면서 그 목적을 넘어선다. 그 뒤엉킨 시간의 배열은 한 사람을 향한 단순하고 순수한 감정과 실은 분리될 수 없는 죄의식과 욕망, 위선과 용기, 유혹과 양심 등으로 뒤엉킨 편지의 무의식이다. 모리가 수시로 잠에 빠져들고 종종 깨어나길 거부하는 건 그에게 잠은 현실의 시간을 멈추는 (죽음을 제외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며, 그 멈춘 시간 안에서 비로소 깨어나는 건 무의식의 시간일 것이다. <자유의 언덕>에서 물질로서의 편지는 현실의 시간에 놓인, 누군가를 기다리는 하나의 마음이지만, 무의식으로서의 편지는 모순된 마음의 양상들을 펼쳐 보인다.
미래와 과거 사이의 시간에 갇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시간을 무의식의 시간으로 정리해버리는 건 지나치게 간편한 해석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우리가 보는 것이 편지의, 혹은 모리의 무의식이라면 그 무의식의 배열은 모호하지만, 그 무의식의 장면들을 지배하는 감정이 더없이 투명하다는 간극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일 것이다. 그 간극은 이 영화가 목적론적인 시간은 격렬히 거부하면서도 어떤 지향들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에서 의아한 두 지점에 대해 말해야 한다. 하나는 이 영화의 엔딩이다. 마침내 권이 모리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 모리와 재회한다. 마치 영화의 축이 스스로 움직여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은 이 장면이 지나면, 모리와 권은 커다란 여행 가방들을 들고 언덕을 오른다. 그 위로 그 둘이 다음날 일본으로 떠나서 아들, 딸을 낳았다는 모리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무언가 실현되었다는 인상, 불안하게 부유하던 무의식의 시간이 마침내 현실의 시간 안에서 평화롭고 단단하고 안전하게 정착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장면은 무척 아름답지만, 그만큼 무섭다. 결혼을 해서 아들, 딸을 낳았다는 저 미래의 목소리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장면에 불쑥 개입하며 그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버릴 때, 단순하고 천진난만한 미래의 목소리, 거기 배어 있는 순진무구한 믿음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던 세계를 단숨에 균열해버리는 어떤 목적 혹은 가치가 아닌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영화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영화의 문을 닫는 방식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리는 게스트하우스 마당의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다. 그의 방문이 열리면 영선이 술이 덜 깬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옷차림으로 봐서, 두 사람이 처음 저녁을 먹으며 술에 취해 대화를 나누던 초반의 장면에 이어지는 장면인 것 같다. 즉 모리가 영선과 섹스를 하기 이전, 그러니까 그가 영선과 처음 자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던 밤, “일본으로 돌아갈 건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자책하기 이전의 상황일 것이다. 왜 이 장면이 이 자리에 온 것일까. 권과의 미래를 말하던 앞의 장면은 모리의 꿈이라는 것인가. 지금까지 본 영선과 모리의 관계가 모리의 소망이라는 것인가. 존경하는 여인(권)과의 영원한 결합을 말하는 장면에 이어 사랑하는 여인(영선)과 긴밀해지기 이전으로 돌아간 장면이 여기 나란히 붙어 있다. 전자는 미래로 열려 있고 후자는 과거로 열려 있고, 정작 남자의 시간은 그 사이에 갇혀 있다고 말해야 할까. 모든 것이 모호하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편지는 목적을 이루기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모리는 일본으로 돌아가길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권과의 장면을 통해 ‘더 행복한’ 미래를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한 태도로 말하고는 바로 이어지는 영선과의 장면을 통해 그걸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틀을 부정해버리는 세계의 간극, 혹은 태도의 충돌. 그 간극과 충돌은 잔인하고 가엽고 아프다.
궁극에는 끝을 의식하는 영화
이 엔딩의 이상함과 관련해서 더 말해야 할 다른 하나는 모리가 하는 말들이다. 그는 끊임없이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 더 행복한 것에 대해 말한다. 홍상수의 영화들이 언젠가부터 그런 가치를 포용하기 시작했지만 <자유의 언덕>에서만큼 거듭 힘주어 강조한 적은 없었다. 모리의 말에 담긴 순수한 의도를 의심할 수는 없지만 질문은 남는다. 일관된 시간의 전개가 여기 없다는 건 지속되는 무언가로부터 영화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는 의미일 텐데, 그때 ‘더 나은’ 상태에 대한 판단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모리와 영선이 침대에서 나누는 대화를 떠올려보자. 모리는 다짐과 달리 영선의 집으로 가서 또 잠을 자고, 영선의 남자친구에 대해 묻는다. 영선은 그가 다른 여자 친구도 만나는 것 같고, 심지어 다른 여자를 이 집에 데려온 적도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는 양심이 없다고 말하는데, 모리는 이에 동조하며, 그런 사람은 만나지 말라고 걱정한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영선의 화장실에 갇혀 마치 자신이 방금 한 그 말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무력하게 바라보듯 불안한 침묵 속에 앉아 있다. 모리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인간처럼 그려지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 그의 욕망과 행동이 영선의 남자친구보다 더 낫다고 판단할 근거가 영화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이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가치와 선택에 대해 절실하게 말하지만, 그 기준을 내부에 새겨두는 것은 망설인다. 혹은 그 기준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의 지평을 불가능하게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자유의 언덕>을 지배하는 위의 간극들, 아니 분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모리가 꾼 이상한 꿈에 등장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사라지고 싶었다”라는 모리의 내레이션이 나온 다음, 그는 어느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때, 어디선가 모리의 이름을 부르는 여인의 음성이 들리는데, 권의 것으로 짐작되는 그 목소리는 죽은 원혼의 흐느낌처럼 그 장면에 스산하고 날카롭게 틈입한다. 이내 모리는 이상한 꿈이라며 잠에서 깨지만, 그 장면에서 모리를 포획한 죽음의 기운은 영화 내내 잊히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모리와 권이 삶의 구체성 안에서 단단히 묶인 것처럼 느껴지는 언덕길 장면이 등장할 때의 충격은 그처럼 죽음에 가까웠던 존재가 그처럼 삶에 닿아 있는 순간을 목도하는 데에서 상당 부분 비롯되는 것 같다. 죽음의 섬뜩한 형식과 삶의 투명한 내용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체감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을 해체해서 시간 틀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시도는 결국 언젠가 도래할 끝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예술의 안간힘이다. 모리가 죽은 사람처럼 잠에 빠져드는 이유는 잠 속에서는 그 끝의 시간이 현실 너머로 전환되며 영원히 유예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가 강조하는 감정의 가치들은 그 끝을 외면하고 시간의 누적을 견디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어렵다. <자유의 언덕>은 위계 없이 뒤섞인 시간의 자유로운 활력으로 시간의 압력에 저항하면서도, 매 순간 어딘가 이미 도착해 있을 미래, 궁극에는 끝을 의식하는 영화다. 그 사이에서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려는 노력이 더없이 피로한데, 그 피로함이 참으로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