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만 자면 꼭 꿈을 꾼다. 밤잠을 잘 때에도 꿈을 꾸겠지만, 유독 낮잠 속의 꿈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낮에는 머리가 좋아지나? 실은, 꿈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꿈꾸지 않기 위해 낮잠에 들고 싶지 않은데, 낮잠은 언제나 슬며시 허리를 붙들고 나를 주저앉힌다. 낮잠 속의 꿈은, 나를 깊은 곳으로 데려가지 않고 낮은 곳에서, 이를테면 무릎까지만 잠기는 냇가에서만 어슬렁거린다. 꿈은 여기저기 낯선 곳으로 나를 끌고 다니다 마지막엔 싫증났다는 듯 내팽개친다. 나는 불현듯 꿈에서 깨어난다. 꿈꾸는 걸 싫어한다기보다 꿈에서 깨어날 때의 이상한 감촉이 싫은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현실로 불시착했을 때의 어리둥절함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팔은 저리지, 목은 마르지, 여기는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도 가물가물하지, 아무튼 꿈으로 가고 싶지 않다.
이런 적도 있었다. 20살 즈음의 일요일 오후, 집 거실에 드러누워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초가을이어서 거실 바닥은 조금 차가웠고, 자고 있는 사이 해가 기웃기웃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깼는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꿈을 꿨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꿈은 아니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고 어딘가 아픈 것도 아니었고 슬픈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울고 있는 내가 이상했다.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말하자면 유체이탈 같은 것이랄까) 울고 있는 나를 느끼고 있었다. 왜 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한참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울었던 이유는 꿈속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실은 이 글을 쓰기 전에도 낮잠을 잤고, 또 꿈을 꿨다. 어떤 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꿈은 말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말하는 순간에만 꿈은 육체를 얻는다. 단어와 문장과 발음은, 말하자면 꿈의 몸인 셈이다. 나쁜 꿈을 꿨을 때 말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꿈은 곧 지나간다. 꿈에게 몸을 주지 않으면 꿈은 곧 사라진다. 재미있는 꿈을 꿨을 때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꿈에게 몸이 생기고 나면 꿈은 사실처럼 바뀌고, 꿈과 꿈 아닌 것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꿈과 꿈 아닌 것을 구별하기 힘들다. 살바도르 달리처럼 잠에서 깨자마자 꿈을 그린다면 선과 면이 꿈의 육체가 될 것이고, 꿈에서 본 것을 글로 옮긴다면 문자가 꿈의 육체가 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자유의 언덕>을 보고 나서 작은 실마리 하나가 풀렸다. 꿈에 대한 감정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감정이 비슷했다는 걸 이제 알겠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느꼈던 알 수 없는 찜찜함, 석연치 않음의 정체는 (어차피 영화란 꿈을 벤치마킹한 것이겠지만) 낮잠 속의 꿈과 비슷했다. 어이없이 환상적이다가 또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가끔 실소를 자아낼 만큼 황당하기도 하다. 꿈꾸기 싫다면서도 매번 낮잠을 자는 것처럼, ‘나하곤 안 맞아’ 하면서도 자주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자유의 언덕>에서 나는 처음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완벽하게 매료당했다.
<자유의 언덕>은 일본인 모리(가세 료)가 한국인 권(서영화)을 만나러 한국에 왔다가 영선(문소리)과 알게 되는 얘기다. (내가 원래 스토리 정리에 약하다.) 모리가 보낸 편지를 권이 읽는다는 것이 이야기의 중요한 틀인데, 권이 편지를 흘리는 바람에, 게다가 한장을 분실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뒤죽박죽이 되고, 밑도 끝도 없어진다. <씨네21>의 홍상수 감독 인터뷰를 보니, 순서대로 찍고 편집할 때 재배열했다고 한다. 원인과 결과가 나란히 있어야 할 텐데, 결과가 먼저 있고 원인은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 때로는 결과만 있고 원인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꾸는 꿈도 늘 그랬다. 꿈속에서 원인과 결과는 뒤죽박죽이고, 심지어 중요하지도 않다. 하늘을 날게 됐다면 어째서 그런 것인지 중요하지 않다. 날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의 언덕>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재조립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무수히 많은 몸으로 변신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 같기도 하다. <자유의 언덕>의 이야기 구조를 거칠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A: 권과 모리는 예전에 사랑한 사이다. B: 모리는 권을 찾아왔지만 권은 서울에 없다. C: 모리는 게스트하우스에 묵다가 카페에서 우연히 영선을 만난다. D: 모리는 영선의 개를 찾아준다. E: 영선은 모리에게 감사의 뜻으로 식사와 술을 대접한다. F-1: 영선과 모리는 잠자리를 함께한다. F-2: 영선과 모리는 잠자리를 함께한다. (G: 모리는 영선의 남자친구와 싸운다.) H: 모리는 이 모든 일을 적어서 권에게 편지를 보낸다. I: 권이 돌아와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모리를 만난다. J: 모리는 권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행복하게 산다. K: (마지막 장면) 영선은 모리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취에 괴로워하며 깨어난다.
모리가 권에게 쓴 편지에는 B, C, D, E, F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G는 뒷이야기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실제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잃어버린 편지 한장에는 이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을까?) H와 I 사이에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다. 편지를 보내고 권이 그 편지를 보기까지의 일주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K의 자리가 난처하다. 권이 잃어버린 편지에 든 내용은 G가 아니라 K일지도 모른다. 영화 전체가 모리의 내레이션으로 이뤄진 것인데, K만 덩그러니 그 내레이션 바깥에 있다. K를 어디에 넣어야 할까. E와 F 사이에 넣을 수도 있고, F-1과 F-2 사이에 넣을 수도 있고, F-2와 G 사이에 넣을 수도 있다. 조금씩 어색하지만 어디에나 넣을 수 있는 이야기다. K의 첫 장면은 모리가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리는 자주 꿈을 꾸었고, 기괴한 꿈을 많이 꾸었다. 자, 그러면 모리는 무슨 꿈을 꾼 것일까. 어쩌면 H는 꿈이 아니었을까. 아니, 이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 내내 모리는 자주 잠을 자고, 잠을 더 자야겠다고 말하고, 영선은 모리에게 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K를 어디에 넣는가에 따라서 영화는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모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권은 이 모든 이야기를 편지로 읽고도 그렇게 해맑은 얼굴로 모리를 만날 수 있나? 둘은 행복할 수 있나? 게스트하우스 아주머니는 어째서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나. 무엇이 꿈인지, 무엇이 꿈이 아닌지 생각하기에 따라 영화는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볼 때마다 영화는 변할 것 같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 꿈은 독백이라고. 환상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포켓판 소설이라고. 모리는 <시간>이라는 문고본을 계속 들고 다닌다.
영화 속에 영어가 넘쳐난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만나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어떤 때는 직설적이고, 또 어떨 때는 상투적이다. 꿈을 꾸다보면 그런 순간이 자주 있다. 뭔가 설명하고 싶은데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순간. 말하고 싶은데 말해지지 않는 순간. 우리는 말을 하면서 인격의 몸을 만들지만, 꿈에서는 그 몸이 통하지 않는다. 꿈에서는 새로운 ‘언어의 육체’가 필요하고, 때로는 ‘언어의 육체’가 실제 몸보다 더욱 육체적일 때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에 대해서 자꾸만 얘기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기분 좋은 꿈이라서 그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