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방금 출발했어요
2014-10-10
글 : 권혁웅 (시인)
[ 방금 출바랟써요 ]

겉뜻 늦은 출발을 질책하는 당신에게 변명하는 말 속뜻 당신의 출발을 격려하는 말

주석 한 시간째 소식 없는 중국집이다.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성조가 붙은 중국어 같다. 위장과 십이지장과 소장이 민란 일보 직전이다. 참다못한 당신이 다시 전화해도 중국집은 요지부동이다. 그 이름처럼 만리장성이다. 그래도 중국집은 당신에게 복음 하나를 선포해준다. “방금 출발했어요.” 그것은 조만간 현관 벨이 울릴 거라는 암시. 사실은 삼십분 전에 전화했어도, 삼십분 후에 전화해도 똑같이 들었을 말.

인디언의 기우제는 반드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그것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마침내 배달원이 온다. 일하는 젊은이는 누구나 비슷하다. 소음기 뗀 오토바이를 탔고 머리에는 노란 물을 들였고 한손에 철가방을 들었다. 귀에는 이어폰, 허리엔 전대, 거기에는 당신에게 제공할 쿠폰도 있다. 서른 그릇에 탕수육, 쉰 그릇에 팔보채. 당신은 앞으로도 자장면 스물아홉 그릇을 더 먹어야 한다.

한손에 배달통을 들었으므로 그는 다른 한손으로만 오토바이를 몬다. 이게 관건이다. 클러치 없는 시티 플러스는 그의 애마(愛馬), 등자를 매단 초원의 전사처럼 그는 좌우로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몬다. 철가방은 방패처럼 차갑게 빛나고, 그 안에는 서비스 군만두도 들었다. 초원의 전사들이 안장에 걸어둔 말린 고기 같다. 천고마비(天高馬肥)란 본래 높고 푸른 하늘과 풍요로운 시절을 찬탄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장성 안쪽 사람들의 두려움이 배어 있는 말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쪘으니 오랑캐가 쳐들어오겠구나.

바야흐로 가을이다. 지난여름의 무더위는 자취를 감추고 푸른 하늘 아래 싱싱한 오토바이들이 출몰할 시즌이다. 이런 날, 불친절한 중국집으로 주문을 넣어보는 건 어떤가. 장성 저편에서 군만두를 주렁주렁 단, 오랑캐 닮은 젊은이를 기다리는 건 어떤가. 방금 출발했어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당신은 출발선 앞에 선다. 어떤 짜릿함 앞에 선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용례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최민식)의 이름은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는 뜻. 그런 그가 영문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군만두만 먹으며 지낸다. 그는 얼마나 저 소리를 듣고 싶었을까? 그 지긋지긋한 감옥에서 원치 않는 서비스를 받으며 희망도 없이 살면서, 그는 방금 출발하기를 얼마나 바랐을까?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