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는 단단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정한 패턴으로 변주되는 그 구조들은 공간, 주체, 재현에 관한 문제를 던진다. 이번 신작 <자유의 언덕>은 덧붙여 시간을 섞어놓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연대기 순으로는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 모리(가세 료)는 과거에 결혼하려고 했던 권(서영화)을 찾기 위해 한국에 다시 왔다. 그때 권은 집을 떠나 요양을 가고 없다. 모리는 그녀에게 편지를 남겼고 몸 상태가 나아진 권은 이전에 일했던 학원에 가서 모리의 편지를 전해받는다. 권이 처음 편지를 펼쳐 읽다가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편지 순서는 뒤죽박죽 섞인다. 권은 그 상태로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모리가 편지에 쓴 북촌에서의 행적들, 그것들이 뒤섞인 형태의 일상기록은 모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의 회상처럼 화면에서 재현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연대기 순으로 펼쳐지지 않으므로 그에 대해 관객이 괘념치 않아도 된다는 것은 권이 떨어트린 편지들이 뒤섞일 때부터 이미 예견된 바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전개는 많이 이상하다. 모리의 편지에 적힌 내용을 화면에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전도된 시간 순이라 해도 여하튼 모리의 기억에 의존해 재현한 것이어야 한다. 영화는 간혹 모리의 기억에서 벗어난 범주의 상황이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중 하나의 예를 들면, 모리가 자신이 묵는 게스트하우스 근처에서 중고 옷가게에 있는 남희(정은채)와 살짝 시차를 두고 교차하는 장면이다. 모리는 옷가게 안의 남희를 한참 쳐다보다 지나가고 곧이어 남희가 옷가게에서 나와 화면 저편으로 걸어간다. 이때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모리는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으며 멀어져가는 남희를 한참 바라본다. 이 장면은 모리의 편지에 굳이 언급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모리가 이런 사소한 상황을 편지에 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장면 전에 관객인 우리는 이미 남희를 두번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게스트하우스 여주인의 조카이자 식객인 상원(김의성)이 오지랖 넓게 살가운 말을 걸자 필요 이상으로 과잉반응을 하며 짜증을 낸다.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모리가 옆방에서 말리려고 나오자 상원은 자초지종을 묻는 모리에게 두어 차례 그녀가 ‘bitch’라고 욕을 한다. 관객 입장에선 어리둥절할 수 없는 이 느닷없는 싸움에서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먹은 남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큰 소리로 서럽게 운다. 다음 장면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오고 정원에서 소일하던 모리 앞에서 그 남자는 남희를 부르며, 남희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간다. 남자는 남희의 아버지였다. 곧이어 모리 앞에 나타난 삼십대로 보이는 남자는 남희의 행적을, 특히 남희를 데려간 남자의 정체를 모리에게 꼬치꼬치 캐묻는다. 한국말을 모르는 모리는 남희를 데려간 남자가 남희의 아버지였을 거라고 정확한 추정을 내린다. 모리와 삼십대 남자는 가벼운 대화를 영어로 주고 받으며 그 남자는 자신에게 늙어 보인다고 말한 모리에게 불쾌한 기색을 비치면서 그 자리를 떠난다. 이 장면들은 별다른 사건이 없는 이 영화에서, 게다가 상영시간도 66분에 불과한 이 영화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끼어든다.
앞서 거론한 장면들 외에 모리가 겪는 사건들은 카페 여주인 영선(문소리)의 개 꾸미를 찾아준 것과 그걸 계기로 술자리와 몇 차례의 만남을 이어간 끝에 동침한 것과 상원이나 상원의 외국인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것, 그리고 몇 차례 옛 연인 권의 빈집을 찾아간 것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곧잘 그렇듯이 모리는 그가 이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술을 마실 뿐이며 일상의 상당 부분을 자고 있다. 심지어 오후 4시가 넘어서도 자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어떤 사정으로 가출 비슷한 것을 한 남희가 자신의 소재지를 찾은 아버지를 순순히 따라 나가는 것은 아마도 남자 문제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모리와 주변 남자들은 그렇게 상상한다. 이는 국적이 다른 옛 연인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 모리의 상황을 거울처럼 비춘다. 낯선 사람이 섣불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경기 비슷한 반응을 일으키는 남희처럼, 모리도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영선의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 광현(이민우)으로부터 이런저런 하마평을 듣자 모리는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그렇게밖에 행동하지 못한 자신을 비겁하다고 자책한다.
게스트하우스 여주인 구옥(윤여정)과의 첫 만남에서 모리는 정직하지 못한 한국 사람들을 힐난하며 그들과 싸웠다고 말한다. 영화 속 전개 과정에서도 자세한 것은 생략돼 있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모리는 어떤 이유로 누군가와 싸워 얼굴에 상처를 달고 있다. 그는 ‘시간’이란 제목의 책을 읽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관념의 틀을 부정한다고 영선과의 술자리에서 말한다. 그는 시간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규정짓는 것에도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는 생각하는 주체로서 사람이나 사물, 현상을 하나의 틀로 규정짓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는 홍상수 영화의 주 테마이며 당연히 예상할 수 있듯이 모리 자신조차도 자신이 지향하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것의 간극과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앞서 거론한 남희의 해프닝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모리는 남희의 행방을 묻는 남자에게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나이든 유부남이라고 규정짓는 말을 했다가 그의 불쾌감을 산다. 이는 모리가 영선의 카페에서 광현으로부터 겪었던 불쾌한 상황의 뒤집힌 버전이다.
요컨대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인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모리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마시고 대화하면서 자신들을 둘러싼 상황에 잣대와 규정을 정해놓고 대응하지만 그래봤자 타인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의 허물은 모르는 존재들이다. 물론, 모리는 외형적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다. 그는 (윤여정이 연기하는) 게스트 하우스 여주인 구옥이 몇 차례 일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품성을 말할 때 쓰는 표현처럼 예의 바르고 겸손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잣대에 맞지 않으면 온순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곧잘 그 자리에서 항의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 오전 10시가 넘으면 아침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구옥의 영업원칙에 고분고분 순응했던 손님인 그는 조카 상원에게 늦은 아침을 주는 구옥에게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만히 보면 모리 역시 자주 다른 사람들을 품평한다. 그가 누군가를 품평하거나 어떤 상황에 대해 논평할 때 그는 우월한 판관의 입장에 스스로 선다. 그가 권을 찾아온 것도 그의 기준으로 권은 가장 좋고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남희가 중고 옷가게에서 모리를 쳐다보는 그 장면을 복기해보자. 연대기 순으로 보면 이 장면은 모리가 남희가 봉변을 당하는 상황을 보기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전 장면에서 모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상원을 처음 만났고 상원에게 구옥이 밥을 주자 모리는 구옥에게 항의한 후 같이 식사하자는 구옥의 제안을 거절한 채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온 참이었다. 중고 옷가게 앞에서 모리가 남희를 한참 바라보는 장면은 그가 아직 남희를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좀 이상하다. 모리는 이전에 남희를 어디선가 봤던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그녀가 권의 좀 더 젊은 시절 모습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남희가 너무 예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시간 연대기 순을 거슬러 임의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전개 순서에 따라 잠시나마 모리가 이전에 봤던 그녀를 다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잠깐 순서를 잊어버린 채 이 장면을 모리가 얼마 전 봉변을 당했던 그녀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장면으로 받아들였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게 시간상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는 걸 알고 이 장면이 굳이 삽입된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야 했다.
다소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갑자기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클라이맥스 장면의 혼란도 비슷한 감상을 준다. 모리의 편지를 읽던 권이 갑자기 쉽게 모리의 숙소를 찾아내고 모리는 권을 만나며 두 사람은 언덕길을 행복한 모습으로 걸어올라간다. 그때 화면에서는 ‘권과 일본으로 돌아가 아들 하나와 튼튼한 딸 하나를 낳고 잘 살았다’는 모리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이 장면이 주는 잠시 동안의 충격은 곧이어 그것이 모리의 한낮 백일몽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장면 전에 모리는 카페 여주인 영선과 두 번째 동침을 했고 애정과 우정을 교환했다. 모리는 영선이 만나던 남자의 성품에 관해 주제넘은 품평을 했다. 관객은 아슬아슬한 심정을 느낀다. 이게 어디까지 현실이고 환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데다 덩달아 모리의 성격에 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없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그 장면 다음에 우스꽝스럽게도 모리는 영선의 집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는 바람에 30여분간 갇혀 있다. 모리가 그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화장실 문 바깥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지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 영선의 모습과 속옷 차림으로 난감하게 변기에 앉아 있는 모리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장면이 전개되면 모리는 권과 만나고 일본으로 행복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관객의 관습적인 기대를 난폭하게 충족시키면서 서사를 강제적으로 틀어버리는 이 가짜 결말은 영화 속에 펼쳐진 내러티브의 허구적 속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허구의 이야기에서 관념과 행동의 주체로 행세했던 주인공의 실체를 잔인하게 무너뜨려버린다. 그것은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한낱 미몽의 주연일 뿐이다. 다음 장면에서 모리는 게스트하우스의 자기 방 앞 탁자에서 엎드린 채 자고 있으며 모리의 방문을 누군가 열면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보이는 영선이 황망한 모습으로 나온다.
여하튼 영화 속 사건을 조립하고 각자의 취향대로 질서를 세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그것은 또한 영화라는 예술을 대하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취하려는 관객의 강박이기도 하다. <자유의 언덕>은 지금까지의 홍상수 영화에 비해 이야기 규모가 가장 단출한 듯 보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시도한 어떤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간 영화이다. 이야기와 캐릭터의 질서를 세우려는 관객의 강박은 관객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지만 동시에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지탱하는 제도적 관행의 부분이기도 하다. 그 양자를 모두 비교적 표나지 않게 부수려는 홍상수의 시도는 외형적으로 예쁘고 귀엽고 신비스럽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늘 공손하고 정직하고 좋은 모습으로 살려는 모리의 꿈이었다. 이 영화에서 시간 연대기 순을 무너뜨린 재현 장치는 인물을 분열시킨다. 캐릭터의 복합성을 건져올리는 게 아니라 해체해버려서 재조립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편지의 시각적 서술이라는 재현의 리얼리즘을 꿈속의 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모리가 그의 외형적 이미지가 풍기는 모습만큼이나 실제로 매력적인 인간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꾸는 꿈이 비루할지라도 그걸 경멸할 수 없고 그가 겪는 곤경을 비웃는 게 아니라 순순히 그걸 인정하게 된다는 게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여전한 홍상수의 힘이다.
얼마 전 대중강좌를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홍상수의 영화에 관한 평단의 편애를 불평하는, 이전에 자주 들었던 질문을 또 들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홍상수 영화에 관한 평문을 다시 쓴 이유라면 이유다. 잘된 것 같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