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어이쿠! (쿨룩) (콜록) (쿨룩)
2014-10-30
글 : 김중혁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혜 (일러스트레이션)
<족구왕>을 보다가 대학에서 우유팩차기를 목격한 일을 떠올리며 웃어버리다

영화 <족구왕>에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몇 군데 있다. 혼자 ‘풉!’ 하고 웃었는데, 과연 웃긴 장면인지는 잘 모르겠다. 텔레비전으로 다운받아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확인할 길이 없었고,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게 이런 걸 확인하는 맛이지!) 감독이 코미디를 작정하고 넣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첫 번째 장면은 ‘가위바위보 뺨 때리기’ 장면이다. 여주인공 안나는 주인공 만섭에게 가위바위보 게임을 제안하고, 자신이 이기자마자 만섭의 뺨을 후려친다. 얼마 전 유행했다는 ‘가위바위보 뺨 때리기 게임’인데 급작스러운 장면이기도 하고, 뺨 때리기의 강도가 워낙 세서 ‘이건 뭐지’ 싶었다. 몇 차례 뺨을 때린 안나는 “나 졸라 나쁜 년이니까 좋아하지 마”라는 대사를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떠난다. 혼자 남은 만섭이 갑자기 재채기를 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웃겨서,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감독의 연출이었을까, 아니면 배우의 애드리브였을까.

재채기란 과연 무엇인가. 재채기란 ‘비점막의 자극으로 인해 일어나는 경련성 반사운동의 하나로, 주위 환경의 급격한 온도 변화나 물리적, 화학적 충격을 감지한 비점막이 문제요소를 제거하려고 강하게 반응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갑자기 뺨을 맞은 만섭의 몸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비점막을 통해 재채기를 내뱉게 한 것이다.

두 번째로 웃겼던 장면은 만섭이 우유팩차기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걸 보고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우선 우유팩차기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 장면에서 웃을 수 없다. 우유팩차기의 도구를 제작할 때는 주로 ‘서울우유 커피맛’을 이용한다든지 “팩차기는 족구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 아주 좋아요. 공에 대한 집중력과 공이 발에 딱 닿았을 때의 감각을 미리 느끼게 만들어주고요” 같은 대사는 웃음기가 전혀 없다. 설명문에 가깝다. 우유팩차기를 한번도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 그래서?’라고 다음 대사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팩차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웃게 된다. 웃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진지했던 장면을,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이없게도 촌스러웠던 장면을, 주인공이 진지하게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40살 이상의 남자들이라면,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해본 학생이라면, 저런 설명을 누군가에게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스무살 무렵 서울의 한 대학교에 놀러갔을 때, 우유팩차기의 스펙터클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즈음 나는 친구와 함께 ‘서울의 대학 중에서 제일 싸고 맛있고 양이 많은 구내식당은 어디인가?’를 조사하고 다녔는데, (그런 걸 왜 조사하고 다녔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배는 고프니까) 모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은 뒤 담배나 한대 피우며 품평을 하자고 도서관으로 향했는데, 도서관 앞에서 수많은 우유팩 폐인들이 미친 듯 팩차기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몇명쯤 되었을까. 내 기억으로는 50명이 넘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100명이 넘었는지도 모른다. 운동이 부족한 학생들이 밥 먹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팩차기였고, 학교에서 가장 큰 공터가 도서관 앞이다보니 거기에 폐인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때는 그 풍경이 장관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짠하기만 하다. <족구왕>을 보면서 그 풍경이 되살아났다.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와 군대에서 족구한 얘기와 대학에서 우유팩차기했던 얘기는 절대 길게 하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만, 주제가 <족구왕>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영화에서 우유팩차기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부족한 점이 몇 군데 눈에 띄어 보충 설명해주고 싶어졌다.

우유팩차기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정육면체 우유팩을 만들기 위해 윗부분을 접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제대로 눌러주지 않으면 놀이 도중에 접힌 윗부분이 되살아나 정확한 차기를 방해할 수도 있다. 정육면체의 우유팩을 만든 다음 모서리에 구멍을 내고 살짝 바람을 불어넣어주면 더 팽팽한 팩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팁이다. 마지막으로 지역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새 우유팩보다 중고 우유팩을 더 선호했다. 새 우유팩은 모서리가 너무 날카로워서 초보자들이 다루기 까다롭다(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유팩차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새 우유팩을 이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새 우유팩을 적당히 다뤄주고 나면 우유팩의 모서리가 뭉툭해진다. 정육면체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둥글둥글해지고 나면 우유팩은 우유볼로 변신한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패스 연습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둥그렇게 모여서 우유팩을 하염없이 주고받았다. 날카로운 청춘의 모서리가 천천히 닳고 있다는 느낌으로, 속이 텅 빈 채 누군가에게 얻어맞는다는 기분으로, 하염없이 팩을 주고받았다.

영화 <족구왕>의 장르가 코미디나 로맨스로 분류되어 있지만 나는 SF로 보았다. <족구왕>은 족구가 사라진 근미래의 이야기이며,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날아온 주인공이 족구를 탄압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며 토익과 공무원시험에 세뇌당해 있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내용이다(내가 말해놓고도 설마 이런 내용이었나 싶긴 하다). <족구왕>에서 자주 인용되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아, 추억의 영화다, 친구들에게 ‘침 튀기기 위해’ 얼마나 이 영화 제목을 자주 읊조렸던가, 특히 ‘백 투 더 퓨처 투’는!)와 마찬가지로 <족구왕>의 정서는 향수로 가득 차 있다. 우린 무엇인가 잃어버렸으며, 무엇을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이상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영화는 내내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족구왕>은 주위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무엇인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재채기 같은 영화인 셈이다.

<족구왕>에는 웃기는 장면이 많다. 여러 번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웃을 만한 대목에서도 웃었고, 저 두 장면에서도 나는 웃었다. 저 두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었을 수도 있다. <내 몸의 신비>를 쓴 앙드레 지오르당에 의하면 ‘웃는다는 것은 생명의 방어기제’이다. ‘불합리하고 예상외이고 공격적이며 교란시키는 현실과 기대치(혹은 습관) 사이의 불일치를 보상하는 것’이다. 웃음도 재채기의 일종일 것이다. 어쩌면 <족구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웃음은 족구처럼 쉽게 전염된다. 내가 웃으면 네가 웃고, 우리가 웃으면 그가 웃는다. ‘웃어라, 모두가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우는 뒷부분은 생략).’ 우리는 과연 웃음을 전염시켜 ‘주위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곧 족구와 우유팩차기를 금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미 그런 시대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족구하지 마’(빨리 읽으면 곤란)라는 명령이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뺨을 맞아도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수 있나. 우리가 얼마나 잘 웃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잘 웃겨주는 사람들인데….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지만, 그 어설픔마저도 뭔가 고도의 전략처럼 느껴지는, 유희 정신으로 가득한 <족구왕>의 웃음을 지지한다. 누군가 족구와 우유팩차기를 금지시키면 다 함께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쳐들고 이렇게 외쳐보자. <족구왕>!(이번에는 빨리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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