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과 간호사>로 멋진 메이저 상업영화 데뷔를 꿈꾸는 한 에로비디오 감독이 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프로덕션 대표는 어차피 영화화가 힘들어 보이니 시나리오라도 팔라고 유혹하고, 유학파 감독을 더 선호하는 투자배급사는 그의 오랜 경력을 하찮게 생각한다. 심지어 옛 학교 선배는 그의 시나리오를 갈취해 멋지게 입봉한 상태. 그렇게 메인스트림과 인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생계를 위해 일단 에로비디오 시장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레드카펫>의 에로비디오 감독 정우의 이야기는 실제 박범수 감독의 삶에서 왔다. ‘재미’와 ‘진정성’ 사이에서 행복한 결합을 꿈꾼 박범수 감독을 만나, 에로비디오 시장의 황제에서 상업영화 시장의 새내기 감독이 되기까지 그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공공의 젖>과 <해준대>, 그리고 <타이탕닉>과 <싸보이지만 괜찮아>. <레드카펫>에는 극장가의 ‘천만영화’와 작가영화를 가리지 않는 과감한 패러디 작명법의 에로비디오 제목들이 배꼽을 잡게 만든다. 실제 있는 영화들일까 싶지만, 모두 박범수 감독의 과거 작품들이다. 영화에서 스탭들이 촬영하는, 탐정 왕성기(안재홍)가 현장조사 도중 핀셋으로 실제 여자의 음모를 발견하고는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이건 음모야!”라고 ‘당연한’ 얘기를 하는 <에로탐정 왕성기>까지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그러다 보니 인터뷰 도중 <박하사랑>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발기해서 생긴 일> <반지하의 제왕> <목표는 형부다> <헨젤과 그랬대> <살흰애 추억> <살위 댄스> <굵은 악마> <넣는 내 운명> 같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패러디 제목 비디오들이 덩달아 불려나온다. 그래서 <레드카펫>은 묘하게 복고영화 같은 향기가 풍기기도 한다. 영화 속 에로배우 오디션이나 에로비디오 촬영장에 등장하는 실제 에로비디오 배우들을 보면서 반가워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처럼 캐치온 등 누구나 새벽에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한번쯤은 봤을, 이제는 포털 사이트에서도 ‘청소년에게 적합하지 않은 검색 결과를 제외하였습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성인인증 로그인을 해야 검색이 가능한 그 영화들을 연출한 주인공이 바로, <레드카펫>으로 충무로 상업영화 신고식을 치른 박범수 감독이다.
지난 10년간 에로비디오 시나리오를 쓴 건 270편 정도 되고, 연출해서 심의를 통과한 작품은 무려 250여편에 이른다. 봉만대 감독이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을 통해 에로비디오 업계를 떠난 이후, 그야말로 업계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얘기가 틀린 말이 아니다. 봉만대 감독도 “작품 편수로만 보면 나에게도 대선배”라고 했다. 영화에서 조감독 진환(오정세)의 입을 빌려 축구 전술에 빗대 묘사되는 것처럼 ‘배우 4명, 스탭 4명, 촬영 이틀’이라는 ‘4-4-2’ 전술로 그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쌓은 것. 하지만 “그나마 촬영이 이틀이면 블록버스터급”이라며 ‘4-2-3-1’ 전술도 있다고 했다. 바로 ‘배우 넷에 스탭 두명, 옷 세벌, 하루 촬영’의 기막힌 시스템이다. “부산에서 <레드카펫> 촬영할 때 며칠 동안 모텔에서 묵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모였을 때 스탭들이 한목소리로 ‘어제 방에서 감독님 영화 봤어요!’ 그러는 거다. 모텔 같은 데서 심야시간에 주야장천 틀어주니까 안 볼 수가 없다. (웃음) 전에는 또 한 친구가 ‘어제 케이블TV에서 되게 이상하고 신기한 에로영화를 하나 봤어요’ 그러면서 줄거리를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에 그 여자가 죽지?’ 그랬더니 ‘맞아요, 감독님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더라. 그래서 ‘그거 내가 만든 영화야’ 그랬다. (웃음) 그럴 때마다 어린 나이에 참 많이도 찍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전혀 다른 영화를 하고 있는 현재의 기분이 참 묘하게 엇갈렸다.”
인기 야설 작가에서 감독이 되기까지
박범수 감독은 유명 인기 개그맨들을 수없이 배출한 동아방송대 방송연예과 출신이다. <레드카펫> 속 에로비디오 감독 정우(윤계상)처럼 실제 학회장 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일찌감치 에로비디오 업계로 들어서게 된 것은 자타공인 ‘글솜씨’ 때문이었다. “당장 실전에 투입되는 연예인들을 많이 배출하는 학교인 만큼 잡다하게 많이 배웠다. 수업시간에 메이크업이나 모델 워킹은 물론 개인기로 써먹을 수 있는 동전 마술도 배웠으니까. (웃음)” 그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수업은 ‘개그창작’이었다. KBS 개그 작가 출신의 신상훈 교수가 과제물을 훑어보던 중 그의 글솜씨를 알아보고는 ‘작가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잘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게 쓰는 데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고 느낀 그는 작가의 꿈을 품게 된다. 의외로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2000년대 초에는 누드 사진이나 야한 동영상이 중심이 된 모바일 콘텐츠가 막대한 수익을 내던 때였는데, 한 모바일 콘텐츠 업체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들어가게 된 것. 불과 23살이었던 그가 입사와 동시에 얻은 직함은 무려 ‘과장’이었다. 그날부터 사무실에 혼자 앉아 ‘야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가 쓴 글은 인기가 많았다. 회사는 쑥쑥 성장했고 그가 쓴 야설 대본은 영상으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직접 만들어보고픈 욕심이 생겼다. “연세 있는 왕년의 ‘감독’이라는 분이 오셔서 영상을 만드셨는데, 내 대본에 있는 유머 코드를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더라. 내 의도를 잘 살려내시지 못한다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해서, 그 감독님이 버린 내 이야기를 모아 직접 스탭을 꾸려서 찍어보고 싶다고 사장님에게 얘기했다.” 그렇게 옛 학교 선후배들을 모아 직접 촬영했다. 하지만 멋지게 데뷔 혹은 완성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결과물을 보니, 조명도 나가고 편집의 앞뒤가 맞지 않는 형편없는 작품이었다. ‘무조건 대본대로 찍는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연출은 전혀 다른 영역이구나’ 하고 깊이 반성한 그는 뒤늦게 학원과 센터를 찾아다니며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최신 정보와 리뷰를 얻기 위해 <씨네21> 정기구독도 시작했다. “한겨레영화제작학교와 미디액트, 그리고 심산스쿨까지 들을 수 있는 강좌란 강좌는 다 찾아들었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각종 수업과 서적으로 만회하려 했다. 특히 <시나리오의 이해> 등 ‘시나리오’라는 글자가 들어간 책은 무조건 다 사들였다. (웃음) 막무가내식의 그 과정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만들건 제대로 된 ‘감독’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그런 영화제 초청을 기다리며
뒤늦은 공부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른바 ‘충무로 메이저 시장’으로 진출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에로비디오를 만들었다. 직접 쓴 시나리오 <사관과 간호사>로 멋지게 데뷔하리라는 꿈을 품은 영화 속 정우의 모습에 바로 그의 과거가 투영돼 있다. 어쨌거나 열심히 찍었다. 미장센이나 앵글 등 겉멋도 부려보고 유모차에 카메라를 실어 이동숏도 찍었다. 그렇게 업계에 몸담은 지 5년 정도 되자, 그는 음지의 제왕이 돼 있었다. 에로비디오 업계에서 ‘클릭’과 ‘유호’라는 추억의 쌍두마차가 저물고, 잠깐의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21세기 시네마’와 ‘초록미디어’와 ‘미공개’라는 3강 체제로 재편될 때 그는 미공개의 ‘간판’이었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4-4-2’로 묘사되는 이전보다 더욱 열악한 저예산으로 일해야 했다. 인력난 때문에 직원 면접도 영화에서 묘사되는 그대로다. “누가 스윙 댄스를 할 줄 안다고 하면 무조건 합격이다. ‘그냥 취미인데요?’라고 해도 ‘그래서 합격입니다’ 그러는 거다. (웃음) 누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발레 파킹을 했다고 하면 그것도 합격이다. 당시 내가 운전까지 같이 하는 게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만큼 사람 구하기가 힘들었다. 촬영장소 섭외도 마찬가지다. 친구 집이 목욕탕을 하는데 언제 쉰다고 하면, 10만원을 쥐어주고 쉬는 날 들어가 촬영했다. <레드카펫>에도 나오는 것처럼 <타이탕닉>을 그렇게 찍었다. (웃음) 아는 친구 집 미용실이 언제 쉰다고 하면, 또 그날 들어가 촬영했다. 그렇게 되면 주인공의 직업도 미용사로 바뀌는 거다. (웃음)”
그처럼 열악한 조건에서도 승승장구했지만, ‘다른’ 영화를 하고 싶다는 갈증은 계속됐다. 그래서 이건주 주연의 단편영화 <쟤 믿는 영화>(2007)를 만들었고 <소원을 말해봐>(2010), <마스크맨>(2010) 같은 TV용 영화도 만들었으며 봉만대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2012) 각색도 맡았다. 지금 시선으로 보자면 <레드카펫>과는 전혀 다른 감성의 영화들이다. 말하자면 그때도 여전히 ‘극장용 대중영화’가 아니라 ‘담당자의 취향’을 고려한 영화들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원을 말해봐>는 캐치온의 새로 온 담당자가 ‘일본 감금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해서 만든 영화다. (웃음) 타 회사의 다른 작품도 담당자가 주성치식 개그를 좋아한다고 하면 거기에 맞춰 찍었다. 방송국과 일하면서도 여전히 ‘내 영화’를 만들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된 것이다. 총제작비 200만∼300만원짜리 에로비디오를 찍다가 3천만원짜리 케이블TV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었다. 문제는 3천만원을 넘어 3억원, 30억원 영화를 할 수 있는 길이 요원해 보였다는 것이다. 영화에도 나오는 것처럼 내가 쓴 시나리오라도 유학파 감독에게 맡기려고 하고, 나 같은 ‘에로 비디오 출신’ 감독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한 영화사 대표의 말에 진짜 상처받았던 적이 있다. ‘충무로에서도 에로영화를 진짜 에로 출신들이 찍으면 싫어한다’고.”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는 존재론적 고민을 하게 된 때는 또 있었다. 에로비디오 업계에서 6, 7년차 정도 됐던 때 평소 좋아하던 미쟝센단편영화제에 함께 일하던 에로 배우들과 갔을 때였다. “또 다른 감독의 꿈을 꾸며 미쟝센단편영화제에 거의 해마다 갔던 것 같다. 내 작품을 출품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무대에 서보는 미래도 그려봤다. 내가 용산CGV에서 열리는 미쟝센에 간다니까 배우들도 재밌겠다며 함께 따라왔다. 그런데 그들이 로비에서 나를 계속 ‘감독님~’ 하고 부르니까 마침 담당 영화의 감독을 기다리던 자원봉사자 분이 ‘감독님 오셨어요?’ 그러는 거다. 배우들은 평소처럼 당연히 나를 감독으로 불렀을 뿐인데, 나는 그 자원봉사자 분에게 ‘감독 아닌데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이지만 초청받지 않은 감독이기에 감독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유난히 그날 일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나도 언젠가 그런 영화제에 초청받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 <레드카펫>이라는 제목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과거의 기억, 빛나는 자산
“이제 진짜 새 직장 알아보는 건 어떠니?” 다소 어처구니없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박범수 감독은 지난 추석 때 집에 갔을 때도 어머니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다. <레드카펫>의 에로비디오 감독 정우도 부모님으로부터 같은 얘기를 듣는다. 아들이 영화감독이라고는 하는데, 도통 아들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으니 어디 가서 ‘우리 아들 영화감독이야’라는 얘기를 할 수 없다. “네 영화는 왜 극장에 안 걸리냐?”는 의아함이 그리 이상한 것만도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명절 때 TV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해야 감독”이라 생각하신단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언제까지나 큰 힘이 되어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레드카펫>에서 정우가 꼭 자신의 상업영화 데뷔작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관과 간호사>가 바로 그 상징이다. 얼핏 또 다른 패러디 제목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그의 아버지가 군인, 어머니가 간호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정우가 <사관과 간호사>를 만든 것처럼, 이제 막 <레드카펫>으로 새로운 데뷔를 하게 된 박범수 감독도 현재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기억을 빛나는 자산으로 삼으려 한다. <사관과 간호사>에 영화 속 톱스타 은수(고준희)가 캐스팅되지만 남자주인공으로 원래 염두에 뒀던, <올드보이>를 패러디한 정우의 에로비디오에서 ‘장도리 베드신’을 구사한 석봉(손병욱)을 남자주인공으로 고집하는 데서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업계를 떠났다고는 하지만 난 예전의 기억이 전혀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를 만든 모든 것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번 촬영현장도 그랬다. 처음에는 윤계상, 오정세, 조달환, 찬성 같은 배우들이 나랑 늘 함께했던 에로 배우들과 섞여 있어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는데 나중에는 함께 셀카도 찍고 무릎 위에도 앉고 화기애애했다. (웃음) 그 에로 출신 배우들에게도 ‘오히려 너희가 더 프로다. 작품 편수도 더 많고, 이 영화도 훨씬 더 잘 이해할 거야. 절대 얼어 있지 마’라고 얘기해줬다. <레드카펫>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내 기분도 그렇다. (웃음)” 최근 들어 이처럼 ‘재미’와 ‘진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가 있나 싶다. 주목할 만한 재능의 신인감독이 여기 한명 더 추가됐다.
범인과 관계를 가졌나?
<에로탐정 왕성기> 등 박범수 감독이 말하는 옛 작품들
“<레드카펫>에서 영화 속 스탭들이 촬영하는 <에로탐정 왕성기>는 지금도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당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 빠진 나머지 ‘아무도 움직이지 마. 범인은 이 안에 있다!’라는 대사를 너무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제트처럼 언제나 헛다리를 짚는 왕성기 탐정은 취재방법도 요상하다. 용의자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를 묻고, ‘범인과 관계를 가졌나? 그럼 해봐’라며 실제 ‘관계’를 갖게 한다. 그런 장면들에서 그야말로 리얼한 정극 연기를 시켰다. 하루 촬영을 하더라도 보통 새벽까지 찍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에로탐정 왕성기>는 새벽 3시까지 촬영하며 엄청 공들인 영화다. (웃음) <돌라래돌라>는 인도 마법사가 나오는 SF영화였는데, 우연히 들었던 인도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다. 그외에 또 기억에 남는 작품들로는 <엇박자>와 <부끄러운 영화>가 있다. 언젠가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가 보게 되면 채널 고정해주시길.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