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소년’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세상이 해리 포터군을 잊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느니, ‘머글’스러운 근면성으로 다양한 작품과 인물에 투신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간의 부지런한 여정이 있었기에 <킬 유어 달링>의 1940년대 컬럼비아 대학의 풍경이 환기하는 호그와트의 추억은, 관객에게 실소 대신 감회 어린 미소를 자아낸다. 아이비리그풍으로 차려입고 뿔테 안경을 쓴 래드클리프, 고풍스런 기숙사, 도서관의 금서 구역에 잠입하기 위한 소동, 그리고 무엇보다 동성애와 문학적 이상이라는 마법으로 이루어진 비밀스런 세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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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보이후드>가 일으킨 선풍이 영화 자체의 특별함보다 제작 방식의 희소성에 기대고 있다는 불평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후드>가 ‘태도 점수’를 빼면 남는 게 없는 평이한 드라마라는 감상에는 동조하기 어렵다. 가령 메이슨(엘라 콜트레인) 역에 연령대가 다른 여러 명의 배우를 캐스팅해 통상의 방식으로 찍었다고 가정해도 <보이후드>는 여전히 한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어가는지를 그린 빼어나게 사려 깊은 영화일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극장 출구에서 <보이후드>에 감동하다가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닮은 배우들을 잘 모아서 캐스팅했대?”라고 동행에게 묻는 관객을 보기도 했다. 딱 하나. 앞서 세운 가정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면 <보이후드>가 아니라 딴 영화다. 12년 동안 배우와 제작진의 생에 닥치는 변화를 전면적으로 존중한 <보이후드>의 방법론은, 있으면 돋보이고 없어도 대세에는 지장 없는, 보태진 특수효과가 아니라 이 영화의 피와 살이고 골격이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의 딜레마가 말하듯 피를 내지 않고 살코기만 도려낼 도리는 없는 것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선택한 메소드가 곧 <보이후드>의 서사이고 캐릭터다. 달리 쓰고 찍고 편집했다면 이 영화는 지금처럼 “현재시제로 창조된 시대극”으로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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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유레카!”를 외치기 전에는 이 아이디어를 낸 영화인이 없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를 순서다. 물론, 있었다.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라고.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은 캐스팅의 동일성을 유지한 장기지속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보이후드>를 예비한 기획이다. 단, ‘비포’ 시리즈는 9년마다 한편씩 독립된 영화로 만들어지고 관객에게도 그렇게 수용됐다(1편에 해당하는 <비포 선라이즈>는 보통의 상업영화 공정으로 완성됐고, 이후 두편은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적극적 가담으로 <보이후드>와 비슷한 작법을 거쳤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20년에 걸쳐 장 피에르 레오의 성장을 따라가며 다섯편의 장•단편을 만든 ‘앙트완 드와넬’ 시리즈도 유사한 사례다. 7년마다 부쩍 성장한 인물들을 방문한 마이클 앱티드 감독의 <업>(Up) 시리즈도 있다. 단,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에브리데이>는 단일한 극영화이면서 총 5년간 같은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나이 들어가며 한 가족을 연기한 경우로 <보이후드>의 가까운 전례로 보인다. 단, <에브리데이>는 수감된 남자를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의 경험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중심으로 축조된 시나리오를 가진 영화다. 끝이 열린 시간의 흐름 자체가 이야깃거리인 <보이후드>와 다르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닮은꼴 영화’는 <보이후드>에도 두 차례 등장하는 소설 <해리 포터>의 영화판이다. 널리 지적된 대로 이 프랜차이즈의 진성 마법은, 열살 남짓한 배우들이 20대 초반이 될 때까지 동일한 캐릭터 안에서 한해 또 한해 성숙해가는 광경을 스크린에서 목격하도록 한 데에 있다. 예산과 장르의 천양지차는 차치하고 <해리 포터>와 <보이후드> 사이에 가로놓인 큰 골짜기는 젊은 배우들의 체험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엘라 콜트레인은 최종 편집본이 나올 때까지 필름에 기록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반면, 대니얼 래드클리프와 공연 배우들은 매번 완성된 영화를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한 극장에서 확인하고 온 세상의 반응을 받아든 다음 자의식을 거쳐 연기를 변화시켜갔다(그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실에서도 <해리 포터>의 배우들은 어쩔 도리 없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어린이”로 살았다. <보이후드> 외에 드문드문 약간의 연기를 하긴 했지만 엘라 콜트레인은 대체로, “그냥 소년”으로 살 수 있었다. 여름이면 나흘 정도 영화를 찍는. 여기까지 쓴 다음 나는 <해리 포터> 영화 8편에서 제일 일상적인 장면들을 추려 호그와트판 <보이후드>- 이를테면 <위저드후드>나 <비포 O.W.L.>(Before Ordinary Wizarding Level Examinations)라는 제목으로- 클립을 만들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우선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1>에서, 기약 없는 싸움에 지친 해리와 헤르미온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서로의 손을 잡고 잠시 춤을 추던 장면이 후보로 떠오른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뱀에 기겁하는 사촌을 통쾌하게 바라보던 어린 해리의 눈빛도. 그러나, 역시 무리다. <해리 포터>는 태생적으로 거의 모든 장면이 단기적, 장기적 인과관계에 봉사하는 복선 덩어리인 데다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원본이 ‘정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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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퀀스 사이의 봉제선도 긴가민가한 영화 <보이후드>에서 유독 툭 불거진다고 느낀 장면이 하나 있으니 히스패닉계 배관공과 관련된 일화다. 메이슨의 열다섯살 생일날 엄마(패트리샤 아퀘트)는 파이프를 보수하러 온 남자와 대화하다가 그가 매우 똑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야간대학 진학을 권유한다. 3년가량 시간이 흐른 다음 레스토랑에 간 메이슨 가족은 엄마의 조언대로 스스로를 교육해 안정 궤도에 오른 남자와 마주치고 감사 인사를 받는다. 나는 이 플롯의 작위성(“뭘 그렇게까지!”)보다, 일화로 끝낼 수도 있던 장면을 구태여 복선으로 완결시키면서까지 강조하도록 만든 충동에 자꾸 눈길이 간다.
링클레이터의 필모그래피에 꾸준히 등장하는 하나의 코드는 ‘교사’다. 링클레이터는 어떤 형태로든 타인에게 선생님의 역할을 하는 행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은 로큰롤의 스승이고 <버니>의 잭 블랙은 동네 주민들을 지도해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2008년작인 <한 이닝씩: 코치의 초상>(Inning by Inning: A Portrait of a Coach)은 야구 코치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본인도 가르치고 이끄는 일을 주저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는 1985년 직접 창립한 오스틴영화협회의 예술 디렉터로서 상업 배급망을 좀처럼 타지 못하는 영화들을 텍사스 지역에 소개하는 데에 힘쓰고 젊은 필름메이커들을 위한 영화 캠프도 주도하고 있다. <보이후드> 역시 메이슨에게 한수 가르쳐주려는 인물들로 북적인다. 동네 형, 아빠, 양아버지들, 의붓 외조부, 사진반 교사, 아르바이트하는 식당 매니저 등 줄을 세워야 할 지경이다. 치실을 쓰라는 잔소리부터 섣불리 예술가인 척하다가는 망한다는 냉정한 충고에 이르기까지, 어른들은 참 말이 많다. 세 아버지는 음악, 스포츠, 예술을 권장하는데 선택은 메이슨이 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청소년기를 규정하는 삶의 가장 강력한 인상일지도 모른다. 온 세상이 나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지긋지긋함.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함께 외치기에는 이제 제법 나이 든 나는, 한 인간이 열여덟살이 되기까지 게재되는 관심의 총량이 얼마나 막대한지 내심 감격하는 동시에 약 20년 전 <비포 선라이즈>에서 메이슨 아빠 제시(에단 호크)가 털어놓았던 불평을 추억한다. “내 인생에 타인이 왜 야심을 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처럼, 링클레이터 영화에서 교훈과 가르침이 무조건 환영받는 건 아니다. 작정한 가르침이 반면교사로 작용하는가 하면, 전혀 의식하지 않은 언행이 남의 인생에 중대한 영감을 주기도 한다. 링클레이터는 요컨대 개인이 접촉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흡수하고 그것에 저항하며 퍼스낼리티를 형성해가는 경로에 주목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인간은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걸까? 중년이 되어도 갈피를 못 잡는다고 입만 열면 한탄하다가도 어째서 내가 아는 진실을 모르는 듯 보이는 타인을 만나면 아는 바를 전수하지 못해 안달하는 걸까? 냉정한 답은 “잘난 척하고 싶어서”다. 착한 대답은? “그저 마음이 쓰여서”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후자의 현상에 오래전부터 매료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브하다고 콧방귀 뀔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세계관일 수 있다. <보이후드>의 후반에는 심리학 교수가 된 올리비아의 강의가 잠깐 나온다. 그녀는 맹수와 맞닥뜨린 어머니와 아기의 사례를 들어 자기보존 욕구보다 사랑이 인류의 생존력을 높인다는 가설을 설명한다. 내가 링클레이터 영화에 흔들리는 까닭도 숱한 영화에서 마주치는 손쉬운 센티멘털리즘(감독 자신도 믿지 않는)과는 구분되는 질긴 낙천성과 온기에 있다.
지난주 일기에 언급한 ‘진정성’에 이어 다시 사어(死語) 하나를 입에 올린다면, 링클레이터는 주체할 수 없는 휴머니스트다. 그의 영화에 자주 붙는 코멘트 중 하나는 진정 악의적인 삶의 순간을 그리는 돌파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과연 <보이후드>는 무탈하고 평온하다. 두어번의 폭력적 상황은 일어나지만 누가 죽거나 크게 다치는 트라우마적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는다. 메이슨과 사만다는 착한 남매다. 유년기 특유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일화도 없다. 소년은 잠자리 날개를 뜯어내는 아이가 아니라 죽은 새의 시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아이다. 두 양아버지는 시간과 더불어 망가지지만, 우리는 그들이 좋은 남자였던 시절을 기억한다. 전작을 봐도 무려 은행 강도를 다룬 <뉴튼 보이즈>에서조차 인물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버니>의 타이틀 롤 살인자는 통통하고 행복한 호인이다. 링클레이터에게 연민불가한 인물은 없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시간과 생활을 분리하지 않고 영화 속 캐릭터, 그리고 그들을 함께 창조한 배우들을 실제 자기 인생의 멤버로서 아낀다. 나의 짐작은 <버니>의 영향으로 일찍 출소한 실제 모델 버니 티드가 현재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집 차고 2층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확신으로 변했다. <가디언>과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감독과 함께 산다는 것이 버니 티드에게 내려진 보석의 조건 중 하나였다. 링클레이터는 예술가로서 공정성을 폄하당할 수 있는 결정을 흔쾌히 내렸다. 아니, 거기까지 짚을 것도 없이 살인혐의가 유죄로 입증된 인물을 가족과 동거하는 집에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링클레이터가 얼마나 자신이 만드는 영화와 본인의 삶 사이에 경계를 긋지 않는지 실감케 한다. 이 애교 넘치는 눈매의 후덕한 감독에게서, 영화를 신앙하는 사제의 면모를 읽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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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테렌스 맬릭과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만 갖는 개성은, 한편의 영화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관객의 삶을 직접적으로 만지고 변화시킨다는 아주 천진한 믿음이다. 맬릭은 안으로 독백하고 링클레이터는 밖으로 수다를 떤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유미주의가 방어하는 자리에 링클레이터의 박애주의가 있다. 나는 네 감독의 영화를 골고루 사랑한다. 그들은 모두, 오염되지 않은 소년의 시야를 필사적으로 수호하려 한다. 그런데 신이 그중 딱 한 감독의 영화 속으로 직접 입장할 기회를 주겠으니 고르라 한다면 내 선택은 아마 링클레이터일 것이다. 거기 포함되는 순간 내 삶이 더 복되고 나아질 거라는 잇속 궁리 때문이다. <슬래커>와 <멍하고 혼돈스러운>,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를 보며 내가 느낀 떨림의 일부는 분명, 저 따스하고 현명한 소우주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링클레이터가 나를 찍어준다면 ‘삶’이라는 한 음절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흩어지기만 하는 시간이, 총체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어지러운 난반사의 소용돌이가 멈추고, 내 인생이 타인의 삶과 어떻게 기대어 힘을 주고받으며 스스로를 조각해가고 있는지 해명되지 않을까? 타르코프스키가 쓴 대로다. 우리가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삶이 불완전해서다.
<보이후드>를 두 번째 보는 경험은 신비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다시 본 이래 이 정도로 질적으로 다른 재관람은 처음이었다. 첫 번째 관람이 목적지도 없는데 시종 집중하는 암중모색의 체험이었다면,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로 시작한 두 번째 관람은 통째로, 내 것도 아닌 인생을 친밀하게 회상하는 166분의 애틋한 플래시백이었다.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는 내 귓전에 다시 ‘비포’ 시리즈의 셀린느가 찾아와 속삭였다. “내 인생은 마치, 누군가의 기억인 것 같아.” 메이슨의 삶이 어쩌다 내 기억이 되었을까? 나는 어리둥절한 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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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최고로 쿨한 막대기
SF 팬이라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를, 역사에 취미가 있다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단것을 즐긴다면 시판되는 막대형 초콜릿을 떠올릴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우주탐사에 동행하는 드로이드 타스(TARS)와 케이스(CASE)의 디자인은 단순의 극치다. 얼굴과 수족이 파악되는 휴머노이드형 로봇의 상극이다. 평소 컴퓨터인 척 서 있다가 필요하면 ‘사지’(四肢)를 1:1:1:1, 1:2:1, 2:2로 나눠 직립보행부터 애크러배틱까지 척척 해내는 타스와 케이스의 고졸한 세련미는 <인터스텔라>의 스타일과 조화롭다. <아이언맨>의 자비스 못지않게 매끄러운 인간의 말투를 구사하는 이들은 지독히 진지한 이 영화에서 유머를 담당하기도 하지만, 결정적 순간이 오면 감정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법 없이, 정확히 로봇의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