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찾아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자이너 테조 레미의 <당신의 기억은 버릴 수 없어요>(1991). 버려진 서랍들을 모아 새로 틀을 끼우고 밴드로 묶어 서랍장을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수납가구의 덤은 쉽게 쓰고 버리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레미는 손에 남은 물건들로 낙원을 건설한 표류자 로빈슨 크루소에게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혹시 <박스트롤>의 제작진도 레미의 작품을 본 적이 있을까? 영화 속 ‘상자요정’ 종족 역시 인간들의 고물을 수집해 재활용하고 발명하는 친환경적 재간둥이들인 데다가 유사시에는 오작교 짓듯 서로의 몸을 쌓아올려 근사한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10/20
<나를 찾아줘>의 상영관 출구. “나쁜”,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가 웅성거림 속에서 불거져나온다. 그 말들은 어쩐지 에이미 던(로저먼드 파이크)에게 딱 들어맞지 않는 기분이다. 거기에는 에이미라는 캐릭터의 참담한 면모가 빠져 있다. 귀갓길에 에이미에게 그나마 적합하다고 떠올린 형용사는 “돌이킬 수 없는”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에이미는 무엇보다, 삶을 (방법은 어찌됐건) 돌이키려고 시도했다가 의지와 능력, 조건의 한계를 확인하고 제자리로 복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냥 하던 대로 살래, 라고 그녀는 결정한다. 자못 모양 빠지는 좌절스런 상황인데 당사자가 그것이 좌절임을 아주 단호하고도 잽싸게 남과 자신에게 부인한다는 점이 비극적이다(그리고 희극적이다). 물론 나는 에이미가 원래 구상한 대로 인생을 돌이키는 데에 실패했다고 애석한 건 아니다. 그녀가 설계한 대로 성사됐다면 한 남자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목으로 돌팔매질당하고 처형됐을 테니 천부당만부당하다. 다만 에이미라는 인물의 궤적이 내게 남긴 씁쓸함이 이 영화의 스릴이나 블랙유머보다 오래 머무르는 감정임을 기록해두고 싶다.
에이미에게는 ‘증세’가 있다. 남편 닉(벤 애플렉)도 가족사에서 비롯된 만만찮은 증세가 있지만 영화 속 닉은 상대적으로 어리둥절한 피해자 캐릭터로 중화돼 있으므로 나도 에이미에게 집중하기로 하자. 원작 소설에는 신혼여행지에서 에이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를 읽는 장면이 스쳐간다. 아내의 행방불명으로 시작되는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뒷날 에이미가 벌일 실종 자작극의 힌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에이미가 닮은 하루키 세계의 인물은 <댄스 댄스 댄스>의 나가사와나 <침묵>의 급우, <태엽 감는 새>의 와타야 노보루처럼 겉은 우월한데 속으로 망가진 사람들이다. 잘생기고 성취도가 높은 데다 처세도 훌륭한 그들은 나무랄 데 없는 인기인이지만, 자아의 중심이 비어 있다. 남들의 평판에 의존한 뒤틀린 에고가 건강한 자존감 대신 자리잡고 있다. 진정한 긍지가 결핍된 이 엘리트들은 동경과 사랑을 받는 한 관대하지만,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은 누군가가 무심코 진면목을 알아차리면 둘만 아는 방식으로 집요하게 징벌한다. 관객이 상대방 한명뿐이라도 누가 보스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에이미의 자아 한복판에는 부모가 쓴 동화 <어메이징 에이미>의 주인공이 들어앉아 있다. 동화 속 에이미는 현실의 에이미가 성취하지 못한 과제를 빠짐없이 완수한다. 에이미는 어메이징한 에이미를 미워하지만, 그 애를 내치고 무엇을 들여야 좋을지 모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허덕이며 픽션의 발뒤꿈치를 쫓아가고, 결국 거의 비슷하게 해낸다. 명문대를 졸업한 미모의 재원 에이미, 촉망받진 못해도 저널리즘 명함을 가진 에이미. 그러나 ‘거의’는 어디까지나 ‘거의’에 불과하다. 지근거리에 들어온 타인이 그 간극을 인식하고 미망에서 깨면 에이미는 ‘작가적 권력’을 행사해- 따돌리거나 누명을 씌워- 그를 악역으로 전락시키거나 보잘것없는 엑스트라로 만들어 퇴출한다. 이야기의 결함은 수정 가능하다. 에이미의 옛 애인은 당시의 각성을 회고한다. “그녀는 재미있는 것들을 인용할 수 있었지만 사실은 재미있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죠.” 남자는 결국 성폭행범으로 몰린다.
뭐 에이미라고 좋아서 한 일은 아닐 거다. 달리 해결책을 몰랐을 뿐. 그런데 중부 시골 출신의 색다른 남자 닉이 에이미에게 결혼이라는 솔깃한 탈출구를 열어 보인다. 그는 처음 만난 날 에이미에게 건넨 작업 멘트가 급소를 눌렀음을 미처 몰랐으리라. “난 당신을 이 모든 근사함으로부터 구해줄 남자예요.”(I’m the guy to save you. From all this awesomeness.) 그러나 둘은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므로 30년 넘게 끌고 다닌 각자의 문제 더미가 있다. 서서히 ‘결혼’이라는 참신한 스토리도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하자 남자는 대안적 현실을 모색한다. 작가에서 바 주인으로 전업하고 은밀한 애인도 만든다. 반면 현실보다 완벽한 서사에 의미를 두는 여자는, 새로운 일도 사랑도 찾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연재’를 갈아치우려 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2차로 시도하는 삶의 반전은 놀랍게도 본인의 죽음을 포함한다. 우선 시체가 있어야 남편에 대한 복수가 완결되니까. 복수가 왜 그토록 중요한가? 재산을 빼돌려 떠나서 잘 살면 안 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틀린 이야기는 반드시 수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이미의 말대로 “모두들 죽은 여자는 사랑한다”. 실제 에이미는 죽어도 ‘캐릭터’로서 영광을 누릴 것이고 에이미에게는 그 점이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그녀에게 현실은, 타자에게 진실로 알려진 사실보다 열위에 있다. “임신은 쉽다. 가짜 임신이 어렵지”라는 에이미의 중얼거림은 치밀한 트릭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자연발생적인 삶의 다반사는 시시하고 만만하게 여기고, 의지로 설계한 프로젝트를 진정한 삶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에이미에게 그리스 밀월을 제안한 옛 애인은 나름 센스만점이다. 에이미는 플라톤의 독실한 신봉자이고 남편에게 비탄을 주려고 자기의 아이를 살해한 메데이아니까.
10/21
에이미의 두 번째 인생 역전기도는 한동안 첫 번째 시도보다 유망해 보인다. 러닝타임 70분 시점에 일기장 속 목소리를 벗어나 현존을 드러낸 에이미는 난생처음 온전히 자유의지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로 빛난다. 현재진행형 보이스 오버 독백으로 갈아탄 에이미는 정크 푸드를 폭식하며 남자들이 씌운 ‘쿨 걸’의 굴레에 아직 매여 있는 세상 여자들을 조롱한다. ‘작가’ 에이미가 구상한, 이 완전한 복수와 해방의 여행은 그럴듯하게도 버지니아 울프 스타일의 자살로 완결되도록 예정돼 있다. 이와 같은 플랜A의 실행을 밀어붙였다면 에이미는 부도덕하고 미친 사람일지언정 최소한의 ‘문학적’ 품위는 보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위대한 작가’로서 그녀가 버티는 건 여기까지다. 1차 타협은 그녀가 자살을 취소하고 그냥 살아가는 플랜B로 전환할 때 이뤄진다. 에이미는 위대함을 잃지만 여전히 저작권을 쥔 ‘작가’이긴 하다. 그런데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이즈음 슬그머니 에이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사라진 목소리는 이후 영화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독백을 빼앗기고 여타 인물과 똑같이 화면 안에 존재하게 된 에이미는 부쩍 무방비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붕괴가 온다. 에이미는 트레일러촌에서 만난 뜨내기 남녀에게 굴욕적으로 얻어맞고 돈을 빼앗긴다. 경멸하던 사람들에게 볼품없이 당한 직후 분을 못 견딘 에이미가 지르는 괴성이야말로 <나를 찾아줘>의 진짜 반환점이다. 본인이 주연하는 이야기를 짓는 ‘작가’ 에이미는 이 비명과 더불어 사실상 쓰러진다. 머리채를 잡혀 스토리 밖으로 끌려나온 에이미는 비로소 자신이 캐릭터가 아니라 통증, 허기, 궁핍 따위에 성가시게 휘둘리는 인간임을 발견한다. 다음부터는 줄곧 구차한 내리막이다. 닉에게 에이미가 붙인 죄목은 솔메이트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에이미는 캐릭터를 벗어난 자기 안에 고유한 영혼이나 욕망이 없음을 눈치챈다(대놓고 인정하진 않는다). 영혼이 없는데 무슨 영혼의 짝이 있겠는가. 대체 나는 무엇을 버렸던가! TV에 나와 호소하는 닉을 보며 에이미는 이 사내가 부족하지만 그나마 그녀의 작가성을 이해하는 파트너라는 사실을 재고한다. 그리고 플랜C가 가동된다. 귀가 시나리오를 짜고 실천하는 에이미는 변함없이 자신이 존재미학을 구현하는 예술가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제3막의 그녀는 급격히 초라하고 평범해진다. 섹스 도중 경동맥을 베는 엽기성을 시전해도 아까까지의 독기와 광채는 살아나지 않는다. 에이미는 이제 여느 흔한 에로틱 스릴러 속 악녀들처럼 진부하다. ‘돌이키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금지한 숲으로 갔지만 초입에서 힘들고 무서워서 냉큼 집으로 돌아온 소녀 골디록스. 그녀는 아마 숲에는 거미줄 친 폐허밖에 없었다고 기억하며 현명했던 판단을 자축하며 여생을 살리라. 이것이 에이미의 궤적에서 내가 느끼는 참담함의 정체다.
이상하게도 나는, 억울한 고초를 겪고 불행한 결혼에 감금된 일방적 피해자 닉에게 동정심이 솟지 않는다. 솔직히 둘은 제법 잘 어울린다. <나를 찾아줘>에서 에이미는 (삶을 돌이키는 데에) 실패했지만 (그녀가 발의한 안이 부부의 정책으로 통과됐다는 점에서) 이겼다. 닉은 졌지만 어쨌거나 성공했다. 무슨 성공? 이 프로젝트는 에이미 것이었고 뒤미처 결정된 닉의 목표는 에이미가 판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린 애인과 새 출발하지 못했으니 실패한 게 아니냐는 반문은 사절한다. 연인에게 뭐라고 약속했건 에이미의 ‘거사’가 그를 기겁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닉이 독자적으로 결혼을 파기할 결단을 내렸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심지어 원작 소설은 필사의 게임을 치르는 동안 배우자가 자기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던 부부가 문득 감명받는 기이한 순간을 포착한다. 원작자 질리언 플린은, 둘의 관계를 재앙의 낭만성에 비유한다. 영화에 이르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부부의 공범적 속성이나 병적인 로맨틱함을 편의상 거의 지워버렸는데, 이 결핍을 보완하는 신의 한수가 있으니, 바로 벤 애플렉 특유의 어정쩡한 미소다. 영화 말미 여차저차해 도저히 에이미에게서 놓여나지 못한다고 고하는 닉의 얼굴은 미묘하게 안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0/22
<조디악>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데이비드 핀처는 시점(視點)이나 시점(時點)이 다른 복수의 이야기 토막을 완전 조립하지 않고 약간의 틈을 방치한 채 나열하는 연출의 고급 코스를 보여주었다. 두명의 인물에 집중한 <나를 찾아줘>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 이 결혼 스릴러 중 물리적으로 부부가 떨어져 있는 2/3시점까지는 일견 “그가 말하기를/ 그녀가 말하기를” 구조처럼 보이지만, 착시다. 실재하는 양 갈래 흐름은, 현재진행형 팩트로 제시되는- 보통 영화를 관람할 때 관객이 암묵적으로 공평무사한 객관으로 받아들이는- 시퀀스들과 에이미의 주관적 독백에 감싸인 일기 속 장면들이다. 한데 실종 수사가 진행되는 현장에 에이미가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전자가 닉의 주관적 시점으로 오인될 뿐이다. 인터뷰에서 핀처 감독은 이 구성을 두고, 소설의 “그가 말하기를/ 그녀가 말하기를” 구조를 과감히 버리고 관객이 (객관적 시퀀스를 독점한) 닉을 따라가도록 각색한 질리언 플린의 결단을 대중영화답다고 흡족해했다. 과연? 핀처는 여기서 일부러 말수를 줄이고 있다. 막판에 대다수 관객이 닉을 편들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2시간 반 동안 관객이 체험하는 실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70분 시점의 대반전이 도래하기까지 객석은 에이미가 멜로드라마틱하게 술회하는 과거가 이 결혼의 숨은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닉의 일거수일투족을 째려보는 ‘에이미파’와 지나치게 일일극적으로 전개되는 일기의 진위를 미심쩍어하는 ‘닉파’로 갈린다. ‘에이미파’는 영화 45분경 난데없이 닉의 불륜 상대가 등장하면 급격히 불어난다. 닉은 덜 말함으로써, 에이미는 불려 말함으로써, 신뢰하기 어려운 화자가 되는 형국이다. 그런데 1부에는 한발 늦게 발견됨으로써 파장을 더하는 밑밥이 깔려 있다. 보는 동안에는 객관적 플래시백으로 혼동하게끔 연출됐지만, 반전 이후 에이미가 쓴 스토리의 ‘재연’으로 판명되는 일기 시퀀스들이다. 뭐가 사실이고 어느 대목이 자작극이고 어디가 픽션이었을까? 허둥지둥 복기에 들어가며 관객은 ‘닉파’로 대통합을 이룬다. 닉은 적어도 줄곧 자리를 지켰는데 에이미는 진술의 좌표를 갈아탔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찾아줘>의 서사적 ‘틈’은 관객이 편안히 닉의 편이 되도록 무드를 조성하고, 반전의 쾌감을 주는 롤러코스터의 선로로 기능한다. 그러나 나는 핀처의 연출이, 끔찍하리만큼 친밀한 거리에 두 인간을 묶어두는 결혼의 이율배반을 그리는 목표에 기여했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된다. <조디악> <소셜 네트워크>에서 영화 서사의 불가피한 균열을 드러내는 데에- 그리하여 이야기 매체로서 갖는 영화의 독자성을 확인하는 데에- 쓰였던 핀처의 테크닉이 <나를 찾아줘>에서는 이야기의 균열을 감추는 트릭으로 사용됐다는 인상 때문이다.
좋아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다
중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주역인 <카트>에는 세 젊은이가 나온다. ‘더 마트’의 20대 계산원 미진(천우희)과, 주인공 선희(염정아)의 10대 아들 태영(도경수), 그리고 태영에게 다가가는 가난한 조손 가정 소녀 수경(지우)이다. 미진과 태영은 극중에서 제대로 만나지 않지만 비슷한 변모를 겪는다. 청춘이기에 “내겐 다른 미래가 있다”고 막연히 믿었던 이들은 점차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본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된다. 태영의 전환점은 편의점 사장에게 아르바이트 임금을 떼어먹힌 날이다. 분노한 수경이 점포 유리를 부수고, 파출소에 불려온 선희가 아들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소년은 “내가 그런 거 아니야”라고 바로잡는 대신 “억울해서 그랬어”라고 설명한다. 자기가 하지 않은 행위의 동기를 주체로서 설명하는 이 장면에서 태영은 첫째, 유리에 던져진 돌을 최소한의 정당한 항의로 떳떳이 여기고, 둘째, 돌을 던진 손을 남의 손으로 생각지 않으며, 셋째, 엄마의 이해를 확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