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구본창은 부친의 임종 앞에서 태산처럼 무거운 카메라를 들었다. 생명이 새어나가기 시작한 인간의 피부는 우리가 ‘껍질’이라 부르는 사물들의 표면처럼 두껍고 건조하다. 동시에 놀랍도록 단단해 보인다. 이물스럽지만, 이 역시 인간이 가진 얼굴이다.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숨>은 마치 영생이 가능한 양 동안(童顔)과 장수를 숭배하며,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에 반문을 던진다. <목숨>이 채록한 호스피스 병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한다. 육체의 무너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야, 영혼을 일으켜 앉혀 존엄한 죽음과 독대할 수 있다고.
11/01
<거인>의 영재(최우식)는 사랑스럽지 않은 소년이다. “결백한 피해자가 될 것인가, 가책을 짊어지고 득 보는 쪽을 택할 것인가?”의 갈등은 악착 같은 영재에게 고민거리조차 못 된다. 소년은 한뼘도 물러설 수 없다. 남의 사정따위 봐주다가는, 소년을 가출하게 만든 아버지(김수현)처럼 가망 없는 인생으로 굴러떨어질 터다. 그러나 영재가 캐릭터로서 정작 우리를 흔드는 힘은 “어른 같은 아이”라는 점이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아이”라는 점에서 나온다. 한심한 부모에게서 도망쳐 완전 신품(新品)의 삶을 도모하려고 애쓰지만, 영재의 객관적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사회경제적으로 무력한 미성년자다. 임시 보호자인 그룹 홈의 원장이 친부모의 집에 가서 자고 오라고 등을 민 날, 영재도 관객도 그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PC방에서 밤 10시까지 버티다 쫓겨난 영재는 잠시 거리를 배회하다가 골목 어귀에 서서 아버지 방의 불이 꺼지기만 기다린다. 손에는 가족과 마주했을 때 손님인 양 건넬 주스 세트가 들려 있다. 아무리 아버지를 경멸해도 영재는 외로운 아이일 뿐인 것이다. 여관에 투숙할 수도 없고 사정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도 없는 영재는 아버지에게 뭘 해주긴 바라지도 않으니 발목만 잡지 말아달라고 줄곧 호소한다. 확실히 소년은 가족과 상관없이 살길 소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픈 엄마가 동생까지 시설에 위탁하려는 눈치를 보이자 영재는 버럭 반발한다. “그러고 나면 엄마랑 아빠 금방 이혼할 거 아냐? 무슨 일 생기면, 나랑 민재는 어디로 돌아가?” 이 모순이 <거인>의 제일 깊은 서러움이다. 영재는 가족을 그토록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최후의 보루로서 부모의 집이 사라진다는 상상 앞에서는 몸이 떨려온다. 이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을 원하지만, 아직 스스로 그것을 만들 수는 없는 시기. 돈과 법적인 자결권을 손에 쥘 수 있는 성년이 도래할 때까지 영재는 근근이 살아남아야 한다. 미성년의 요점은 권리가 유예되는 대신 보호를 받는다는 것인데, 보호받지 못하고 권리만 유예된 아이는 그저 무방비하다. 영재는 결코 큰 사람이 아니다. 영화 제목의 ‘거’(巨)자는 “과하게 큰”으로 읽힌다. 우리가 지켜 보는 것은, 온몸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고 있는 웃자란 아이다.
11/02
몇해 전부터 여행을 가거나 누군가와 특별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거나 마지막에서 두 번째일지도 몰라. 인생은 제법 길어서 ‘처음’은 여남은개의 ‘다음’을 거느리고 있을 성싶지만, 실제로 특정한 경험의 ‘다음’은 두세번이 고작이다. ‘잠깐 멈춤’(pause)은 설정된 시간이 지나면 ‘정지’(stop) 모드로 넘어간다. 매번 잘 헤어지는 일이 긴요한 이유다. <거인>이 남기는 허함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돌아보다가,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않고 헤어지는 장면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보호시설의 룸메이트가 홀연히 떠나는 이른 새벽 영재는 알고도 자는 척한다. 시골 이모네에 머무는 아픈 엄마를 찾아가는 길의 영재는 동생과 함께이지만, 돌아오는 이튿날에는 혼자 훌쩍 나선다. 친절한 도움을 준 누나의 집을 떠날 때도, 동생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할 때도 영재는 고맙다거나 지금부터 어디로 갈 거라고 밝히지 못한다. 왜일까? 적절한 ‘맺음말’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제 나눈 대화,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무슨 의미였는지 정리할 수 없는 소년들에게는 어떤 작별 인사도 어색하다. 그들은 상대에게 토라졌거나 미안하다. 무엇이 고마운지 차마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남자아이들은 자리를 피하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겨울 새벽의 찬 어둠 속에서 “난 역시 혼자”임을 확인하며 잠시나마 기대를 품었던 순진한 자신을 책망한다.
11/03
<인터스텔라>에는 웜홀과 블랙홀뿐 아니라 플롯의 작은 구멍도 많다. 이를테면 현생 인류의 생존이 다급하다면 이웃 은하계로 무작정 우주선을 발진시키는 것보다, 지구를 ‘고쳐’ 쓰거나 농업을 살리는 데에 투자하는 편이 성공률이 높지 않을까? 식량이 그토록 귀하다면서 쿠퍼(매튜 매커너헤이)는 어쩌자고 자꾸 옥수수밭 가운데로 트럭을 모는 걸까? 만약 쿠퍼가 찾아가지 않았다면, NASA는 정녕 전문 파일럿 한명 없이 나사로 작전을 강행할 참이었을까? 방금까지도 지구로 귀환해 가족과 종말을 맞길 원했던 쿠퍼가 대승적 희생을 결단하게 된 심리적 전환점은 어디인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야기에 무관심한 작가/감독이긴커녕 반대에 가깝다. 단,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서사는 ‘세계의 설계도’로서의 이야기이지, 캐릭터의 심리와 행동을 인과로 맺어주는 드라마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경향은 장편 9편 가운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동생 조너선 놀란과 오리지널 스토리 및 각본을 쓴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에서 두드러진다. <메멘토>와 <인셉션>의 시나리오가 인간의 기억과 꿈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중층적 이면을 도해(圖解)했다면 <인터스텔라>는 훌쩍 외계로 시점을 띄워 올려 우주 전체의 조감도를 제시하려 한다. 놀란의 영화가 ‘골치 아프다’는 커다란 상업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이 가능한 규모의 흥행을 지속하는 까닭은, 이 세계가 복잡한 심층을 감추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대중에게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라면 삶이 너무 시시하지 않은가?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다”고 속삭이는 영화는 차고 넘친다. 그들 사이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를 차별화시키는 중요한 속성은 (감독 본인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모호함을 모호하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모호함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원칙이다. 놀란은 복잡성을 암시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복잡한지까지 관객에게 똑똑히 전달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인지과학과 천체물리학 논쟁에 뛰어들 의향까진 없어도, 적어도 영화가 선택한 개연성의 레벨 안에서는 정합성을 지키기 위해 전문가의 감수를 감수(甘受)한다. 여기에는 동전의 이면이 있으니 등장인물이 개념을 운반하는 그릇으로 축소되는 병폐다. 구조의 설명에 주력하다보니 각주성 대사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증세가 심한 예가 ‘지상 1층-지하 4층’의 구조를 가진 <인셉션>인데, 관객이 궁금할 즈음에 “림보가 뭔데?”, “이러저러한 거다”, “맙소사. 그러니까 여차저차하다는 거야?” 식의 대화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끄는 팀원들 사이에 오가기 일쑤다. <인터스텔라>도 예외는 아니다. 발사 전 기지에서 하고도 남았을 웜홀의 원리에 관한 ‘일러두기’식 토크가 태양계를 반쯤 건너갈 무렵 인듀어런스호 승무원들 사이에 펼쳐진다. <인터스텔라>의 주제와 직결되는 아멜리아 브랜드 박사(앤 해서웨이)의 사랑의 힘에 관한 긴 대사도 그 자체로는 설득력이 충분하지만, 해당 장면까지 아멜리아의 인물 묘사가 축적됐다면 훨씬 강력했을 터다. <배트맨 비긴즈> 이후 놀란 영화가 매력과 재능이 검증된 배우들을 다수 캐스팅하면서도, 막상 작품을 통해 그들에게 연기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안겨주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해 보인다. 그들은 모두 제 몫을 훌륭히 해내지만 앙상블로서도 개별 캐릭터로서도 오랜 잔상을 남기지 못한다. 두드러진 유일한 예외가 히스 레저의 조커인데, 그는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들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목표-구조와 질서-의 대척점인 ‘카오스’의 아이콘이라는 점이 공교롭고 의미심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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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의 시야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젊은 스티븐 호킹(에디 레드메인)은 커피에 풀리는 크림의 소용돌이에서 우주가 시작된 한점을 본다. 루게릭병은 이미 특별했던 청년의 시야를 남다르게 만든 두 번째 원인이다. 제임스 마시 감독은 움직임이 제한된 주인공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다수의 주관적 시점숏을 썼다. 병을 통보받은 순간 호킹의 눈에 비친 세계는 어항 속에서 내다본 바깥처럼 먹먹하고, 혼자 벗지 못하는 스웨터 올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은 폭발하는 별의 형상으로 변한다. 계단 위의 어린 아들에게 닿을 수 없는 아버지는 한참을 올려다보기만 한다. 이 화면들은, 움직임이 중요한 보통의 주관적 시점숏들과 달리 초점 거리와 지속 시간을 통해 정적으로 심리를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