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행복의 사보타지
2014-12-18
글 : 김혜리

*<인셉션>과 <다크 나이트> 시리즈, <인터스텔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렌스 앨마-타테마 <장남의 죽음을 맞은 파라오>(1872)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본 관객이 후련하지 않은 이유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얄미우리만큼 중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스콧은 신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잘라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 편도 이집트 편도 들지 않으며, 모세(크리스천 베일)의 주적이자 잔혹한 군주인데도 파라오 람세스(조엘 에저턴)를 끝까지 ‘형제’로 묘사한다. 그중에서도 이집트의 모든 가정이 첫아이를 잃는 재앙 장면이 관객의 감정에 혼란을 일으킨다. 부왕에게 못 받은 사랑을 배로 쏟았던 어린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람세스는 악당이라기보다 희생자로 보인다. 그림은 로렌스 앨마-타데마의 <장남의 죽음을 맞은 파라오>(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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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호 11월3일 일기에서 이어집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는 구조 설계에 강하고 반대급부로 인물 조형에 취약하다. 개중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는 캐릭터로서 자립에 성공한 희귀한 경우다. 그리고 조커의 유명한 대사 “왜 그리 심각하고 난리야?”(Why so serious?)는, 놀란 영화의 거의 모든 남성주인공들에게 던져봄직한 질문이다.

놀란 형제가 창조한 남성 영웅들은 유머가 부족한 정도를 넘어 고행자의 풍모를 보인다. 쾌락 불감증(anhedonia) 아니면 행복을 은연중에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갈 지경이다. 예컨대 배트맨은 만화 원작부터 우중충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다크 나이트> 3부작의 브루스 웨인은 훨씬 집요하게 우울하다. 남자들의 로망을 총망라한 수많은 물건을 소유하고도 전혀 즐기는 기색 없이, 단련과 고뇌에 집중한다. 사랑의 기쁨은 그럼 어떨까? 놀란의 히어로들은 대단한 로맨티스트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이 주는 희열은 추억하거나 추구하는 대상이지 현재 손에 쥐기에는 불가능한 무엇이다. 평자들은 여성의 실종이나 죽음을 서사의 대전제로 즐겨 쓰는 놀란 영화에 ‘죽은 아내(여자 친구)의 사회’(Dead Wives’ Society)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메멘토>의 가이 피어스, <프레스티지>의 휴 잭맨, <인셉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는 죽은 아내가 행위의 동력이고 <인터스텔라>의 매튜 매커너헤이도 아내를 여읜 후 장인과 살고 있다. <다크 나이트> 연작에도 흑기사와 백기사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여성 캐릭터의 죽음이 등장한다. 완전한 반려자인 채 죽어버린 그녀들은 숭배받지만 현실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신성한 유령들이다. <인터스텔라>의 부녀 재회 장면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놀란 감독에게 일상적인 감정 장면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토록 고대한 상봉은 거의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식으로 간략히 지나간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임종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딸 머피(엘런 버스틴)의 대사는 매우 타당하다. 시간여행의 결과로 다른 시간대에 속하게 된 부녀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리라. 하지만 개별 장면의 정당성과 별개로, 놀란 감독의 남성 인물들이 행복을 희구하면서도 막상 행복이 닥쳐왔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인상은 지속된다. 행복에 대한 놀란 감독의 사보타지는, 어쩌다 해피엔딩이라도 맞을라치면 구태여 꿈인지 생시인지 아사무사하게 처리하는 버릇으로 확인된다. <인셉션>의 결말은 혹시 또 하나의 꿈이 아닐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브루스 웨인은 살아남은 게 확실한가? <인터스텔라>의 에필로그가 보여주는 아멜리아(앤 해서웨이)의 모습은 회상이나 희망사항 아닐까? 한점의 의혹을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행복 앞에서 번번이 주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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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남자주인공들이 대체로 심각한 이유는 삶의 명분에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벌 브루스 웨인이야 먹고사는 문제가 고민거리가 못 되니 당연하다 치자. <메멘토>의 가이 피어스는 삶의 동기가 필요하기에 자기기만을 반복하는 루프를 버리지 못한다. <인셉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아이디어 이식 작전은 귀국 허가를 얻기 위한 거래이기도 하지만 죄의식을 청산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프레스티지>의 크리스천 베일은 삶을 통째로 땔감으로 태워서라도 최고 경지의 마술에 도달하려고 한다. 인류의 명운이 경각에 달린 지구에서 시작하는 <인터스텔라>는 모처럼 물리적 생존을 당면목표로 삼은 놀란의 영화인가 싶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인터스텔라>의 시나리오가 거듭 강조하는 말세의 증거는, 인류가 식량 조달에만 급급하며 더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외관상 여타 묵시록적 영화에 비해 <인터스텔라>의 세계는 매우 멀쩡해 보이지만 멀쩡하지가 않은 것이다. 놀란 감독은, 인간이 먹고살기에만 매달리고 (극중 동네 야구 수준으로 전락한 뉴욕 양키스팀이 대변하는) ‘그저 그런 것들’에 대강 만족하며 사는 상황을 가장 큰 불행으로 인식한다. 주인공 쿠퍼를 빼닮은 딸 머피(매켄지 포이)는 불시착한 정찰기 드론의 태양전지를 빼내 농사에 쓰려는 아빠한테 “그냥 날려보내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 이는 로봇에 감정을 이입하는 소녀 감성이 아니라, 당장 쓸 데가 없어도 탐험을 목적으로 삼는 사물이 계속 존재하기를 소망하는 가치관의 표현이다. “우리는 탐험가이고 개척자였지 관리인이 아니었다”는 대사로 요약되는 놀란적 인물의 성향은, 전작들과 달리 이야기의 궤적이 외계로 발산하는 SF <인터스텔라>에 이르러 고전 할리우드 백인 남성 영웅들의 모토인 프런티어 정신과 도킹한다. 전쟁영화의 전장, 서부극의 황야에 해당되는 우주에 떨어진 쿠퍼는 선배 영웅들이 그랬듯 애초에 그를 프런티어에 파견한 조직과 갈등한다. 미처 몰랐던 진실은 그를 홀로 서게 만들고 최종 해결책의 고안과 실행은 영웅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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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에는 두번의 ‘<보이후드> 모멘트’가 있다. 하나는 쿠퍼가 중력이 센 행성을 잠깐 탐사하러 갔다가 지구 시간으로 23년치가 쌓인 영상 메시지를 한번에 확인하는 장면이다. 화면 속 아들 톰(케이시 애플렉)은 쿠퍼의 눈앞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잃는다. (그랬다고 전한다.) 중력의 차이가 빚은 아찔한 세월의 격차는, 실제 삶에서 부모와 아이가 체감하는 상이한 시간의 속도에 대한 은유로도 보인다. 다만 <보이후드>에 없고 <인터스텔라>에 있는 감정은 장기 출장 중인 아빠의 죄책감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남자의 미안함. 그것은 <인셉션>의 디카프리오도, 그리고 아마도 현실의 놀란 감독도 공유하는 바일 터다. <인터스텔라>와 <보이후드>의 두 번째 접점은 사랑이 말 그대로 우리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정색한 신념이다. <보이후드>는 심리학 교수가 된 패트리샤 아퀘트가 강단에서, 아기에 대한 엄마의 보호 본능이 실제로 인류의 생존 확률을 높인다고 설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다음 수업 주제로 예고하는 존 볼비의 애착이론은, 아기들의 분리불안도 생존 확률을 높이려는 행동이고 한명의 보호자가 새로 태어난 인간의 안전기지가 된다는 내용이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만 박사와 브랜드 박사가 화답한다. 만은 인간의 끈질긴 생존 본능과 타인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이 임기응변의 창의력을 촉발시켜 로봇보다 유능하게 위기에 대처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아멜리아 브랜드는 인간이 발명하지 않았으나 분명히 눈에 보이는 물리력을 발휘하는 사랑이, 아직 수식으로 증명되지 않았을 뿐 우주를 형성하는 상위의 원리일 수 있다고 과감히 주장한다. 텍사스주 휴스턴 어딘가의 카페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그의 오랜 친구 매튜 매커너헤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나 이 주제로 담소를 나눠도 좋겠다. 기왕 만난 김에 링클레이터의 감정 신 연출법 노하우도 공유하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좋아요

요점만 간결하게

개봉을 1년 앞두고 공개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첫 예고편은 티저의 본분에 철저히 충실하다. J. J. 에이브럼스 감독은 과거의 영광과 첨단 CG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예고편에는 무관심하다. 프랜차이즈의 트레이드마크는, 슬쩍 스치는 벤 버트의 사운드와 존 윌리엄스의 음악으로 충분하다. 전작의 주요 인물은 예고편에 배제됐고 88초 중 액션은 40초 정도에 그쳤다. 대신 <깨어난 포스>의 신규 사양이 담백한 숏을 통해 핵심 체크된다. 아직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로운 캐릭터들이 대사 없이 스냅 사진처럼 소개되고 엑스윙과 밀레니엄 팔콘, 광선검의 진화된 디자인이 선보이며, 부각된 흑인, 여성 캐릭터가 시대에 부응한 변화도 점치게 한다. 사막 행성 타투인의 장엄한 풍광에 스톰트루퍼 복장의 어리바리한 남자가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첫 숏은 연출의 톤과 정서를 암시한다. 이 효과적인 티저는 “포스가 언제 잠들었었나?”라는 삐딱한 질문을 깜박 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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