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12월25일에 친구가 결혼했다. 자식, 여전하구나, 여전히 이기적이야. 전날의 숙취로 벌게진 눈을 하고 간신히 기어나온 우리는 자기 생일(12월23일이다)에다가 크리스마스와 결혼기념일까지 한방에 해결한 운 좋은 놈을 욕하면서 갈비탕을 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 뒤풀이 비용도 아꼈어.
1년이 지났다. 단체 문자가 왔다. 딸을 낳았다는 친구의 문자였다. 아니, 이 녀석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제왕절개라도 한 건가! 축하한다, 이제 네 인생에 기념일이란 크리스마스와 마누라 생일뿐이겠구나. 네 딸은 산타 할아버지를 생일 선물 주는 사람으로 알고 자라겠지, 너 같은 놈이 선물을 두개 준비할 리는 없을 테니까(근데 너 돌잔치는 어떻게 한 거니. 설마 또 크리스마스에…. 초대해주지 않아 고맙다). 그리하여 경기도 부천에는 크리스마스를 영영 잃어버린 어느 꼬마에 관한 슬픈 전설이 전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마스가 대수랴, 아빠를 영영 잃어버린 꼬마도 있다. 제목부터 곧이곧대로인 영화 <산타클로스>의 찰리 어린이는 아빠가 (실수로 그러기는 했지만) 산타 살해범이 된 것도 모자라 아예 산타가 되어 북극으로 떠나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산타가 남긴 옷을 입은 사람이 산타가 된다는 법칙 때문이다. 그래도 찰리는 슬프지 않다. 아빠 덕분에 하늘을 나는 썰매도 타고, 산타 마을에 가서 요정하고 놀기도 하고, 산타의 식량인 코코아와 쿠키도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어서 가서 산타나 하라고 등을 떠미는 찰리에게 아빠는 묻는다, 아빠냐, 산타냐.
그대가 찰리라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산타다, 나라면 산타를 택하겠다. 아니, 아빠가 아니라 내가 산타 될 거라고, 그거 내가 할 거라고.
산타, 그는 누구인가. 본명 성 니콜라스, 애칭 산타 할아버지와 파파 노엘과 기타 등등, 주소 북극, 1년 중 노동 일수 1일, 나머지 364일은 거대한 작업장에서 개미처럼 일하는 요정들을 감시하며 무위도식하는, 실버 세대 꿈의 롤모델. <크리스마스 악몽>의 핼러윈 해골 인형 잭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산타는 이런 사람이다. “크리스마스 마을의 통치자는 무시무시한 왕/ 낮게 깔린 목소리에/ 가재처럼 커다란 몸집은 온통 붉은색/ 우람한 팔뚝을 걷어붙이고/ 순록에 썰매 달고 출동하신다.” 다시 말해,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오면 붉은 관을 쓰고 공포의 왕이 강림하신다.
언뜻 보기에는 단 한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고 만천하에 크리스마스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불사르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산타클로스 가문 3대에 걸친 패악을 다루는 애니메이션 <아더 크리스마스>를 보자. 여기에 나오는 포장 담당 요정은 3일 동안 선물 26억4천만개를 포장하고도 모자라 산타도 노는 25일 새벽에 선물을 배달하러 나간다.
하지만 다시 한번 알고 보면 산타는 25일 새벽에만 쉬는 게 아니다. 그는 이 닦을 시간도 없는 요정들이(너희가 이빨 요정이 아니라 다행이구나) 밧줄을 타고 천장에 붙었다가 바닥을 기는 곡예를 하며 선물을 나눠주는 와중에 간식을 먹거나 잠을 잔다. 체면치레하느라 두어번 얼굴을 비추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걸림돌이 될 뿐, 그냥 과자나 먹고 있는 게 도움 되는 산타 할아버지. 나는 이것과 비슷하게라도 편한 직업은 사장밖에 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탐구하기 시작했다, 산타의 도(道)를.
<산타의 매직 크리스탈>을 보자 산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사악한 쌍둥이 동생(이라지만 외모는 훨씬 나은)에게 마법의 크리스탈을 빼앗긴 산타는 얼떨결에 북극으로 굴러들어온 고아 소년한테 빨리 가서 크리스탈을 찾아 오라고 시킨다.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지금 엄마 없다고 무시하는 건가요. 어린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본부에 앉아 응원 구호나 외치고 있는 <로보트 태권브이> 김 박사도 아니고, 왜 이렇게 엉덩이가 무거워. 아, 맞다, 무겁긴 하지.
이처럼 팔자가 늘어진 산타라고 하여 고충이 없는 건 아니다. <산타클로스>의 전대 산타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옷을 입으라고 적힌 카드를 손에 쥐고 죽는데, 그런 카드가 있다는 건 그만큼 산업재해가 자주 일어난다는 증거일 것이다. 21세기를 맞아 구조조정에 내몰린 <산타는 괴로워>의 산타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과도한 흰머리로 고민에 빠지는데… 그래도 사장이잖아. 요정들이 금방이라도 노래 <사계>(‘소금땀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가 흘러나올 것 같은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장난감 만드느라 노동하고 있는 동안, 그는 고뇌한다, 침대에 퍼져서.
그래도 나는 산타가 될 수 없다. 왜냐, 산타는 가업이며 또한 세습이기 때문이다. 아까말하지 않았던가, 산타클로스 ‘가문’ 3대에 걸친 패악을 다루는 <아더 크리스마스>라고. 할아버지 산타는 썰매도 몰 줄 모르고 아빠 산타는 크리스마스이브 내내 졸기나 하고 아들 산타는 요정들한테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는 가문이 바로 산타 가문이다. 게다가 장자 세습. 어느 모로 보나 형보다 똑똑한 <산타의 매직 크리스탈>의 동생은 2분 늦게 태어난 죄로 산타가 되지 못했다.
아무나 옷을 주워 입으면 산타가 되는 <산타클로스>가 있지 않느냐고? 대형 완구 회사의 마케팅 팀장이었던 아빠를 닮아 비즈니스에 밝은 찰리 어린이는 어린 나이에 결심했다, 가업을 이어 산타가 되겠노라. 이 영화에서 대체 언제부터 산타가 가업이었더냐. 하지만 눈치 빠른 요정들은 벌써 (진짜 산타인 아빠가 아니라) 찰리에게 알려주었다. 쿠키와 코코아가, 봉지가 아닌 접시에 담겨 나오는 기내 서비스, 아니 썰매 서비스의 존재를. 그것이 산타를 죽이면 산타가 될 수 있는 투쟁의 시대에서 부모만 잘 만나면 산타가 되는 평화의 시대로 접어드는 서막이었으니, 기쁜 노래 부르면서 빨리 달리자.
빨간 의상만으론 부족해!
산타가 산타이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체중을 유지하자
그림책 <산타 백과사전>에 따르면 산타는 원래 날씬하다. 날씬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도대체 왜?)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헬륨 가스를 옷에 채우고, 평소엔 추우니까 외투 안에 난방 장치를 달고 다닌다. 하지만 산타는 뚱뚱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산타클로스>에서 느닷없이 산타가 되어버린 불운한 스캇(팀 앨런)은 포화지방을 삼가며 불가항력인 중년의 체지방을 다스려온 세월이 무상하게, 저절로 뚱보가 된다. 그걸로도 부족해 왠지 초콜릿이 너무 맛있고 과자도 당긴다. 혹시, 요요 올까봐? <세이빙 산타>의 산타 또한 팬케이크 애호가. 그렇지 않더라도 산타는 아이들이 산타 먹으라고 탁자에 놓아둔 우유와 쿠키를 모두 먹어야 할 의무가 있다. 아, 산타 되고 싶다.
외국어를 갈고닦자
매년 12월이면 산타의 나라로 알려진 핀란드에는 150여개 나라에서 편지가 쏟아진다고 한다. 나는 어릴 적에 산타한테 편지를 써서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전달 해줘야 선물이 온다는 걸 몰랐는데(그래서 원했던 장난감이 아니라 연필이나 공책 따위 학용품만 받았나 보다) 세상엔 똑똑한 어린이들이 많기도 하다. <산타는 괴로워>에 따르면 ‘가족의 건강’ 등의 기특한 소원을 빌던 중세 어린이들과 다르게 21세기 어린이들이 원하는 선물은 평균 15개. 그걸 모두 알아먹으려면 언어 능력이 필수다.
감시를 잘하자
산타는 할 일은 없어도 감시할 건 많다. 순록들이 딴짓 안 하나(<니코: 산타비행단의 모험>에선 하룻밤 외출했다가 애를 낳았다), 요정들이 놀지는 않나(<산타는 괴로워>의 산타 부인은 요정들 지휘하는 호각까지 가지고 있다), 산타 직에서 은퇴한 아버지가 사고는 치지 않나, 한편으로 아들이 산타 자리를 넘보지 않나(<아더 크리스마스>의 산타가 이래서 맨날 조는 건가). 천상천하 산타 자리는 하나뿐인데 넘보는 이 많고 방해 또한 만만치 않으니, 잠들지 않는 산타의 밤은 길고도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