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트 오브 킬링>과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우는 알겠는데 캐릭터 이름은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고, 영화제목만 기억날 수도 있다. 관객에게 분량을 아쉬워하게 만들었던, 때로는 배우의 이름을 확인하려고 엔딩 크레딧을 기다리도록 붙잡았던 조연들의 졸업앨범이다. 어느 영화 속 누구인지 열여섯 캐릭터를 빠짐없이 맞힌 독자에게는… 2015년 선택하는 영화 중 최소 8할이 기대 이상인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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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모닥불을 확 끼얹는 영화가 간혹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보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하라 가즈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가자 가자 신군>(1987)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태평양전쟁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늙은 남자가, 은퇴한 일본의 전쟁 책임자들을 찾아가 추궁하고 멱살을 잡는다. 수십년이 흐른 후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피해자의 분노가 <가자 가자 신군>을 잊을 수 없는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화인(火印)이라면, 반대로 <액트 오브 킬링>의 피해자들은 뼛속까지 밴 체념으로 전율을 안긴다. 실제로도 정신적으로도 복권된 적 없는 그들은, “나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자각조차 스스로 검열한다. 처음 <액트 오브 킬링>을 보았을 때 가장 무시무시한 대목은 가해자들의 도덕적 불감증이었지만, 두 번째 관람에서는 50년 전 학살에 무고한 가족을 잃고 현재도 착취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무기력이 더욱 서늘했다. 판차실라 청년단원들에게 자릿세를 뜯기는 중국계 상인들- 많은 화교가 과거 학살에 희생됐다- 은, 약취의 현장에 따라간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카메라가 상징하는 미디어는 그들 편인 적이 결코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와르와 동료들이 공산주의자 고문을 재연하는 장면에 배우로 동원된 동네 사내는 뭘 찍을까 의논하는 회의에서 학살 당시 양부가 끌려가 이튿날 변사체로 발견됐으며 겁에 질린 이웃 중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기억을 소재로 제보한다. 정황상 살해 용의자인 안와르와 동료들은 담담한 척한다. 여기서 특기할 부분은 남자가 안와르 일당을 넌지시 찔러본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리어 움찔해 당신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고 급히 무마하는 쪽은 비탄을 삼키고 살아온 남자다. 다음 장면에서 50년 전 아버지가 묶였을 자리에 앉아 고문당하는 시늉을 하던 남자는, 불현듯 비지땀 같은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진실의 뜻하지 않은 누수다. 퍼포먼스의 고양감이 자기검열의 빗장을 잠시 헐겁게 만든 것이다. 중국계 상인과 재연배우의 얼굴 어느 구석에서도, 언젠가 정의가 역습하고 역사는 바로잡힐 거라는 중얼거림을 찾아 볼 수 없다. 내게 <액트 오브 킬링>에서 가장 두려운 이미지는 가해자의 승리가 강고한 세계에서 본인의 트라우마에 관해 구구히 사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만성 노이로제로 일그러진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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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 오브 킬링>의 오펜하이머 감독은, 가해자가 배우로서 학살의 기억을 재연하도록 유도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입장에서 재연의 형식과 찍는 순서까지 결정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한 토막을 찍고 나면, 촬영된 분량을 보여주고 “자, 안와르 콩고씨. 그럼 다음엔 뭘 어떻게 찍을까요?”라고 묻는 식이다. 안와르 콩고는 매우 적극적으로 응한다. 40여년간 술과 마약, 춤이 말끔히 지워주지 못했던 찜찜함이, 근사한 할리우드 스타일 영화 속에 들어가면 청산될 거라고 확신해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오펜하이머 감독 입장에서는 절묘하게도- <액트 오브 킬링> 후반에 ‘작가’로서 안와르가 내리는 일련의 결정은, 여태 그를 둘러치고 있던 질긴 장막을 찢어버린다. 갱스터영화 스타일로 촬영한 고문 장면을 본 안와르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판차실라 청년단의 화면 속 행위는 어째 그가 기억하는 것처럼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불안을 떨쳐내고 싶은 그는, 거대한 폭포 앞에서 피살자들로부터 감사의 메달을 수여받는 환상적 뮤지컬 장면을 제안한다. 살해된 남자 역의 배우는 안와르에게 “나를 천국으로 보내줘서 고맙다”라고 치하한다. 다시 모니터링에 들어간 안와르는, 감정이 풍부해 맘에 든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얼굴로는 다른 말을 한다. 그의 귀에도 죽은 자의 말은 가짜로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안와르는 오펜하이머 감독에게 다시 고문실 세트로 돌아가 자신이 린치 당하는 장면을 찍어보자고 요구한다. 그리고 비로소 결과물에 만족한다. 피해자의 의자 외에 달리 떳떳한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인자한 할아버지이기도 한 안와르는 정정당당한 캐릭터가 된 제 모습에 흡족한 나머지 잠자는 어린 손자들까지 두들겨 깨워 TV 앞에 앉힌다. “자, 보렴. 할아버지 매 맞는다? 할아버지 죽는다?” 그러나 지루해진 소년들이 잠자리로 돌아간 후, 다시 혼자가 된 안와르의 얼굴에는 개기일식처럼 불안이 엄습한다. 방금 본 배역은 제 배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이 여기서 멈추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각성 이후 안와르 콩고가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혼란과 자학적 구토 증세를 내가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다. 그는 뒤늦게 오펜하이머 감독의 영화가 지닌 의도와 관객의 시선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게다가 안와르에겐 연기에 대한 본능과 충동이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은 속죄와 회개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었고, 끝까지 아니었어야 했다.
12/04
러닝타임 대부분을 가면을 쓰고 보내는 <프랭크>의 마이클 파스빈더와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루게릭병을 가진 스티븐 호킹 박사로 분한 에디 레드메인이 표면적으로 공유한 핸디캡이 있다면 감정 표현에 얼굴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면이 있다. 파스빈더는 얼굴을 계속 갖지 못했기에 마지막 순간 노출된 얼굴로 농축된 페이소스를 발산할 수 있었고, 레드메인은 감정과 즉각 일치시킬 수 없는 안면 근육의 불능 상태로 인해 우리가 익히 아는 표정의 사전에서 벗어난 연기 언어를 구사한다. 성대를 잃고 몸과 얼굴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시간과 더불어 점점 축소되면서 레드메인의 연기는 눈빛과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보이스 신시사이저의 엔터키를 누르는 타이밍으로 수렴한다. 이를테면 이 장면이다. 독실한 국교회 신자인 아내 제인(펠리시티 존스)에게 평생 처음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한 말을 건네 기쁨을 준 스티븐은 잠시 사이를 둔 다음, 다른 여성과 여행을 가겠다는 메시지를 기계로 발성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이것이 실질적인 이별의 통고임을 안다. 근육을 통제할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은 직접 많은 걸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불가피하게 상념에 빠진다. 스티븐은 두 이야기를 처음부터 이어서 하려고 준비한 걸까? 신을 긍정하는 말에 반색하는 아내를 보며, 당신을 떠나기로 했다는 의미의 다음 문장 뒤에 깜박이는 커서를 그는 몇초나 응시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영화에 따르면 호킹 부부의 결혼은 우호적 상태로 자연 소멸했다. “당신을 사랑했어요”(I have loved you)라는 제인의 또박또박한 대사처럼, 둘은 서로 사랑했던 이유를 생생히 기억한 채 “그러나 여기까지”라고 성숙하게 합의한다. 스토리의 마지막 코너인 이 장면이 유독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시점까지 영화가 두 주인공이 갈등과 직면하는 순간을 대체로 에둘러간 탓도 있다. 제임스 마시 감독은 스티븐의 불치병을 알고도 결혼을 강행하는 대목, 둘의 결혼에 제3자가 들어서는 시기, 정절의 훼손을 암시하는 밤 등 까다로운 장면을 예외 없이 음악이 수반된 몽타주 시퀀스로 넘긴다. 커플의 다툼은 대부분 문학도와 과학도의 토론처럼 들리고 모처럼 과로에 짓눌린 제인과 스티븐이 벌이는 생활에 관한 언쟁은 “얘들아, 엄마 화났나보다”라는 대사로 슬쩍 마무리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이 굴곡 많은 25년의 결혼이 도달한 세련된 결론은 만족스럽게 묘사하지만, 거기 이르기까지 오갔을 고성과 상기된 뺨, 박탈감과 원한은 요령껏 우회한다. 대신 홈무비의 몽타주 시퀀스가 그 자리를 메운다. 가족 여행 비디오 속 얼굴들은 환하고 아름답지만, 휴가지의 햇살 속에 가뭇없이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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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발산만 배웠소
<숲속으로>의 애석한 점은 앙상블 중 카리스마 강한 캐릭터와 재미있는 장면들이 영화 전체의 방향과 딱 들어맞지 않는 데에 있다. 신데렐라의 왕자로 분한 크리스 파인은 큰 웃음을 주지만 멜 브룩스의 패러디 코미디 속 인물처럼 보이고,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감동적이나 영화의 톤에 넘치게 무겁다. 하지만 나중에는 뭐 어떠랴 싶다. 어차피 영화가 다소 길을 잃은 가운데 <숲속으로>가 후세에 남길 유산은 몇몇 ‘튀는’ 장면들이다. 크리스 파인 왕자는 신데렐라(안나 켄드릭)가 불성실함을 탓하자 “난 성실은 모르고 매력발산만 배웠는데?”라며 어리둥절해한다. 멋진 포즈로 인생이 점철된 그가, 라푼젤의 짝인 동료 왕자와 정방폭포 스타일의 풍경 앞에서 구성지게 부르는 이중창은 태진아-송대관 조를 위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