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땅콩이 먹고 싶어졌어
2015-01-01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에비에이터> <라파예트> <알투비: 리턴투베이스> 등에서 본 비행사의 도(道)
<에비에이터>

스물한살에 처음 비행기를 탔다. 학교에서 지원금이 나온 제주도 답사 덕분이었는데 가슴이 두근거려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시절에도 일찍이 해외여행 갔다온 관록을 과시하던 강남 후배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누나, 비행기 타면 오렌지 주스가 나오는데 자는 사람한테는 안 줘요.” 그래서 나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기다렸다가 주스를 받아 마셨다. 주스는 집에도 있지만 이건 비행기 주스니까. 그때는 몰랐다, 음료수는 주스만 있는 것이 아니며 자다 일어나서도 음료수를 받을 수 있고 비행기 안엔 땅콩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 뉴스를 보다가 왠지 그 땅콩이 먹고 싶었다. 대한항공을 타면 주는 땅콩, 견과류를 싫어하는 나도 꼬박꼬박 받아먹는 꿀 바른 땅콩, 고소하고 달콤한 대한 땅콩. 남들은 불합리한 기업의 소유 구조와 재벌의 행태를 비판하며 분노하는데, 나는 왜 땅콩이 먹고 싶었던 걸까. 30대 중반에 가난 귀신이 내리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일단은 몽땅 먹고 보는 먹깨비를 더불어 내림받아 이렇게 됐다. 나는 밤새 구토와 설사에 시달리다가 남이 사준 삼겹살 먹고 낫는 사람, 고양시 백석동의 먹깨비. 사람이 맥도널드만 먹고 살면 어떻게 되는지(배가 나오고 침울해진다) 경고하는 다큐멘터리 <슈퍼 사이즈 미>를 보다가 불현듯 햄버거가 먹고 싶어 달려나갔던 인간이 바로 나다. 나야 뭐, 원래 배 나오고 침울하니까.

그렇다면 비행기에선 무얼 먹을 수 있는가. 음식은 잘못이 없는데(모든 먹을 것은 소중한 법♡ 지켜줘야 한다) 사람 때문에 애꿎게 욕을 먹은 라면과 땅콩 말고도 삼각 김밥을 주는 데도 있고 피자를 주는 데도 있었지만, 내가 본 최고의 기내식은 우유였다. 그렇다면 왜 우유인가. 비행기 주인이 자기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우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드라마 <압구정 백야>의 조지야가 그렇게도 타고 싶어 오빠를 이상한 여자한테 장가 보내려고 하는 그 전용기 주인! 그는 영화 <에비에이터>의 갑부 하워드 휴스, 21세기 갑부들도 차고에 자동차를 모은다는데 1930년대에 이미 비행기를 갈아치우고 있던 패기의 백만장자다.

일찍 죽을까봐 세균을 끔찍하게 무서워했던 휴스가 비행기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직접 몰고 다니면서 시험 비행까지 자처하다니, 비행기가 화장실보다 안전하다고 온몸으로 증명하는 모범적인 항공사 소유주의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그보다 고작 십몇년 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의 기대 수명은 8일이었다고. 그 짤막한 수명은 오로지 적군의 총알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진 미국 조종사들은 곡예 비행을 하거나 농약을 뿌리는 것처럼 다방면의 일자리를 찾아 취업했는데 그중엔 항공우편 배달도 있었다. 그리고 최초로 항공우편 배달을 시작한 조종사 40명 중에서 31명이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라파예트>

그 기록을 읽다 보니 영화 <라파예트>의 천진난만한 조종사들이 안쓰러웠다. 기대 수명 3~6주의 장벽을 넘고 살아서 제대한 기적의 미국 젊은이들. 하늘에선 혼자라 좋다고 하다가 근데 제대하면 뭐 먹고사나 고민하는 동료에게 주인공 롤링스는 언젠가 항공우편이 생길 거라고 장담하는데, 그리고 속없는 동료는 “진짜? 진짜?” 하며 좋아하는데, 생존률이 22.5%. 이게 혼자서 조종도 하고 총도 쏘고 추락하면 구하러 올 헬기도 없이 발로 뛰어 귀환하는 제1차 세계대전 조종사보다 나은 건가, 못한 건가. 게다가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 친구, 진짜로 비행기 타고 소포 배달하러 나갔다고. 하지만 갑부건 졸병이건 비행기로 데이트하는 건 모든 비행사의 특권이다. 내 남자친구는 2500만원짜리 국산 중형차 운전대에도 손도 못 대게 하는데(내가 면허가 없긴 하다) 휴스랑 롤링스는 애인한테 비행기 핸들을 턱턱 쥐여준다. 부러워, 나도 뭐가 됐든 한번 몰아보고 싶은데. 그러고 연애에 성공하는 걸 보면 여심을 사로잡는 건 역시 거대한 바퀴인가 보다. <아바타>도 그렇잖아, 남들 다 타는 경차급 익룡 몰다가 전설의 벤츠급으로 갈아타고 나타나니까 내가 언제 너더러 이 별을 떠나라고 했더냐, 바로 넘어오잖아.

그런 연애 놀음이 극에 달한 비행영화가 있으니 알아들을 수 없는 제목을 달아놓아서 미안했던지 설명도 달아주는 영화 <알투비: 리턴투베이스>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군인이 사람은 즐겨야 한다며 세금으로 만든 비행기를 제멋대로 굴리는 초현실적인(설마 그렇겠지, 이게 현실은 아니겠지) 영화 <알투비…>. 이 영화에서 더럽게 말 안 듣는 공군 비행사 정태훈(이건 비의 본명인 정지훈을 향한 오마주인가)은 얼굴도 실력도 에이스인 정비담당 중사 세영(신세경, 이쯤 되면 이름 짓는 게 귀찮았나 싶어진다)이 마음에 들어 막 영내에서 수작도 부리고 술도 마시다가 동력 글라이더를 타고 데이트를 한다. 이게 군인인가. 내가 어릴 적에 TV에서 틀어주던 1970년대 청춘영화에서도 툭하면 행글라이더나 낙하산 타고 데이트하던데. 정지훈이랑 신세경을 이덕화랑 임예진으로 착각할 뻔했다.

<알투비: 리턴투베이스>

비행이란 그렇게 꿈을 이루어준다. 조국에선 식당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을 <라파예트>의 흑인 청년은 인종도 계급도 차별도 없는 하늘을 날았고,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그 모든 것이 두려웠던 하워드 휴스는 오직 하늘에서만 두려움을 잊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에서 이탈리아 항공 엔지니어 카프로니는 말한다, “비행기는 전쟁을 위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야. 비행기는 꿈이지.” 하지만 실제 카프로니의 회사는 폭격기 생산에 주력했고, 1920년대에 5만km가 넘는 거리를 날아 무솔리니의 총애를 받은 나폴리 출신 비행사 피네도는 노골적인 파시스트였다. 그 두 사람은 모두 꿈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그 꿈이 문제인 거지.

하늘이 그런 것처럼 꿈에는 끝이 없다. 하지만 도리는 있다. 그리고 하늘은 모두의 것, 그 누구의 하늘도 다른 이의 하늘보다 위에 있지 않다. 무도(無道)의 1년이었다. 하늘에도 길이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으니 지금 시작되는 1년엔 이 땅에서도 도(道)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파일럿 스타일?

땅으로 내려온 비행사에게 필요한 두세 가지 소품

<못 말리는 비행사>

모터사이클

하늘을 날던 비행사가 땅에서 애용하는 탈것은 모터사이클이다. <알투비: 리턴투베이스>의 정지훈도 그렇고, 90년대 추억의 영화 <못 말리는 비행사>의 찰리 신도 그렇다. 비행기의 스피드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고성능 슈퍼카처럼 빠르고 자전거처럼 기립 자세의 곡예가 가능하며 부(富)와 남성미를 과시할 수 있는 모터사이클. 하늘에선 봐주는 사람 없이 나 홀로 멋있지만 땅에선 얘가 최고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유니폼

<에비에이터>에서 경쟁 항공사 팬암을 못 잡아먹어 난리였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 2년 전에 팬암 항공사 기장을 사칭하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을 찍었다. 그때 취직 안 시켜줬다고 한을 품은 건가. 어쨌든 그 사기의 핵심은 근사한 기장 유니폼. 그 옷만 보면 지나가던 꼬마부터 예쁜 아가씨까지, 연령 불문 낚이지 않는 여자가 없다. 그래도 디카프리오가 입었으니까 그렇겠지. 무작정 유니폼만 믿지는 말자. 유니폼 효과에 속지 말라는 얘기다.

<알투비: 리턴 투 베이스>

선글라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라파예트>의 비행사들은 투명한 고글을 쓰는데, 그걸 보면 알 수 있다, 색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서 땅으로 내려온 비행사들이 너도나도 선글라스를 꺼내나 보다. 미국의 1급 전투 조종사를 다룬 <탑건>을 패러디한 <못 말리는 비행사>의 찰리 신도 선글라스만 끼면 톰 크루즈가 부럽지 않다. 아, 근데 얼굴만 놓고 보면 원래도 톰 크루즈 부럽지 않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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