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유하] 지갑이 형님이 되는 뒤틀린 세상의 기원을 파헤치다
2015-02-04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강남 1970> 유하 감독

먼지투성이의 땅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 <강남 1970>은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를 잇는 유하 감독의 ‘강남 3부작’을 완성하는 영화다. 자신의 욕망을 향해 부나방처럼 질주하다 끝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비운의 결말을 맞는 밑바닥 인생들. 전작을 통해 유하 감독이 보여줬던 청춘과 폭력과 어둠의 이미지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지만, <강남 1970>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욕망과 비극의 시발점인 ‘강남’이라는 공간이다. 개발의 진통을 겪기 전, ‘야지’라고 불렸던 강남의 시뻘건 흙과 먼지구덩이 속에서 유하 감독은 무엇을 건져내려 한 걸까. 현란한 간판들이 늘어서 있는 현대 강남의 한복판에서, 강남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물었다.

-<하울링> 이후 3년 만의 복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지난해에 개봉했으면 2년 만이었겠다. (웃음) <하울링>을 마무리한 뒤 지난 3년은 ‘강남 3부작’을 완결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특히 <강남 1970>은 지금까지 내가 쓴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정을 거듭한 작품이다. 아무래도 내용상 누아르적인 컨벤션이나 전형적인 요소들을 피해갈 수 없기에, 그런 부분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다른 작품을 해야겠다고 몇번이나 미뤘다가 다시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리던 시기가 꽤 길었다. 그러다가 <강남 1970>이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과 부합하는 부분도 있고, 이 작품을 반드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강남 1970>은 시간순으로 보았을 때 <말죽거리 잔혹사>의 프리퀄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배우 김인권씨가 연기한 ‘찍새’라는 캐릭터가 있다. 그 영화 속 많은 캐릭터들이 내 실제 친구들을 모델로 하고 있었고, 찍새도 마찬가지였다. 찍새는 중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 다닐 등록금이 없어 넝마주이가 됐던, 당시에 불어닥친 개발의 바람에 더욱더 남쪽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 내 친구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마치고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캐릭터는 바로 ‘땅’이다. 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이전 인터뷰에서 ‘천민자본주의’라는 얘기도 했지만, 지금의 현실을 돌이켜보면 자본주의는 뒤틀려 있다. 돈이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는 세상이 온 거다. 양극화도 심해졌고. 이런 측면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사실 1970년대는 땅이 투기의 대상이 되는 시발점이었다. ‘땅’이라는 하나의 단면을 가지고 전체를 얘기해보고 싶었다. 어째서 우리는 지금의 뒤틀린 세상에 살아가게 되었는지. 단순히 복고적인 측면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풍경을 통해 현실과 대화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종대(이민호)가 복부인 민 마담(김지수)과 함께 처음 강남 땅을 둘러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개척자들이 황무지를 둘러보는 느낌이었달까.

=한마디로 ‘엘도라도’(황금의 땅으로 알려진 이상향적인 공간) 같은 느낌의 공간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에 “펜대 하나로 산을 옮기시는 분”이라는 대사가 나오지 않나. 당시 부동산업에 종사했던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때에는 정말로 공무원이 펜대 하나로 산을 옮겼다더라. 저수지가 금밭이 되고, 비쌌던 땅도 똥값이 되는. 펜 놀림으로 그게 가능했던 시절의 강남으로부터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엘도라도 같은 공간의 이미지를 본 거지. 그런 공간의 특성을 좀더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항공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민 마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지수의 캐스팅은 좀 의외의 선택이었다.

=개인적으로 젊었을 때 김지수씨 팬이었다. 지수씨가 나온 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정말 보고 또 봤는데(웃음), 언젠가 함께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찍을 때도 출연 제안을 한 적이 있지만 노출이 있는 관계로 고사를 했었지. <강남 1970>에서는 특별출연을 제안했다. 대개 복부인이라고 하면 도발적이고 글래머러스한 이미지의 인물을 떠올리지 않나. 안 그래 보이는, 순수하고 가녀린 이미지의 인물이 복부인이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수씨를 떠올렸다. 당시에 복부인들이 빨간 바지를 많이 입었다더라. 그래서 복부인이 오면 “빨간 바지 왔다”고 했다고. 그런 의미에서 민 마담에게도 비록 바지는 아니지만 빨간 옷을 입히고 빨간 볼보를 몰게 한 거다.

-종대는 넝마주이로 출발해 점차 건달 세계에서 성장해나가는 인물이다. 그런 이미지의 인물을 떠올렸을 때, 이민호는 단번에 생각나는 선택지는 아니다. 이제까지 맡아온 역할과 정반대의 이미지랄까.

=민호씨를 캐스팅하는 건, 어떻게 보면 나에겐 조인성씨나 권상우씨를 캐스팅하는 것보다 더 큰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민호씨가 이제까지 맡아온 역할 중엔 부유하고 풍족한, 재벌의 느낌을 가진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민호씨를 캐스팅하며 그가 연기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던 장면이 두개 정도 있다. 하나는 계란프라이를 허겁지겁 먹는 모습. 왜냐하면 그동안 맡았던 역할은 밥 먹는 걱정을 안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웃음) 또 하나는 무덤가에서 처절하게 도끼를 들고 싸우는 장면이다. 이전까지 민호씨가 다른 작품에서 구사하는 액션이 댄디하고 스타일리시한 느낌이었다면, 정말 날것의 육탄전이 벌어졌을 때 그 속에서 이 배우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지켜보고 싶었다.

-김래원을 <말죽거리 잔혹사>의 우식 역으로 염두에 둔 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우식이나 <강남 1970>의 용기는 김래원이 맡아왔던 선한 주인공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우식이가 아마 어둠의 세계로 갔다면 용기 같은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래원씨를 만나보니 단순하게 선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눈빛도 약간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고, 그런 묘한 느낌이 좀 있었다. 어차피 <강남 1970>의 용기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모호한 인물이라면, 래원씨가 가진 그 묘한 이미지가 굉장히 잘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다.

-혹시 종대와 용기라는 이름에 다른 의미도 있는지 궁금하다. 흔한 이름은 아닌 것 같아서.

=캐릭터 이름을 짓는 데 한달 걸리는 스타일이다, 내가.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시나리오가 안 써지거든. 종대라는 이름은 최인호의 소설 <지구인>의 주인공 이종대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인데, 카빈총으로 은행을 털다가 비극적으로 죽은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강남 1970>의 종대도 비슷한 느낌의 인물이기에 그 이름을 가져오게 된 거지. “카빈총 들고 은행이나 털어볼까” 하는 대사도 <지구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용기는 내 식구 이름이다. (웃음)

-땅을 두고 이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피의 숙청’ 장면은 <대부>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번 영화를 보고 <대부>가 생각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하지만 나는 이런 숙청 장면들은 오히려 누아르영화의 원형적인 몽타주라고 생각하고, 딱히 <대부>를 의식하며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대부>를 염두에 두고 만든 장면은 따로 있다. <대부2>에서 알 파치노가 여자를 죽인 다음 국회의원을 협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뒤틀어 패러디한 신은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무덤가 결투 장면이 압권이다. 이 장면을 구상하며 어떤 고민을 했나.

=비록 <강남 1970>이 깡패들이 나오는 영화이긴 하지만, 그 장면에서만큼은 그들이 깡패로 보이기보다 헐값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던 민중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무덤가 결투 장면에는 그런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그 장면을 보면 모두 자기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잖나. 상위 몇 퍼센트의 사람들 때문에,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서로 죽이고 싸우는 카오스적인 순간. 대리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신재명 무술감독에게도 이 장면만큼은 서글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의 인트로 액션이 생각나기도 하더라. 뉴욕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서로 살육전을 벌이는 모습이 강남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카오스적인 분위기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남 3부작’을 마무리하며 드는 생각은.

=처음부터 3부작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 <강남 1970>에는 네개의 키워드가 있었던 것 같다. 폭력성과 조폭, 청춘과 강남이라는 키워드. 그중에서 가장 베이스가 되는 건 강남이라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강남이란 건 어떤 구체적 명칭이 아니라 뒤틀릴 대로 뒤틀린 지금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인 상징 같은 거다. 지갑이 형님이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르이기에 누아르를 선택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강남이란 장소가 내 누아르영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은 있나.

=아니, 없다. 나는 늘 닥쳐서 생각하는 편이다.

-좀더 밝은 정서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내가 10년 넘게 여섯편을 만들어왔는데 돌이켜보니 그나마 밝은 느낌의 작품이 <말죽거리 잔혹사>더라. 그래서 이번 영화가 내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안 믿더라고. 결국 어두운 영화 만들 거면서! (웃음) 그런데 한편으로 그런 생각은 든다. 앞으로는 좀더 다른 느낌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생겼다. 너무 글루미하고 비극적인 얘기보다는, 긍정적인 이야기도 해보고 싶더라. 잘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로맨틱 코미디도 해보고 싶고.

-로맨틱 코미디라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라이트 버전이 될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울링>의 개봉 당시에는 이 작품이 여형사 시리즈의 첫편이 될 거라는 말도 했는데.

=<하울링>의 반응이 좋지 않았기에 계속 만들어야 하나 싶긴 하다. <하울링>의 원작이었던 <얼어붙은 송곳니>는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 시리즈’의 일환이었고, 이 시리즈를 모두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확실히 있더라. 사적 소설, 심리 소설이다보니 영화화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관객이 여형사 캐릭터를 마치 여자가 조폭으로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특수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계속 ‘남자영화’만 해왔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나가는 문제적 드라마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그래야 내 영화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고.

적잖은 타격이었을 거라고 혹자들은 말했다. <하울링>의 흥행 부진은 그동안 큰 부침이 없었던 유하 감독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삼진이 두려워서 야구 그만두는 선수가 있느냐”고 그는 말한다. “영화감독도 영화를 만들며 프로야구 선수처럼 안타도 치지만 삼진을 당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하 감독에게 중요한 건 매번 부지런하게 타석에 서는 태도다. 그게 ‘프로’의 자세라고 그는 믿는다. 영화 만드는 것보다 영화의 홍보 과정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던 유하 감독은, 장신의 몸을 일으켜 다음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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