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미에게 명함을 받았다. 큼직하게 적힌 이름 위로 보랏빛 나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런데 명함을 건네받자마자 김수미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인터뷰를 미루자고 했다. 아침에 병원에 데려다준 딸이 첫아이를 출산했단다. 다른 날을 기약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명함 위에 피어 있던 나팔꽃이 떠올랐다. 나팔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기쁜 소식은 이뿐만이 아니다. 다시 전성기라 해도 좋을 만큼 김수미는 부쩍 바빠졌다. 오랜만에 원톱 주연을 맡은 영화 <헬머니>의 개봉을 앞두고 있고, MBC 드라마 <전설의 마녀>도 나날이 화젯거리를 만들고 있다. <전설의 마녀>에서 맡은 ‘김영옥’은 김수미의 실제 본명과 고향을 그대로 차용한 인물이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만큼 무식하고 뻔뻔하지만 함께 수감된 동기들과 우정을 나누는 정 많은 캐릭터다. 시청자의 웃음을 끌어내는 주역이기도 하다. 실은 연출인 주성우 PD의 이전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 못내 미안해 처음과 마지막 즈음 5회 정도만 출연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출연분이 방송된 직후 시청자들은 김영옥을 계속 보고 싶어 했고, 때마침 영화 촬영도 미뤄져 고정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전원일기>의 (대본을 쓴) 김정수 선생님이 만드신 일용 엄니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인생사는 계산이 안 맞는 겨. 계산은 산수에나 맞는 겨.’ 살아보니까 그 말이 맞고 좋더라고요.”
<헬머니>도 <마파도>(2005)부터 <육혈포 강도단>(2010), <위험한 상견례>(2011) 등을 함께했던 이서열 PD와의 인연으로 참여하게 됐다. <헬머니>에서 김수미가 연기하는 이정순 할머니는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욕의 대가이지만, 그 속내는 자식 위하는 마음으로 꽉 찬 희생적인 어머니다. 욕배틀이라는 코믹한 배경이 있지만 실상 <헬머니>는 소시민의 울분을 풀어주는 데 더 방점을 둔 휴먼 드라마다. ‘헬머니’가 작정하고 웃기려는 캐릭터인 것도 아니다. 직접 글을 쓴 여덟권의 저서를 통해 마음 아픈 이들의 속을 오래도록 어루만졌던 바 있으니 김수미가 ‘헬머니’를 연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부터 나를 모델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거예요. 내용을 보니 무작정 욕을 해대는 게 아니라 이 할머니의 푸근한 욕을 통해 보는 사람들이 속풀이하게 만드는 거더라고요. 세상이 점점 망가져가고 있어요. 그런 아픈 데를 긁어줘야 터지지 않지. 참아가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이 넘치는 욕으로 대리만족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요.”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기억도 한 가지 이유다. “전라도 군산이 고향이라 나는 말귀 알아들을 때부터 욕 얻어먹으면서 자라왔어요. 상스럽고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문화예요. 우리 어머니도 나한테 늘 ‘창세기를 터뜨려 죽일 년, 이 오살할 년’이라고 했다고. 하도 듣고 자라니까 애정표현도 자연히 욕으로 하게 되죠. 금방 장독에서 꺼낸 묵은지의 맛이랄까. 내가 중학생 때 서울로 유학을 갔어요. 그런데 서울 친구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에게 존대를 하는 거야, 글쎄.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난 우리 부모가 쌍놈인 줄 알았어. (웃음)” 현재 촬영 중인 <전설의 마녀> 녹화일마다 60인분 전기밥솥을 통째로 들고 가 현장 스탭들에게 뚝딱뚝딱 아침밥을 차려 먹이는 습관도 어머니의 영향이다. “우리 어머니가 늘 보따리장수들을 사랑방에 우르르 들여서 밥먹여 보내는 게 일이었어요. 그걸 똑 닮은 거지. 힘들지 않냐고? 재밌어. 아들딸 같은 애들이 맛있게 밥먹는 걸 보고 있으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어요. 스케줄에 지쳐서 가끔 밥 못해주는 게 너무너무 속상하지.”
“하다못해 돌멩이도 모양이 다 다른데 우리 같은 배우들도 상품으로서 다 달라야 하지 않겠어요?” 막내딸을 애지중지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풍부한 감수성, 곡절 많았던 인생사가 바탕이겠지만 역시 배우로서의 프라이드야말로 김수미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이다. 문학에 풍덩 빠진 소녀 시절을 보내고 국문학과에 진학하려 했던 김수미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스무살에 정동 문화방송국의 신인 연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이국적이고 눈에 띄는 외모에 “치와와 같다”는 혹평을 들은 것도 잠시뿐, 얼마 뒤 혹평의 주인공인 유흥렬 감독의 연속극 <아다다>에 앙칼진 첩실 화순이 역으로 캐스팅됐다. ‘화순이’ 열풍은 김수미에게 숱한 상을 안기며 그를 스타의 길로 인도했다. 김수미는 동명이지만 전혀 다른 캐릭터로 연속극 <새아씨>에서 열연했고, 화순이의 이름을 딴 라디오 프로그램 코너도 있었으며 심지어 <화순이>(1982)라는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물론 주연은 김수미였다. 하지만 김수미의 커리어는 ‘화순이’에 멈추지 않았다. 다양한 역할을 번갈아 연기했고 김수미를 ‘국민배우’로 만든 <전원일기>의 일용 엄니는 그의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그때 김수미의 나이는 불과 스물아홉이었다.
2000년 초, 그를 괴롭히던 악재들을 딛고 복귀한 이후부터 김수미의 대표 캐릭터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 하나는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제대로 보여준 독보적인 카리스마의 부유한 사모님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 <오! 해피데이>(2003)와 <마파도>에서 연기한 무지막지한 욕쟁이 할매다. ‘가문’ 시리즈의 홍덕자 여사, <육혈포 강도단>의 무시무시한 둘째 할머니 영희, <위험한 상견례>의 서울 사모님 춘자 등은 김수미의 두 대표 캐릭터를 뒤섞은 인물들이다. <전설의 마녀>의 김영옥도 이 계보로 이어져 있다. 계보의 중간엔 <귀엽거나 미치거나> <안녕 프란체스카 3> <뱀파이어 아이돌> 등 개성 강한 시트콤도 적당히 섞여 있고, <맨발의 기봉이>(2006)의 노모, <그대를 사랑합니다>(2010)의 치매노인 순이와 같은 진지한 인물도 더러 등장한다.
여전히 김수미는 자신을 더 다층적으로 활용해줄 작품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스타이자 자존심 강한 배우다. “솔직히 체력이 달린다는 생각이 이제 슬슬 들어요. 그렇지만 나이 먹어서 젊은 배우보다 NG를 많이 낸다, 지쳐 보인다는 소리 듣는 건 싫어요. 힘듦을 들키는 게 싫어. 누가 ‘선생님 힘드시죠?’ 하면 ‘죽겠어’라고 하고 싶은데 그 말을 못해요. 그래도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야지 물 밖에 나오면 되겠어요? 물속에 있을 때가 좋은 거지. 내가 꽃을 참 좋아하는데 수국은 매일 물을 줘야 해요. 어쩌다 한번씩 물주는 걸 잊으면 바로 시들시들해져버려요. 일이 없을 때의 나 같아.” 다음주면 <전설의 마녀> 촬영도 끝이 난다. 한달쯤 푹 쉬며 즐기던 여행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물론 한달 신나게 여행 다녀오고 나면 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한다. “김수미는 욕이 아니면 안 되는구나”라는 말을 듣기가 싫다며 앞으로 한동안은 욕 연기를 자제하고 휴머니즘에 중심을 둔 진지한 드라마 위주로 작품을 고를 생각이다. 공부에 대한 열망과 작가로서의 꿈도 현재진행형이다. 70대가 되면 아홉 번째 책을 낼 계획이고, 틈틈이 써둔 시나리오는 모 영화사에서 받아 각색 작업을 하고 있다. 그저 농이 아니다. “조인성을 염두에 두고 쓴 건데, 내용은 알려줄 수 없지만 제목은 말해줄게. <치명적인 실수>. (웃음)”
Magic hour
‘김수미꽃’ 피다
<오! 해피데이>는 2000년 초 연이은 악재와 건강 악화, 우울증으로 “폐인”이 다 되었던 김수미의 재기작이다. 버팀목 중 하나였던 <전원일기>가 종영했고 김수미는 한층 깊은 우울에 빠졌다. 그때 SBS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의 각본에 참여했던 윤학렬 감독이 김수미를 찾아와 연출 데뷔작에 출연해달라며 “팔로 품을 수 없을 만큼의 들꽃” 다발을 안겼다. “꽃이라면 환장한다”는 김수미에게 그보다 큰 선물이 무엇이랴. 몇분쯤 나오는 욕쟁이 고깃집 주인 역이었고, 윤학렬 감독은 자유롭게 연기하라며 김수미에게 대본 한장 주지 않았다. 이날의 현장에 대해 김수미는 에세이집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에 이렇게 썼다. “목이 말라 고개 숙인 수국 같은 몸이 호수를 만나 금방 머리를 들고 꽃이 피었다. 내 안의 내가 살아나고 있었다. 조명, 카메라, 마이크, 스탭들, 엑스트라, 스탠바이 소리….” 대찬 여장부 김수미가 그를 사랑하던 대중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