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이다. 암에 걸려 죽은 아내(김호정)를 화장으로 떠나보내고, 그 와중에 눈앞에 아른거리는 젊은 여자 추은주(김규리)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중년 남자 오 상무(안성기)의 이야기다. 원작인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오 상무의 내면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면 영화 <화장>은 아내의 병간호를 비롯해 회사에서 추은주와 있었던 여러 에피소드들을 구체적으로 펼쳐놓는다. 삶과 죽음, 병과 젊음,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성에 대한 중년 남자의 호기심 등 여러 가치를 담아낸 작품이다.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 세 배우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오랜만에 만났다”며 스튜디오에 들어오자마자 안부부터 나눴다. 다음 장부터 세 배우의 <화장> 작업기가 펼쳐진다.
-이렇게 만난 건 얼마 만인가.
=안성기_1년하고도 좀 지났나.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처음 만났다. 오랜만에 모여 시선을 맞추고 포즈를 취하니 영화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김규리_오랜만에 개봉을 하니까 어렵다. 모든 걸 되살려야 하니까.
-<화장>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다.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
=안성기_감독님 영화는 8편째다(<십자매 선생>(1964),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2), <오염된 자식들>(1982),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취화선>(2001)에 출연한 바 있다).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늘 있었다.
김호정_연기한 지 24년쯤 됐는데 연극과 영화를 통틀어 100편이 안 된다. 영화감독이 100편이 넘는 작품을 찍었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이 대단한 일이다.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설렜던 것도 그래서다.
김규리_감독님의 99번째 작품이 <하류인생>(2004)이었다. 그 영화에 출연한 뒤로 10년이 지나 102번째 작품에 다시 참여하게 됐다. 또 불러주실 줄 몰랐다.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축하 공연에서 춤추는 걸 보시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출연 제안을 주셨다고 들었다.
-시나리오를 받기 전 김훈 작가의 원작 소설을 읽어본 적 있나.
=안성기_물론이다. 예전부터 워낙 좋아했던 단편소설이라 영화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바람이 이루어지니 좋았다.
김호정_안 읽어봤다. 제안을 받은 뒤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강렬했다. 촬영이 끝난 지금도 주변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극중 안성기씨가 맡은 오 상무는 삶에 찌든 중년 남자다. 병든 아내의 병간호를 하던 중, 회사 직원 추은주에게 마음이 흔들려 갈등한다. 소설은 오 상무의 독백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시나리오로 만난 오 상무는 어땠나.
=안성기_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오 상무와 같은 내적 갈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삶에 늘 있어왔던 것. 오 상무의 이야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이야기고.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오 상무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에 표현이 적나라한 부분들이 있었다. 그걸 감독님과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절제된 모습으로 조절했다. 절제된 감정이 더 많은 여운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됐을 때 등장하는 오 상무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삶에 찌든 표정이 최근 여러 영화에서 봐왔던 반듯한 얼굴과 무척 달랐다.
=안성기_첫 촬영이 굉장히 추워서 고생스러웠다. 내가 봐도 피곤하고 힘들어하는 표정이더라. (웃음)
-소설 <화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기암 환자인 아내는 ‘뼈와 가죽뿐인 여자’다. 8kg 정도 감량했다고 들었다.
=김호정_죽어가는, 진이 다 소진한 마른 가지 같은 느낌을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성기_호정씨가 말기암 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식단을 줄여가며 굉장히 노력했다. 촬영 현장의 케이터링은 푸짐했는데, 김호정씨는 집에서 준비해온 적은 양의 음식을 먹어야 해서 좀 미안했다.
김호정_고통과 죽음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걸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어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힘들었다. 반면, 촬영 들어가면서 준비하는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테스트 촬영부터 다 쏟아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찍었고, 한번에 수월하게 넘어갔다. 어렵고 예민한 장면은 안성기 선배님이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만들어 주셔서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었다.
안성기_김호정씨는 노력을 정말 많이 한다. 영화 메커니즘에 대해서 아직까지 낯설어하는 것이 있어 이런 장면은 어떻게 찍힐 거라고 말을 해주었던 게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김규리_김호정 선배님이 현장에 계시면 안정적이고 위로가 많이 된다. 촬영하다보면 작은 거 하나에 예민해지기도 하는데 선배님이 와서 ‘견뎌야 해’라고 말씀을 해주시면 날카로워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오 상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여자 추은주는 오 상무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캐릭터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규리_시나리오에서도, 원작에서도 추은주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추은주를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젊음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캐릭터로 생각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정말 중요한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에서는 추은주가 젊고, 밝고, 경쾌하고, 열심히 하려 노력하는 신입사원이다. 그같은 생기로 인해 오 상무가 흔들리게 된다. 반면, 오 상무의 상상 속 추은주는 현실의 그녀와 전혀 다른 여자가 된다.
-말씀대로 현실의 추은주와 오 상무의 상상 속 추은주는 각기 다른 모습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어떤 모습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게 모호해진다.
=김규리_실제로 촬영 중간부터는 각기 다른 두 모습이 섞여 어떤 게 현실이고 상상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쉽게 촬영할 수도 있었던 장면임에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어려웠다. 추은주는 젊고, 생기 있고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시기에 고민만 하고 있진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있다.
-촬영하기 전, 감독님께서 각각의 역할에 대해 주문하신 건 따로 없나.
=안성기_사전 준비는 배우에게 일임하시는 편이다. 구체적인 주문은 촬영 당일 아침이나 그 전날 얘기해주신다.
김호정_시나리오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바뀔지는 현장에 가봐야 안다.
-안성기씨는 43회차 전부 현장에 나와야 한 데다가 그간 맡았던 캐릭터와 달라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들었다.
=안성기_한 회차는 안 나와도 되는 거였는데 마침 현장에 갔다가 찍게 됐다. 전체 회차에 나온 건 처음이다. 보통 주연이라도 전체 회차의 70~80% 정도 나온다. 긴 호흡을 집중력 있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촬영 중 계속 오 상무의 내적 갈등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영화 찍을 땐 좀더 즐겁게 했지만, 이번 촬영은 분위기 자체가 가라앉아야 하니 현장이 재밌지는 않았다.
-김규리씨를 쳐다보는 장면을 찍을 때 쑥스러워서 불편했다고 들었다.
=안성기_최근 감정을 실은 채 여성을 바라보는 영화를 해보지 않아 굉장히 쑥스럽고 이상했다. <라디오 스타> <신의 한 수> 등 그간 해왔던 영화 대부분 남성들과 같이 한 작품이었으니까. 사랑 이야기도, 표현도, 그런 눈빛도 안 해봤는데, 여성들과 호흡을 맞춰 다시 하려니 힘들었다. 그런 눈빛이 좋았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김규리_좋았다. 매력적이셨다. (웃음)
안성기_나쁘게 말하면 지금까지 모든 것에 막을 쳐놓고 편하게 있었다. 본성적인 걸 끄집어내다보니 굉장히 힘들더라.
김호정_안성기 선배님과 함께 찍는 장면에서는 항상 내가 죽어가는 상황이라 배려를 많이 받았다. 선배님처럼 군자 같은 분은 처음 뵈었다.
-김규리씨는 자신을 쳐다보던 안성기 선배님의 눈빛이 부담스럽진 않던가.
=김규리_작품 안팎에서 선배님은 완벽한 남자셨다. 그 완벽할 것 같은 남자가 흔들리니까 오 상무가 매력적인 것이다. 첫 촬영을 가서 내가 뭘 해야 하지 한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회식 장면을 찍을 때, 모니터 앞에 앉아 안성기 선배님을 지켜봤는데 슛이 들어갈 때나 안 들어갈 때나 매력적이셨다. 이런 남자라면 중년이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 싶었다. 상사로서의 존경심과 연모를 추은주가 지닌 감정으로 가져갔다.
-오 상무의 상상 속 추은주는 오 상무와 함께 호흡하는 장면이 없다. 혼자서 연기해야 했던 까닭에 외롭진 않았나.
=김규리_영화를 찍으면서 선배님이 그러셨다. ‘나는 정신적으로 힘들고 너는 육체적으로 힘들구나.’ 하루는 스탭들이 내 목, 손목, 엉덩이만 찍고 있고. (웃음) 이 이미지를 자극적이지만 고급스럽고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니까. 어떻게 하면 상상 속의 추은주를 매력적이면서 육감적이지만 너무 드러내 보이지는 않게 할까 애를 많이 쓰셨다. 엉덩이만 찍는 날은 힙선을 살리기 위해 힐을 신고, 긴장감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그걸 장시간 동안 하니 3일 동안 허리를 제대로 못 폈고. 머리카락도 자연스럽게 휘날려야 하는데 바람을 직접 컨트롤할 수 없지 않나. 그런데도 내 탓을 하게 되더라.
-로케이션 촬영 비중이 컸던 임권택 감독의 전작과 달리 <화장>의 주요 공간은 병원, 사무실, 집안 등 실내 공간 위주다. 말기암 환자인 까닭에 분량 대부분 실내에서 찍어야 해서 갑갑하진 않았나.
=김호정_계속 누워 있어서 그렇게 갑갑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여유가 있지 않았다. 현장에서 웃지도 않았고.
-촬영을 하면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이 있다면 꼽아달라.
=안성기_오 상무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면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고, 그런 환경에 처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걸 감정대로 움직이지 않고 절제하면서 사랑을 지켜나간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
김호정_몸이 아픈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나? 영화를 찍는 순간 그런 것이 참 공감이 갔다. 아프면 무기력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도 미안하다. 그런 게 질투로 작용할 수도 있다.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김규리_회식 신을 찍는 안성기 선배님을 모니터로 지켜본 순간이다. 그 순간 추은주의 감정을 이해하게 됐다. 존경심도 사랑의 일종이다. 상사의 일에 대한 태도나 이런 것들을 배워야겠다는 존경심.
-<화장>을 찍은 지 햇수로 2년이 지났다. 되돌아보면 어떤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나.
=안성기_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여러 해외영화제에 참여해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국내 관객에겐 또 어떤 평가를 받을지 굉장히 궁금하다.
김호정_오랜만에 영화를 찍었다. 개인적으로 복잡미묘하게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 죽어가는 역할을 연기했지만 역설적으로 다시 살아갈 마음과 용기가 생겼다. 평생 남을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했다는 것도 소중하게 남을 것 같다.
김규리_임권택 감독님과 같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배우는 영광이다. 그것도 두번이나 함께하게 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안성기, 김호정 선배랑 언제 호흡을 맞춰보겠나. 정말 다 좋았는데 추은주 캐릭터가 두개라 나 또한 두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원래 나를 하나로 잘 붙잡고 가는 사람이었는데, 이 영화 이후 두 가지로 분리되어 아직까지도 방황하고 있다. 이게 김규리지 하는 모습만 붙들고 사는 것보단, 이렇게도 방황해보고 내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봉한 뒤 관객을 만나게 되겠지만, 그러는 와중에 나 역시 정신적으로 떠났던 긴 여행을 마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