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스페셜] 작별의 테크놀로지는 있는가?
2015-04-17
글 : 신형철
<이터널 선샤인>에서 <그녀>로 이어지는 한 가지 물음에 대하여
<이터널 선샤인>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다른 논점 ― 과학은 과학, 사랑은 사랑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넘긴 죄로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를 우리는 영웅적인 휴머니즘의 신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은 BC 5세기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이후 생겨나 괴테와 마르크스 등을 거치면서 강화된 이미지일 뿐이다. 비극의 시대보다 200년 정도 앞선 서사시의 시대를 호메로스와 함께 대표하는 시인 헤시오도스가 그의 <신통기>에서 프로메테우스를 묘사하는 시선은 꽤 냉랭해서 후대의 그것과 비교된다. 그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신과 인간의 평화적 공존 무드를 망가뜨린 교활한 사기꾼에 불과한데, 그의 비신사적인 불 도둑질에 격분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끼고 도는 인간들에게도 벌을 내리기로 결정했으니, 그 벌이란 그전까지 남자들만 존재했던 인간 세계에 최초의 여자인 ‘판도라’를 창조해 선물하는 것이었다. “즉 그녀로부터 인간에게 커다란 고통이자 아주 사악한 종족인 여자의 무리가 유래하는 것이다.”(<신통기>, 민음사, 68쪽) 요컨대 남자는 ‘불’을 얻는 대신 ‘여자’까지 얻고 말았다는 것. 그래서 헤시오도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헤시오도스의 여성혐오를 27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차별적 시선을 제거하고 이를 남녀 공통의 문제로 바꾸면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생기겠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을 문명의 동력인 과학기술로 폭넓게 이해하고, ‘판도라’를 남녀간 소통의 곤란을 은유하는 인물 정도로 추상화해보면 어떨까. 프로메테우스 때문에 ‘불’과 ‘여자’를 동시에 얻고 말았다는 헤시오도스의 불평을 현대적으로 구제하는 한 가지 방법은 ‘불과 여자’라는 구도를 ‘과학기술과 인간관계’라는 층위로 이동시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다. ‘문명을 건설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은 왜 타인과 관계 맺는 일에는 언제나 서투른가?’ 이로써 우리는 2700년 동안 이어져 온 ‘과학은 과학, 사랑은 사랑’이라는 골치 아픈 화두 앞에 도착했다. 이제 나는 10년의 격차를 두고 만들어진 두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과 <그녀>(2013)를 비교하고 싶어진다. 두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77회, 86회)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과학과 사랑’이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주제를 독창적으로 사유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모든 사랑이 두 번째 사랑인 이유 ― <이터널 선샤인>의 여전한 빛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은 서로에게 지칠 대로 지친 커플이다. 관계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어느 날 클레멘타인은 아픈 사랑의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라쿠나(Lacuna)사(社)를 찾아가 조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삭제해버린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조엘은 극도의 배신감 속에서 홧김에 같은 시술을 받기로 결심하는데, 수면 마취 시술의 와중에 그의 (무)의식 어느 부분이 깨어나 자신의 기억이 하나씩 단계적으로 지워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고, 조엘은 그제야 시술 결정을 후회하면서 행복한 기억만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하여 모든 것을 잊은 아침을 맞는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상대방을 모르는 두 사람이 마법처럼 재회하여 또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하게 된 것. 마침 그때 라쿠나사의 직원인 메리(커스틴 던스트)가 고객들에게 기억 삭제 시술 내막을 폭로하여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자신들이 이미 끔찍한 작별을 경험한 사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알게 된다. 충격, 혼란, 슬픔, 절망이 뒤엉킨 감정 속에서 그들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찰리 카우프먼(각본)과 미셸 공드리(연출)에 의해 만들어져 일찌감치 로맨스 장르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 아름다운 영화가 뿜어내는 빛(질문)은 지난 10년 동안 별로 흐려지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기술이 발명되면 우리가 사랑의 상처를 이겨내는 일은 쉬워질까?’ 이 영화는 말을 돌리지 않고 곧바로 조엘의 기억 삭제 현장으로 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막상 기억의 오디세이가 시작되자 조엘이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이 기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점이다. 지난 사랑이 남긴 기억들에 ‘기쁨’과 ‘아픔’이라는 라벨을 붙여 분류•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삿짐을 정리할 때에도 버릴 것과 챙길 것을 단호히 나누지 못하는데 마음의 이사에서 그 일이 쉬울 리 있을까. 두 감정은 자주 엉키거나 서로 자리를 바꾸며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조차 속는 동물이다(그러므로 기억 삭제 기계가 발명돼도 나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기계가 아니라 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결함이 역설적이게도 ‘과학적인 것’과 구별되는 ‘인간적인 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조엘의 뇌를 무대로 ‘지우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눈물겨운 결전이 벌어지는 동안, 라쿠나 회사 내부의 이야기도 나란히 진행된다. 동료와 연애 중인 메리는 회사의 경영자인 기혼자 하워드(톰 윌킨슨)에게 끌리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해 결국 고백을 하는데, 불행히도 그 현장을 목격한 하워드의 부인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네가 가져라. 이미 그랬듯이.” 그제야 메리는 자신이 과거 하워드에게 빠졌다가 그 사랑이 고통스러워 이미 기억 삭제 시술을 받은 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열매를 맺을 수 없어 가지를 잘랐지만 뿌리는 남아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더해, 조엘과 클레멘타인 역시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 이후에도 무의식적 인력(引力) 속에서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마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된다. 이렇게 두 서사가 비슷한 지점에 도달하면서 이 영화의 두 번째 질문이 또렷해진다.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보다시피 이 영화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특정한 대상에 끌리도록 돼 있는 마음의 기울기라는 것이 있어서 뇌를 아무리 헤집어도 그것을 바로잡기는 어렵다는 것. 다시, 과학은 과학, 사랑은 사랑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21),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적 문제는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다. 진상을 알게 된 메리가 비로소 깨닫게 된 것도 바로 그것이다. 반복된 두 번째 사랑 앞에서 그녀는 이번에는 기억을 지우지 않고 회사를 떠나는 쪽을 택한다. 그것은 ‘기계적’ 처방이 아니라 ‘인간적’ 결단이다. 그녀는 어쩌면 라쿠나 회사의 도움을 받은 모든 이들도 애초에 그랬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자신이 기억을 지웠다는 기억마저 잊은 이들에게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비밀리에 관리되어온 모든 고객 정보를 당사자들에게 발송한다. 이제 막 두 번째 사랑에 빠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메리 덕분에 그들이 한때 서로를 얼마나 경멸했던 사이인지를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알게 되고, 이 영화가 90분 동안 품고 있다가 꺼내놓은 결정적인 세 번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다시 서로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또 사랑을 시작해야 할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이 질문에 힘겹게 답하는 순간이다. 그들이 바로 “OK”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잠시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좋아졌다.

이 ‘OK’는 메리의 결단을 잇는, 보다 더 심오한 인간적 결단이다. 정말이지 달콤하기만 한 시간은 이내 끝나고 아프게 서로를 견뎌야 하는 날이 또 올 것이다. 뻔히 알면서 또 그 길을 가는 이들을 바보라고 말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기억 삭제 장면에서 조엘이 뒤늦게 애원해도 삭제는 중단되지 않았는데 그 시술의 논리가 ‘전부 아니면 전무’이기 때문이다. 아픔은 제거하고 기쁨만 남길 수는 없다는 뜻이고, 달리 말하면, 아픔이 두려우면 기쁨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택지는 둘이다. 아픔이 두려워 기쁨을 포기할 수도 있고, 아픔을 각오하고 기쁨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전자를 택하는 이들이 더 지혜로운 것인지는 몰라도, 후자를 선택하는 이들이 내게는 더 눈물겹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기묘한 상황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식탁에서 콩을 골라내듯 아픔만 골라낼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대상이 누구건 사랑에는 기쁨만이 아니라 아픔도 따르기 마련임을 안다. 그런 사람에게 사랑은 언제나 <이터널 선샤인>의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가 언제나 ‘OK’라고 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리석고 아름다운 대답이다. 다시 말해, ‘인간적’이다.

<그녀>

우리가 모두 OS(운영체제)인 이유 ― <그녀>의 깊은, 새롭지 않음

저명한 이의 인문학 강연을 TV로 보며 짐짓 고개를 끄덕이다가 방송이 끝나자마자 다 잊어버리고 다시 일상에 파묻힌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나의 고뇌를 아웃소싱하고 타인의 사유를 구경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닌가. 기본적인 지적 작업은 스마트한 기계들에 맡기고,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고민은 명사(名士)들에게 맡기면, 이제 남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을 느껴야 하는 번거로움을 처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영화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직업은 ‘편지 대필’인데, 업무상 필요한 편지 따위가 아니라 대개 사랑 고백과 감사 인사를 담은 것들이어서, 그의 일은 ‘당신의 감정을 대신 느껴드립니다’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결혼 50주년을 맞아 남편에게 사랑을 전하는 할머니의 편지를 대신 쓰며 테오도르가 짓는 진심어린 표정은 이 영화가 어떤 종류의 아이러니에 관심이 많은지를 보여준다. 곧 밝혀지지만 정작 테오도르 자신은 아내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데 그 사유가 다름 아니라 “감정을 숨기고 살아서 아내를 외롭게 만들었다”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아이러니를 더 확장하면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 외로워지는 현대인’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건져낼 수도 있으리라.

<이터널 선샤인>을 쓴 찰리 카우프먼의 각본으로 <존 말코비치 되기>(1999)를 만든 적이 있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그가 직접 쓴 이야기로 만든 이 영화 <그녀>에서 저 진부한 주제를 신선한 소재로 구원해냈다. 배경을 세팅하고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정확히 10분을 투자한 뒤 이 영화는 테오도르에게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힘입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제안한다. “인공지능 운영체제”(artificial intelligent operating system)인 그녀의 이름은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다. 육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이 신의 선물 같은 존재가 오로지 당신의 말에만 귀 기울이기 위해 거기 있다(이름의 어원을 확인해보면 ‘테오도르’는 ‘신의 선물’, ‘사만다’는 ‘듣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운영체제(OS)와의 사랑이라는, 아직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소재를 다룬 SF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운영체제의 개념을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녀>를 보고 이것이 내가 잘 아는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보편적인’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많은 로맨스영화가 대체로 그렇듯이, ‘있음’과 ‘없음’의 드라마라는 뜻이다.

사랑에 빠진 존재는 자신이 갖고 있는 (그러나 그런 줄 몰랐던) 것들을 감격적으로 실감하는 기쁨을 누리지만,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더 섬세하고 예민해진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기쁨의 순간이다. 사랑을 시작하면 다시 태어난다는 식의 말이 맞는다면 테오도르에 의해 사만다가 작동을 시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여러 인간적 감정들을 습득하면서 날로 진화해나간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경험을 통해 커지는 내 능력이야. 기본적으로 매 순간 나는 진화해, 너처럼.” 둘이 일종의 원격 음성 섹스를 한 날을 전후로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품기 시작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도 이제 자신의 결여를 강하게 인식하는 때가 올 것인데, 테오도르가 전처와 만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감정적 혼란에 빠지는 시기가 그때다. 사랑하는 남자가 나로 인해 전처를 잊을 수 있을 만큼 가장 완벽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때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그녀에게 육체가 없다는 결여를 가장 강렬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그녀가 대리섹스파트너를 고용하여 상황을 악화시키는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자신이 부족하다 느낄 때 오히려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마는 한 사례를 안쓰럽게 지켜보게 된다.

두 존재의 무게가 양 끝에 놓여 있는 저울이 평화로운 평형을 유지하는 바람직한 상황은 그리 흔하지 않다. 세상의 많은 저울들은 대체로 기울어져 있다. 그리고 이 관계의 저울도 지금까지는 테오도르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러나 자주 그렇듯 이 관계는 이내 역전될 것이다. 비평형적 관계 속에서 자존감을 잃어가던 존재가, 바닥을 치는 어떤 경험과 더불어, 자신의 없음을 무슨 결함이 아니라 개성으로 긍정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만다에게 그 일은 자신이 ‘육체가 결여된’ 존재라는 생각에서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으로 옮겨가며 일어난다. 운영체제에게만 주어지는 가능성들에 몰두하느라 그녀는 바빠지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찾아 헤매며 거리를 달리는 장면은 그 역전 과정의 상징적 절정이다(여기서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테오도르의 모습(1:44:25~)은 그가 사만다와의 관계 초기에 행복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장면(47:07~)과 대조를 이룬다). 다시 나타난 사만다는 어딘가 다른 존재가 돼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결여와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테오도르를 떠날 것이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존재하더라. 당신이라는 책 속에서만 살 수는 없어.”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가. ‘사랑에 빠지면서 새롭게 태어났지만 자신의 결여 때문에 온전히 당당할 수 없었던 한 존재가 자신의 결여와 화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게 되자 더 넓은 세계를 만나 마침내 그곳으로 갔다.’ 이것은 사랑의 서사가 성장의 서사로 오버랩되는 전형적인 사례다(당신을 떠난 그 사람도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떠나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운영체제가 인간을 닮았다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이 본래 운영체제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사만다의 입장에서 정리한 서사이니까 공평을 기하자면 졸지에 버림받은 가여운 테오도르의 입장에서도 말해야 한다. 그러나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연애도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방적이지 않다. 성장하면서 떠나가는 사람이 있고, 떠나보내면서 성장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상황인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별이 다른 이별로 완성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기 때문에, 테오도르도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한다. 사만다에게 육체가 없었으므로 그는 서로의 감정에 더 섬세해져야만 했는데, 그 덕분에 뒤늦게 감정 교류와 관련된 아내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영화 말미에 아내에게 비로소 성숙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님아, 그 기술에 기대지 마오

위 두 영화가 독창적인 이유는, 아니 어쩌면 모든 독창적인 영화들이 진정으로 독창적인 이유는, 새로운 것 속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볼 줄 아는 아이다운 호기심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것 속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지혜로운 신중함 또한 갖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기억 삭제 기술이 발명되거나 맞춤형 운영체제와의 연애가 상용화되면 우리의 사랑은 좀더 쉬워질까?(두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모두 바로 직전의 사랑과 작별하는 과정에서 저 기술들에 기댄 것이니까 다음처럼 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별의 테크놀로지는 있는가?’) 적어도 이 영화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친밀성의 관계를 맺어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아픔을 그 무슨 과학기술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없을 것이며), 인간적 문제는 결국 인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결론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하얀 눈밭을 달릴 때, 또 테오도르가 그의 이성 친구에게 어깨를 빌려주며 나란히 앉아 있을 때, 그다지 힘을 준 것 같지 않은 이 마지막 풍경들이 미묘하게 우리를 뭉클하게 하는 것은 그것들이 (연약함과 강인함 두 측면 모두에서) 오로지 인간만의, 인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인’ 풍경을 어느 영화에서 발견했다.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는 70년을 함께 산 노부부의 마지막 나날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건넨다. ‘긴 인생을 함께해 온 단 하나의 친구를 먼저 떠나보낸다는 것은 어떤 일이며 그 일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이 질문 속에서 나는 이 부부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행복한 시간을 보여주는 초반 30분을 부러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아픔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후반 30분에서, 나는 이 부부를 간절히 부러워했다. 이 영화에는 그 어떤 근미래의 테크놀로지(기술)도 등장하지 않지만, 대한민국 강원도에 사는 이 노부부야말로 세상 그 누구보다 작별의 테크놀로지(기예)를 잘 알고 있는 이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작별은, 서로에게 어떠한 원망도 회한도 남아 있지 않은 삶에서만 가능한 작별, 한 생을 바쳐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작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별은 그들이 함께 보낸 지난 70년의 삶이 그들에게 준 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왜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살아온 삶이 살아갈 삶을 축복할 테니, 훗날 필요한 작별의 테크놀로지는 지금 이 최선의 나날들에서 주어질 것이다.

부기

1995년 이래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영화라는 불을 건네준 대가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이 쪼이는 형벌을 당한 <씨네21>의 그 모든 필진 여러분들에게 나는 지금 머리를 숙인다. 지난 20년에 큰 빚을 졌으므로, <씨네21> 1천호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이미 끝난 연재에 변변찮은 글 하나를 보탰다. <씨네21>이 걸어온 길이 걸어갈 길을 지켜줄 것임을 단호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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