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리가 잘 아는 사람 같은 동시에 그 모든 패턴을 비껴가는
2015-04-21
진행 : 주성철
진행 : 김성훈
진행 : 윤혜지
사진 : 오계옥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한재림이 송강호를 만나다

<씨네21> 창간 20주년, 대망의 1000호를 맞아 배우 송강호 별책부록을 마련했다. 송강호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한 것이 바로 1995년 가을, 그 또한 연기 인생 20년을 맞이한 셈이다. 이후 그가 수많은 영화를 거쳐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무어라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없다. 한국영화와 <씨네21>의 지난 20년을 말할 때, 과연 송강호를 빼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농담 섞어 1000호에 등장한 그를 <씨네21>의 아바타로 생각해주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와 두편 이상 함께한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한재림 감독이 인터뷰어로 나서주었다. 특히 현재 차기작 준비를 위해 미국 체류 중인 봉준호 감독은 콜로라도 덴버에서 스카이프 화상통화로 참여하여 꽤 글로벌한 좌담이 이뤄졌다. 이들과 함께한 송강호의 영화들만 모아도 한국영화의 20년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진한 우정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다.

<씨네21>_<씨네21> 창간 20주년을 맞아 뭔가 특별한 걸 준비해보고 싶었는데, 배우 송강호가 바로 1995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하며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가 여기 모인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한재림 감독과 함께해온 20년은 그 자체로 한국영화의 지난 20년과도 같다. 그래서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기사를 모아 별책부록을 제작하면서 특별히 오늘의 인터뷰를 마련하게 됐다.

송강호_이렇게 나와 두편 이상을 함께한 감독님들이 나와주어 정말 감사하다.

한재림_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님과는 3편씩 함께했고, 내가 턱걸이했다.

김지운_나는 단편 <사랑의 힘>까지 합치면 네편이다. (웃음)

박찬욱_나도 <친절한 금자씨> 특별출연을 합치면 네편이 되네. 동생 박찬경과 공동 연출한 <청출어람>까지 하면 다섯편인가. (웃음)

배우 송강호.

첫 만남은 어땠습니까

<씨네21>_먼저 여러분의 첫 만남이 궁금하다. 먼저 한재림 감독은 다른 감독들과 달리 송강호라는 배우가 어떤 ‘완전체’가 된 이후 후배감독으로 만난 경우다.

한재림_<초록물고기>(1997)와 <넘버.3>(1997)를 보며 충격받은 게 대학생일 때다. 이후 여기 계신 선배님들과 <반칙왕>(2000), <공동경비구역 JSA>(2000), <살인의 추억>(2003)을 함께하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내가 <연애의 목적>(2005)으로 데뷔할 때 송강호 선배는 <괴물>(2006)을 찍고 있었다. 내 또래 감독이라면 누구나 강호 선배와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 그래서 <괴물> 쫑파티까지 쫓아갔던 기억이 난다. <괴물> 출연 때문에 머리를 살짝 노랗게 염색한 강호 선배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데, 정말 그 어떤 여배우와 인사할 때보다 더 긴장됐다. (웃음) 악수를 하면서 “송강호입니다” 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키가 컸고 순간 압도당하는 느낌이 있었다. <연애의 목적>을 못 봤다고 해서 DVD를 전하고 준비하던 <우아한 세계>(2006)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한 남자가 있는데 조폭이고,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버벅댔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뒤 만났는데 불쑥 이런 질문을 하는 거다. “이 영화의 인문학적 의미가 뭡니까”라고.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송강호_에이, 진짜?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웃음)

한재림_순간 다급해서 이렇게 저렇게 막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 거고, 하여간 막 되는 대로 둘러대고 있는데 술을 한잔 권하면서 한마디 하셨다. “같이 하죠.” 사실 시나리오도 없을 때였는데, 뭘 믿고 같이 하기로 했는지 너무 고마웠다.

김지운_한 감독 간을 본 것 아닐까? 말론 브랜도 같은 배우는 괜찮은 감독이면 연기를 제대로 하고 좀 별로인 감독이면 퇴짜를 놓기 위해 일부러 잘못된 연기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 그걸 감독이 캐치하면 제대로 된 감독이고, 아니면 그다음부턴 그냥 마음대로 했다고. 혹시 강호씨도 그런? (웃음)

송강호_아유, 절대 아니다. 내 경우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어도 감독과 얘기했을 때 갖게 되는 어떤 신뢰가 있다. 여기 계신 감독님들은 모두 그런 경우였다. 상대방의 화술의 문제가 아니라 만들고자 하는 작품의 어떤 ‘본질’은 배우로서 바로 알게 된다. <연애의 목적>은 그런 확신을 갖게 하는 작품이었다. <변호인>(2013)도 몇번 거절했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잔상이 남아 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양우석 감독을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하며 숙성시켜온 작품이라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인간 노무현의 드라마틱한 삶 자체를 극화하고 싶어서 수집한 자료들이 정말 방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관심을 갖고 출발한 게 아니었다. 그 관점의 순수성이 내겐 결정적인 선택의 이유였다.

<씨네21>_<반칙왕>은 배우 송강호의 첫 번째 원톱 주연작이다. 앞서 <초록물고기>와 <넘버.3>로 화제가 되긴 했지만 굉장히 모험적인 시도였다.

송강호_그때 주변의 반대가 엄청났다. (웃음)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연기톤 등 <쉬리>에 잘 융합하지 못하면서 충무로에서 송강호라는 배우의 호환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영화사의 반대가 섭섭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김 감독님도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아주 없으셨던 것 같지는 않고. (웃음)

김지운_음, 그렇지, 검증 안 된 배우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어떻게 보면 나도 그땐 좀 순수했던 것 같다. 산업적인 시스템이나 역학구도 혹은 흥행성에 대해 고려하던 때가 아니라 그저 내가 애초에 원하는 그림이 중요했으니까. 모든 걸 영화적으로만 생각하던, 그러고 보니 내가 그런 때가 있었구나. (웃음) 흥행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한석규, 박신양 같은 배우를 떠올리는 게 맞는데 내가 생각할 때 <반칙왕>을 내 의도대로, 가장 재밌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송강호뿐이었다. 그리고 또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강호씨한테 ‘감독님 뭐하세요?’ 하는 안부 전화가 수시로 왔다. (일동 웃음) 어쨌거나 하도 반대가 극심하니까 진짜 한석규나 박신양이 출연하면 흥행이 잘될까 솔직히 고민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칙왕>에 맞는 배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송강호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시 강호씨 집들이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집들이에 가서 그렇게 많이 먹고 돌아오진 않았겠지. (웃음)

송강호_그때 얘기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 (일동 웃음)

김지운_어쩌다 TV에서 <반칙왕>을 해주면 ‘진짜 독하게 했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나도 강호씨도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진짜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정두홍 무술감독도 팔팔하던 시절이라 엄청나게 굴리기도 했다. 심지어 박상면씨는 팔굽혀펴기하다가 오바이트까지 했으니까. (웃음) 강호씨는 그때 정말 프로들도 가끔씩 구사하는 기술까지 연마했다. 야, 저 배우 진짜 목숨 걸고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송강호_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냐만 누군가 가장 힘들었던 영화를 묻는다면 단연 <반칙왕>이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반칙왕>은 힘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외로웠던 영화다. 그런 주변의 시선들을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던 것 같다. 그렇게 70% 정도 촬영하고 나니까 굉장히 편해지더라. 그전까지는 조바심이 컸는데 이대로 영화를 그만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아지경의 상태가 됐다.

한재림 감독과 송강호(왼쪽부터).

“연기를 참 꺼림칙하게 한다는 느낌”

봉준호_정말 나도 저기 끼어서 낮술하며 인터뷰하고 싶은데, 접속이 불안한지 주고받는 얘기들이 들리다 말다 해서 답답하다. (웃음) 나는 송강호 선배를 처음 만난 게 2000년 ‘디렉터스 컷’ 행사 때였다. <플란다스의 개>(2000)를 만들고 쫄딱 망한 뒤라 약간 쑥스러웠지만 행사 주최자나 다름없는 이현승 감독님이 신인감독들 모두 모였으면 좋겠다고 해서 참석했다. 그때만 해도 강호 선배는 봄의 <반칙왕>, 가을의 <공동경비구역 JSA>로 시상식을 휩쓸던 때였다. 그때 행사장 계단에서 처음 마주쳤다. 강호 선배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나를 딱 보더니 (목소리 흉내내며) “어 봉준호씨!” (일동 웃음)

송강호_어, 나도 기억난다 그때. (웃음) 정말 이뤄질 인연이라는 게 그 전날 <플란다스의 개>를 봤었다.

봉준호_그때 “영화 너무 잘 봤어요, 깔깔거리며 웃었어”라고 해주시니까 너무 가슴이 뛰었다. <플란다스의 개>의 흥행 참패로 구천을 떠돌고 있었고(웃음), 정말 밥만 먹고 가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반겨주시니까. 게다가 <살인의 추억> 원작인 희곡 <날 보러 와요>를 영화화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내심 송강호 선배가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화성에 가서 자료를 조사할 때 그를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기도 했고, <날 보러 와요>를 초연한 연우무대 출신이니까 작품에 대한 이해도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아직 정식으로 얘기하진 못한 때였으니 먼저 그렇게 반겨줘서 감격적이었다. 일단 내 영화를 봤다는 것부터 놀랍고. 게다가 <플란다스의 개>가 빠른 속도로 극장 간판을 내리며 망한 데는 2주 앞서 개봉한 <반칙왕>의 흥행 후폭풍도 있었으니까. (웃음)

송강호_원래 비디오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이상하게 그 전날 밤에는 너무 심심해서 진짜 비디오숍에 혼자 비디오를 대여하러 가서 집어든 영화가 <플란다스의 개>였다. 거짓말 아니고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다가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굴렀다. 김뢰하 선배가 냄비 안의 국을 다 먹고 변희봉 선생님이 나중에 와서 솥뚜껑을 딱 여는 장면이었나, 그때 정말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니, 이런 영화가 왜 망했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봉준호 감독과 딱 마주친 거다. 만나자마자 어제 본 얘기를 막 떠들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솔직히 그날 느낌만으로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나한테 준 건지 이제야 묻고 싶다. (웃음)

봉준호 감독.

봉준호_생각해보니 송강호라는 배우를 처음 만난 것은 <모텔 선인장>(1997) 조감독 할 때였다. 싸이더스 전신인 우노필름에 강호 선배가 온 적 있다.

송강호_맞다, 그때 장준환 감독하고 같이 우연히 만났었다.

봉준호_“<초록물고기>, 잘 봤습니다, 선배님” 그러면서 셋이 앉아 얘기를 나눈 적 있다. 내겐 그때 기억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런 만남이 쌓이고 쌓이면서 어떤 확신으로 바뀌며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건네지 않았을까.

송강호_그러게, 내 영화를 알아준 배우를 만난 기쁨과 반가움이 <살인의 추억>으로 이어지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그렇죠, 감독님?

박찬욱_(불쑥 첫마디) 강요하지 마. (일동 웃음)

김지운_원래 강호씨가 의심이 많다. 작품 들어갈 때마다 왜 자신을 캐스팅했는지 정말 집요하게 물어본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와는 <조용한 가족>(1988)으로 거의 같은 신인의 느낌으로 만난, 어떻게 보면 둘 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만난 것이어서 그 동지적인 신뢰가 단단했던 것 같다. 그전에 송강호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연극 <비언소>였다. 누군지 전혀 모르고 연극을 본 것이었는데 꽤 인상적이었다. 뭐라고 표현할까, 음… 연기를 참 꺼림칙하게 한다는 느낌? 하여간 되게 꺼림칙했다. (웃음)

송강호_그 표현이 정말 절묘한 것 같다. 바로 이해가 된다. (웃음)

김지운_<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봤을 때도, 그땐 <비언소>의 그 배우인지도 모르고 본 건데 역시 꺼림칙했다. 사실 영화에서 더 꺼림칙했지. (일동 웃음) 영화에서 작가들이 효섭(김의성)을 따돌리고 모임을 갖는데 “넌 연락 못 받았어?” 그러니까 얼마나 싫겠나. <초록물고기>도 그렇지만 영화 속 주인공 입장에서 볼 때는, 하여간 정말 꺼림칙한 인물을 너무 잘 표현했다. <반칙왕>은 그걸 좀 역으로 이용해보고 싶은 영화였고, 하여간 <반칙왕>까지 함께한 다음 우연히 홍대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난 적 있는데 내게 “송강호 어때요?” 하고 묻더라. 그때 한창 <공동경비구역 JSA>를 준비하던 때였는데 “되게 좋아요, 너무 좋죠” 그랬다. 어쨌거나 당시로서는 그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코미디가 강한 작품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극장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쩜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저렇게 또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건지, 한 배우의 유머라는 것이 정말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그때 그의 얼굴에서 진정 ‘페이소스’라는 걸 느꼈던 것 같다.

박찬욱_김지운 감독과 주고받은 대화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건 <반칙왕>이 개봉하기 전이었던 건 맞다. 그가 <반칙왕>에서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으니까. 그러다 나중에 <반칙왕>을 보고는 너무 좋더라. 난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중 하나가 <반칙왕>이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한국영화의 웃음과 정서가 거기 있었다.

송강호_맞다, 늘 그렇게 얘기했다. (웃음)

김지운 감독.

<공동경비구역 JSA>는 안 할 뻔했던…

박찬욱_강호씨와 처음 만난 건 당시 명필름이 혜화동의 한 한옥에 자리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 미팅 후 근처에 밥을 먹으러 갔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송강호_내게는 그전에 조금 민망한 기억이 하나 있다. 그전에 <공동경비구역 JSA>가 완전히 초기 단계일 때, 나는 한번도 박찬욱 감독님을 본 적 없으니 연말 디렉터스 컷 시상식에서 <유령>(1999)의 민병천 감독을 박 감독님으로 오해하고는 90도로 인사한 적 있다. 당시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워하던 민병천 감독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다음 자리에 돌아와서 1시간쯤 뒤에 그가 아니란 걸 알고는 얼마나 죄송하던지. (웃음)

박찬욱_하여간 <공동경비구역 JSA>는 강호씨가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해서 나를 좀 힘들게 했다. (웃음)

송강호_맞다, 한번 거절한 기억이 있다. 나로서는 좀 중요한 이유로 어렵사리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명필름 이은 대표가 다시 전화를 해서 마음을 바꿨다. 일이 되려는 모양이었는지 번복했던 걸 한참 후회하고 있을 때 딱 전화를 주셨다. (웃음) 만나서는 다시 하겠다고 했다. 바로 그 후회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바로 김지운 감독과 최민식 선배였다. 다들 기억할까 모르겠다. <반칙왕> 막바지 촬영 때 <공동경비구역 JSA> 출연을 번복한 것이었는데, 그때 레슬링 장면 촬영하다가 쉬는 시간에 나한테 “어떻게 하기로 했어?” 슥 물으셨는데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니 왜?”라며 뭐라고 또 혼자 구시렁대시더라. 그전에 최민식 선배도 내게 전화해서는 “왜 그 좋은 작품을 안 하느냐”며 내가 잘못한 이유를 쭉 말씀하셨다. 나중에는 ‘아니, 내가 하기 싫다는데 왜 그러시나’ 하는 심정이 살짝 들기도 했다. 한참 얘기하다가 민식 선배가 “그래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얘기를 김 감독님에게 했더니 대뜸 “민식 형 말이 다 맞네” 그러셨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경솔해서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그 두 사람과의 대화가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박찬욱_나로서는 너무 잘된 일이었다. 북한군 오 중사 역할을 그가 해주길 바랐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디렉터스 컷 시상식이 아니라(웃음) 명필름 한옥 복도에서 그를 처음 마주친 건데,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니까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배우한테 그런 인사는 처음 받아봤던 것 같다. 농담처럼 하는 얘기지만 그것이 꽤 인상적이었던 이유가, 나는 전작 두편을 다 말아먹은 감독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이 나를 업신여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정말 컸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인사를 하니까 굉장히 큰 힘이 됐다. 그렇게 고마움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상태로 처음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때부터 <박쥐>(2009)에 이르기까지 그와의 작업은 언제나 술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웃음)

한재림_송강호 선배는 감독들에게 정말 잘한다. <괴물> 쫑파티 말고도 <살인의 추억>을 함께한 박해일을 통해서 오다가다 인사드렸던 것 같은데, 임필성 감독과 친하니까 <남극일기>(2005) 기술시사회 때 박해일과 함께 놀러간 적 있다. 코엑스 메가박스 지하주차장 나오는 길에 선배님을 뵈었는데 너무 잘해주시는 거다. 아직 내 영화를 못 봐서 너무 미안하다며.

박찬욱_그거 맨날 하는 말이야. (일동 웃음)

김지운_그 얘기 들으니 <반칙왕>을 함께했던 고 장진영이 출연한 <싸이렌>(2000) 때가 생각난다. 영화도 안 보고 시사회 뒤풀이를 갔었지 아마? (웃음) 진영이가 “오빠, 영화 어땠어요?” 그러니까 송강호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야, 불 잘 나더라” 그랬었다. (일동 웃음)

송강호_사실 진영이 때문에 축하하러 그 자리에 간 건데 주인공이었던 신현준, 정준호씨가 영화 어떠냐고 해서 정말 재밌게 잘 봤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그때 (신)하균이도 같이 있었는데 영화 안 본 게 들킬까봐 중간에 빠져나왔었다. (웃음)

한재림_아무튼 그때 코엑스 지하주차장에서 친절하게 해준 것 때문에 나중에 <우아한 세계> 시나리오를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았나 싶다.

박찬욱_배우로서의 영업 아닐까, 언제 어떤 시나리오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웃음)

송강호_아니, 난 평소에 배우들에게도 똑같이 대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랄까. (웃음)

<씨네21>_<반칙왕> 이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으로 다시 만나기까지 <장화, 홍련>(2003) 등을 만들었던 김지운 감독 외에 박찬욱, 봉준호, 한재림 감독은 그와 연달아 두 작품을 함께했다. 보통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다음 작품 구상도 대략 떠올린다고 보면, 송강호라는 배우에게 어떤 확신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감독이라면 전작의 확장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지점으로의 이행, 그 모두를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박찬욱_나는 술 마신 기억밖에 안 난다. 늘 지방 촬영을 다녔으니 여관방에서 술 마시고 개봉할 때도 무대인사 다니면서 술 마시고, <복수는 나의 것>(2002)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작품세계가 아닌 술자리의 연장이랄까. 하지만 세번이나 거절당했다. (웃음)

송강호_맞다, 세번이나 거절해서 다른 배우에게 갈 뻔했다가, 다시 내가 한다고 해서 그 배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했던 기억이 난다.

한재림 감독.

송강호를 두번 연달아 캐스팅한 이유

박찬욱_종종 캐스팅 문제로 곤란을 겪는 후배감독들이 나더러 “감독님은 이런 마음 모르시죠?” 그러는데, 그럴 때마다 항상 예를 드는 게 송강호다. (웃음)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했는데.

송강호_<공동경비구역 JSA>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나서 <복수는 나의 것>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드디어 이 감독의 숨겨진 발톱이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대단하고도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난 인연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바로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그러던 중 하균에게 전화했더니 “하기로 했어요” 그러는 거다. 그래서 “그래, 너라도 해, 역시 멋져” 하고는 나는 거절했다. (일동 웃음)

김지운_나한테는 하균이가 <복수는 나의 것> 출연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하며 “미친놈 아니에요?”라고 했었다. (일동 웃음) 어떻게 그런 영화를 할 수 있냐며.

송강호_음, 가만히 듣고 있으니 기억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일동 웃음) 아무튼 망설이는 그 과정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과연 나는 지금 어떤 영화를 기다리고 있나?’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그냥 그와 같은 영화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배우로서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복수는 나의 것>을 거절한 이유와 결국 하게 된 이유는 결과적으로 같았다. 배우라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거다.

박찬욱_<복수는 나의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 중에 얘기한 건가?

송강호_<공동경비구역 JSA> 촬영하며 <박쥐> 얘기까지 나눴으니, 그때 감독님과 얘기했던 두편을 결국 다 한 셈이다.

박찬욱_밤새 촬영하고 아침 겸 한잔할 때, 그런 얘기들을 나눴다.

송강호_그때 정말 최고였다. 술맛도 좋고 작품 얘기도 잘 통하고.

김지운_(스카이프상의 봉준호 감독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난 전혀 모르는 세계다. 모닝커피면 몰라도. (웃음)

박찬욱_그렇게 한잔하고 푹 자면 좋은데, 문제는 점심때까지 그러고 있는 경우가…. (일동 웃음)

송강호_맞다, 대낮에 얼굴 벌게져서 숙소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박찬욱_그때 끝까지 남아 있던 멤버들이 신하균, 송종희 등이었다. 그러고보니 술자리에 국군은 없었다. 다 북한군들이었다. (웃음) 어쩌다보니 <복수는 나의 것>은 전작의 북한군들만 데리고 찍게 된 건데, 강호씨가 에둘러 포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사실상 영화가 엎어질 것 같으니까 불쌍해서 출연해준 것 같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껏 영화 찍으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령 송강호가 물수제비 뜨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학생 단편영화 찍는 것처럼 소규모 스탭들만 데리고 촬영을 진행했다. 그날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쫓기는 일정도 아니라 여유롭게 찍고 있었는데,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오랫동안 어두운 커리어를 지나 이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과 내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고 있다는 생각에 그때만큼 행복했던 날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봉 결과는…. (일동 웃음) 강호씨가 자장면 얘기 좀 해줘. (웃음)

송강호_<공동경비구역 JSA> 시사회가 끝나고는 CJ엔터테인먼트 분들과 함께 대형 한옥의 최고급 한식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불과 1년 뒤 명동 중앙극장에서 <복수는 나의 것> 시사회를 가진 뒤에는 근처 지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직원들이 미지근한 맥주 몇병을 시켜주고는 그냥 가버렸다. (웃음) 그런데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렇게 만족스럽고 희열에 가득 찬 박찬욱 감독의 얼굴을 그전까지 본 적이 없었다는 거다. 그 미지근한 맥주를 들이켜면서 말이다. 그런 다음 중국집을 나와 근처 선술집에서 우리끼리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중간에 집에 갔는데,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박 감독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박찬욱_뭐, 나는 영화 흥행이 실패한 적이 많아서 괜찮았는데 강호씨는 그런 경험이 낯설어서 그랬을 것이다. (웃음)

<씨네21>_<반칙왕>은 프랜차이즈 시리즈도 가능한 작품이라, 그 두 번째 만남이 가장 빠를 것으로 보였던 사람은 바로 김지운이다. 하지만 가장 늦었다.

김지운_내가 워낙 장르적으로 옮겨다니는 걸 좋아해서 송강호라는 배우를 떠나 다른 장르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 <반칙왕>의 성공에 힘입어 강호씨가 초능력자로 나오는 영화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귀찮아서 어딘가에 가기 싫은데 몸은 이미 거기 가 있거나, 염력으로 잔을 띄워 친구들에게 보여주려 했는데 주방에 있는 잔들이 애꿎게 우르르 쏟아진다든지, 하여간 자신의 능력을 잘 통제하지 못해서 수시로 삑사리를 내는 초능력자 캐릭터였다. (웃음)

봉준호_<괴물>은 처음부터 변희봉 선생님, 송강호 선배, 박해일, 그렇게 가족을 정해 두고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말씀드렸다. 다들 좋다고 하셨기에 시나리오 단계부터 즐겁게 시작했던 작품이다. 그런데 당시 액션도 많고 프로덕션 자체가 고돼 힘드셨을 거다.

송강호_<괴물>을 촬영하던 2005년이 나에게는 삼재의 해였다. 지난 20년 배우 인생을 되돌아보면 최악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괴물> 촬영을 다 끝내고 가족들과 캐나다에 가서 홀연히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렇게 돌아와 <우아한 세계>를 준비했다.

봉준호_어쨌거나 강호 선배에게 가장 고마운 건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그냥 ‘배우 송강호’ 그 자체라는 점이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배우 송강호에게 눈곱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삼재의 해였다고 하지만, 촬영장의 그 누구도 그가 예전과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박찬욱 감독.

제작비와 관련해 송강호가 했던 말은…

김지운_평소 송강호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촬영하다가 내가 “컷” 하면 순간적으로 자기가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아, 좋아, 오케이!” 하고 외칠 때가 있다. 배우가 그렇게 오케이라 그러면 나는 종종 어떡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웃음) 감독으로서는 한번 더 가고 싶을 때도 있는데, 아무튼 이런 자리를 빌려서 묻고 싶다. 자기가 느낌이 딱 찰 때가 있는지.

송강호_하하하, 그건 약간 버릇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마음에 안 드는데 오케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감독님이 한번 더 가자고 하는데 “이걸로 됐습니다”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습관인 것 같다.

박찬욱_그런데 사실 배우가 그렇게 하면 한번 더 가자는 말이 쉽게 안 나온다. 왠지 배우의 기분을 짓밟는 것 같아서 용기가 필요하다. (웃음) 문득 <변호인> 현장에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공산주의를 옹호한다는 주장을 영국 정부의 공식답변으로 반박하는 그 유명한 2차 공판 장면이었는데, 스테디캠으로 한번에 논스톱으로 촬영했다. 그러다보니 감독도 세트 안에 숨어 있을 수 없어서 바깥에 나와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접촉이 좋지 않아서 스테디캠 영상신호가 모니터로 안 온 거다. 감독은 소리만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장면이 오케이인지 아닌지는 찍은 걸 재생해봐야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강호씨가 언제나처럼 ‘오케이!’ 하고 나온 거다. 그런 순간을 신인감독이 어떻게 대처하나 유심히 지켜봤는데, 양우석 감독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제가 지금 잘 못 봐서…” 그러는 거다. 웬만한 신인감독이라면 ‘네’ 그러고 넘어가기 쉬운데 한번 더 부탁한 거고, 송강호 역시 그 힘든 장면을 마찬가지로 또 해냈다. 둘 다 대단한 거지.

한재림_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감독으로서는 배우가 ‘오케이’해서 마음에 드는 장면을 알고 있는 게 편할 때가 있다. ‘한번만 더’ 부탁하면 당연히 또 해주니까.

박찬욱_송강호는 신인감독과도 여러 편을 했는데 그만큼 편한 선배 같은 배우가 없다. 가령 임필성 감독 얘기를 들어보면 <남극일기> 같은 어렵고 고된 영화를 할 때도 끝까지 감독 편이었던 배우다.

한재림_강호 선배의 멋진 말씀 중에 이런 게 있다. 제작비 때문에 제작사와 씨름하는 감독을 거들며, “대표님, 백원 투자해서 천원 벌 생각하지 마시고, 천원 투자해서 만원 벌 생각을 하세요”라고. (웃음)

송강호_감독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웃음) <남극일기>의 한 대사를 녹음실에서 수도 없이 외친 기억이 난다. 나로서는 한번을 하건 백번을 하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도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단 한순간을 뽑아내려는 임필성 감독의 집요함이 좋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일동 웃음)

봉준호_<살인의 추억>을 촬영할 때는 배우 송강호에 대해 잘 몰랐으니 ‘오케이!’라고 했을 때, 그때만 해도 내가 3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감독이라 “저기 형님, 제가 컷 할 때 오케이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일동 ‘오 마이 갓’) 그랬더니 강호 선배가 그날 저녁에 “그건 그냥 연기에 집중하다 보니 순간 전기가 쫙 와서 오케이라고 외치는 거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라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셨다.

송강호_하하하,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얘기를 나눴다고?

봉준호_뉴욕에 있다가 콜로라도 덴버 고산지대로 와서 조금 전까지 산소부족으로 어질어질했는데, 이제야 좀 정신이 든다. (웃음)

한재림_<우아한 세계> 때 놀라웠던 건 매 테이크 다 다르게 연기하시는 거다. 나로서는 강호 선배와 처음 작업해보는 거니까 이게 배우의 습관인지, 의식적인 건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장에 놀러온 봉준호 감독님이 그러시는 거다. “강호 선배가 다 다르게 하죠? 나중에 편집실에서 보면 다 붙어요.” 순간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봉준호_심지어 몇 번째 컷이 가장 좋다고 추천도 해준다. (웃음)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는지 정말 대단하다. <살인의 추억> 때는 편집실에 참 많이도 오셨다.

한재림_<우아한 세계> 편집 때는 안 오셨다. 내심 기다렸는데.

송강호_그땐 다른 영화를 찍고 있어서 그랬고, <살인의 추억>은 끝나고 술 한잔하는 맛으로 편집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런데 봉 감독님이 티는 안 내는데 좀 힘들어했다. 왠지 내가 안 왔으면 좋겠다는 인상이었는데, 그런 인상을 받고도 계속 갔다. (일동 웃음) 그때 감독들은 편집실에 배우가 자주 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는 걸 느끼고 그 뒤로는 잘 안 갔다.

김지운_<반칙왕> 때는 편집실에 감독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일동 웃음)

박찬욱_나는 편집실에 오는 거 대환영인데.

송강호_감독님이 좋아해도 보통 편집기사님들이 안 좋아한다.

박찬욱_봉 감독 얘기처럼 스크립터도 미처 기록하지 못한 테이크를 얘기해서 보석 같은 장면을 건질 때가 있다. 2시간짜리 영화에서 그런 컷 한두개만 건져도 너무 소중하니까, 나로서는 편집실에 오는 걸 반길 수밖에 없다.

봉준호_정말 기억력이 대단하다. <살인의 추억>은 일본의 이와시로 다로가 영화음악을 맡았는데, 보내준 샘플 CD를 같이 딱 한번만 들었을 뿐인데 “나는 4번, 8번이 좋네요. 내 얼굴이 나올 때 8번이 딱!” 하면서 정확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은 촬영 끝나고 편집실은 물론이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장소 헌팅도 함께 다녔다. (웃음) 마지막에 여중생 사체가 발견되는 언덕은 파주에서 찾은 건데, 강호 선배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함께 헌팅을 다녔다. “여기 언덕이 아주 좋네” 그러셔서 결정된 거다.

김지운_왠지 거기서 술 냄새를 맡은 것 아닐까. (일동 웃음)

배우 송강호.

<박쥐>의 베드신과 ‘리딩 못하는 배우’라는 소문

박찬욱_송강호와 함께했던 순간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박쥐>에서 송강호와 김옥빈의 정사 신을 찍기 전이었다. 조명 등 모든 게 준비되고 곧 촬영에 들어갈 즈음이었는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서 자세히 들어보니 김옥빈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면서 눈을 감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더라. (일동 웃음)

송강호_심지어 내가 김옥빈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며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 들리게 그런 자기최면을. (웃음)

박찬욱_그때 순간이나마 강호씨의 상처받은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부족해?” 그런 얘기도 했었지 아마. (일동 웃음) 그날 이후 다들 강호씨를 참 많이도 놀렸다.

김지운_나의 경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막바지 촬영 때였다. 자기 촬영 분량이 끝나자마자 면도를 싹 하고 나온 거다. 난 아직도 촬영이 남았고 수염 기른 태구(송강호)의 보충촬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나오니 되게 얄미웠다. (웃음) 면도를 끝낸 턱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한재림_<우아한 세계>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강호 선배가 혼자 집에서 라면을 먹으며 우는 장면이었는데, 사실상 촬영 중반쯤에 찍었다. 과연 그런 감정 표현이 가능할까 걱정이 컸는데, 팬티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어디서 전화를 한참 하고 오시더니 한번에 끝냈다.

송강호_전화를 한 사람이 <밀양> PD였다. 빨리 좀 밀양에 내려오라고. (일동 웃음) 당시 두편을 동시에 촬영하고 있었는데, 서울 강남에서 경남 밀양까지 어떻게 단숨에 내려가냐고.

한재림_배우가 집중해야 하는데 전화로 막 싸우기에 걱정이 많이 됐다. 그런데 슛 들어감과 동시에 너무 잘하시는 거다. 강호 선배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건 배우에게 이른바 ‘감정 잡는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데 그걸 싹둑 잘라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는 거다. 전화 끊고 와서는 바로 촬영을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눈물 흘리는 연기를 하다가도 불쑥 “어때요?” 하고 물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일동 경악) 인간적인 선배가 아니라 그냥 아이 같기도 하고, 진짜 예술가라는 생각도 든다.

김지운_나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배우는 지금 찍고 있는 걸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는구나. 많은 배우들은 ‘컷’ 하면 그 감정에서 못 빠져나와 겸연쩍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송강호는 그런 게 없다. 이 배우는 그저 서로 다른 수많은 현실의 집합 속에 있구나, 감독인 나도 그런 현실감각을 잃지 말아야지, 그렇게 계속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송강호라는 배우는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정말 뛰어난 현실 연기를 선보이지만, 막상 처음 모여 시나리오 리딩을 할 때는 정말 못한다. 그렇게 못할 수가 없다. (일동 대공감) 종종 신인배우들이 리딩 때 “감독님, 저 너무 못하죠. 죄송해요”라고 울상이 될 때 ‘대한민국에서 리딩 제일 못하는 배우’로 송강호의 예를 든다.

박찬욱_그 소문이 김지운 감독 때문에 다 퍼졌구나. (웃음)

송강호_그러게,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웃음)

박찬욱_심지어 나는 리딩 시작하기 전에 ‘송강호는 원래 못하니까 너희들도 굳이 잘할 필요는 없다’고 미리 얘기까지 해둔다. (일동 웃음)

한재림_<관상> 때는 리딩 잘하셨는데.

송강호_이거 참, <관상> 리딩 끝나고 “촬영 들어가면 그렇게 안 하실 거죠?”라고 했으면서. (일동 웃음) 나는 지금껏 <관상> 리딩을 가장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김지운_그래서 송강호라는 배우는 대사가 자기 입에 붙을 때까지 그 리듬과 호흡을 어떤 과정을 거쳐 가져가는지 궁금했다. 여기 있는 감독들 모두 송강호의 뭔가 부족한 리딩과 너무 뛰어난 현장에서의 연기, 그 사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송강호_수많은 시나리오를 받아 보는데, 출연할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당연히 내 배역을 읽으면서 본다. 당연히 리딩하러 모이기 전에도 크게 소리내 읽으면서 본다.

감독 일동_진짜?

송강호_허, 이분들이 참. (웃음) 그런데 솔직히 <관상>(2013) 전까지는 대사를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다. 김지운 감독님이 얘기한 그 현실감이라는 것이, 그냥 앉아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읽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글로만 알 수 있는 그 인물을 내가 끄집어 올리기까지 ‘읽는다’는 행위 외의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크랭크인이 다가오면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면서 그 인물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기계적인 훈련 그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관상> 막바지 촬영 때쯤 <변호인>이 들어왔다. 한재림 감독님 앞에서 이런 얘기하기가 너무 미안한데, 현장에서 <변호인> 시나리오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게 대충해서 될 게 아니더라. 거의 1인극이나 다름없어서 감독 모르게 훈련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변호인> 리딩을 하러 갔는데 김지운 감독님이 퍼트린 그 소문을 다들 알고 편하게들 왔더라고. (웃음) 그래서 그 리딩 시간이 형식적인 시간일 거라 생각하며 농담 주고받으며 시작했는데, 옆 사무실에서 싸움난 줄 알고 구경 올 정도였다. 내가 리딩을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다들 깜짝 놀랐을 거다.

김지운_듣고 보니 송강호의 예를 들면서 배우들에게 “네 것이 아닌 건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리딩 그 자체보다 인물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강호씨가 리딩 단계에서는 동기 부여라는 측면에서 “아직 내 것이 아니어서 잘 안 된다”고 했던 것 같다. 보통 리딩을 정확하게 잘 해내는 배우들은 막상 촬영 들어가서도 그것과 똑같이 한다. 만족스럽긴 하지만 딱히 긴장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반면 송강호는 나중에 현장에서 어떻게 할까 너무 궁금한 사람이다.

박찬욱_대사 얘기하니까 생각나는 게, <박쥐>에서 송강호가 화장실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김옥빈에게 구구절절 장광설을 늘어놓는 장면이 있다. 여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내가 뱀파이어라서 싫어요?”라고 시작했다가 “내가 뱀파이어가 아니어도 당신을 사랑했겠어요?” 그렇게 바뀌며 정반대되는 얘기를 합리화의 논거로 끌어들인다. 내가 뱀파이어인 게 결과적으로 너에게 좋다며 모순된 얘기를 섞어서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대사도 길고 논리 자체가 없기 때문에 내 의도를 살린다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역시 리딩 때는 언제나처럼…. (일동 웃음) 그런데 막상 촬영 들어가니까 애초의 의도는 물론 미처 생각지 못한 뉘앙스까지 너무 정확하게 잘 살려내는 거다. 지금껏 내 영화에서 송강호를 보며 가장 놀란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그때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가 부부 싸움할 때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웃음) 원래도 친한 배우였지만 그 이상의 형제 같은 존재로 느껴졌었다.

박찬욱 감독과 김지운 감독(왼쪽부터).

송강호 최고의 영화를 꼽는다면

<씨네21>_‘송강호의 20년, 한국영화의 20년, <씨네21>의 20년’으로 만난 여러분의 마지막 말씀 부탁드리겠다. 각자 생각하는 송강호 최고의 영화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봉준호_나는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 강호 형이 집에 놀러오셨을 때 같이 본 적도 있다.

박찬욱_나도 <밀양>. 특히 교회 앞에서 주차 정리하는 장면, 정말 예술이다. (웃음)

김지운_나는 송강호의 최신 영화. <괴물>이면 <괴물>, <박쥐>면 <박쥐>, <변호인>이면 <변호인>. 매번 송강호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오히려 나는 ‘최고의 순간’, 그런 것보다 어떨 때 보면 ‘하, 저 장면은 되게 연기하기 싫었나보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송강호_예를 들어?

김지운_그걸 어떻게 얘기하나. (웃음)

박찬욱_그럴 거면 왜 얘기를 꺼내서는. (웃음)

김지운_물론 내 영화에도 있다. 아, 그런데 도저히 얘기는 못하겠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공감할 거다. 어쨌건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일동 웃음)

박찬욱_나를 제일 놀라게 만든 영화는 <반칙왕>이다.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놀랍고 신선했고, 정말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유형의 연기라는 충격을 안겨줬다.

송강호_<반칙왕>이 나온 그해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공동경비구역 JSA>가 거의 모든 상을 휩쓸었는데, 남우주연상을 <박하사탕>(1999)의 설경구가 받으면서 <공동경비구역 JSA> 팀에서는 어쩌다보니 나만 상을 못 받게 됐다. 그래서 나는 딱히 사진 찍을 일도 없고 해서 시상식이 끝나기 전에 나와서 씁쓸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중에 박 감독님을 비롯해서 다른 심사위원들도 모이게 됐다. 그때 심사위원들 중 한분이 “박 감독님에게 최우수상은 뭐예요?” 하고 물었더니 0.1초 만에 바로 “<반칙왕>이지” 그랬다. 그때 다른 심사위원들이 ‘엥?’ 하며 쳐다봤었다. (웃음)

김지운_다 받은 자의 여유 같은 건가. (일동 웃음)

한재림_나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가장 깜짝 놀란 순간이랄까, 예상한 그 모든 패턴을 비껴가는 전개와 연기까지 너무 좋았다. 앞으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을 하는 것에 대해 안심해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갖게 했다.

송강호_나는 진짜 얼마 전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거의 18년 만에 처음으로 <넘버.3>를 보게 됐다. 와, 정말 웃기는 거다. 사실 그때 대부분 재촬영 없이 한번 만에 찍었기에 좀 거칠긴 한데, 18년 만에 관객이 되어 보는데 너무 웃긴 거다. 내가 저 얼굴로 저렇게 시작했구나, 그때 최종적으로 어떤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면서 진짜 앞만 보며 내 분량을 연기했구나, 정말 순수한 연기를 한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감회가 새로웠고 묘한 자극이 됐다.

박찬욱_<넘버.3>, 진짜 충격이었다. ‘송강호’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됐는데, 그때만 해도 ‘대단한 사람이 나타난 것 같긴 한데 아직 확신을 못하겠다, 일회성이거나 어쩌면 저것밖에 못하는 배우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후 <반칙왕>이 준 확신이 상당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의 20년을 교차하며, 배우 송강호의 의미를 찾는다면 ‘모더니티’가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 연기에 있어서의 현대성이랄까, 장르영화로 시작했지만 그 외연을 한국영화 전체로 확장했다. 연기의 고전주의자인 최민식과 자연주의자인 송강호가 한국 영화계에 있어 굳건한 두개의 축이라고 생각하는데, 후자의 특별함이라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김지운_다른 연륜 있는 배우들에게는 ‘제2의 OOO’ 그런 게 잘 없는데, 유독 송강호에게는 ‘제2의 송강호’라는 표현이 있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 있는데, 아마도 배우 송강호에게는 그 현대성에 더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세대성도 더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자신은 그 표현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 시대의 ‘심벌’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래서 또 묻고 싶다. 니콜 키드먼 인터뷰를 보니 자기 연기의 에너지는 ‘불안’이라고 하더라. 또 많은 대배우들은 종종 ‘콤플렉스’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고 싶긴 했다. 당신 연기의 동력 혹은 원천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봉준호_나는 그런 것도 궁금하다. 지난 20년 동안 안 해본 역할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그럼에도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는지.

송강호_돌이켜보면 나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뭘 해보고 싶다’ 그런 게 없는 편이다. 매번 맡게 되는 캐릭터의 본질을 찾는 데는 집요하지만 ‘어떤 작품을 기다린다’는 느낌은 딱히 없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그래서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그저 매번 최선을 다해왔을 뿐이다.

김지운_그걸 거꾸로 말하자면, 권태 같은 것 아닐까? (일동 감탄)

송강호_뭔가 오늘 나에 대해 본질적인 걸 짚어주신 것 같다. 매일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읽고 크랭크인하면 지방 촬영을 다니고, 그러면서 다른 곳 보지 않고 영화만 해오면서 느끼는 감정의 편린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꿰뚫어본 게 아닐까 싶다.

박찬욱_좋다, 권태로 갑시다. (웃음) 나는 오늘 이런 자리가 오그라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

한재림_이 자리에 불러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다. 강호 선배를 위해서는 뭐든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자칫 해외 일정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봉준호_미국 체류 중인 내 일정에 맞추느라 한국에서 일찍 모인(오전 11시) 것 같아 미안하다. 서울에서 저녁쯤 만났으면 인터뷰 끝나고 진하게 한잔할 텐데 아쉽다. 그래도 여기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접속한 것이니 양해해주시길. (웃음)

송강호_다들 바쁘신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하고 여태껏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들도 던져주어 고맙다. 감독님들한테 발가벗겨져도 좋다는 마음으로 나왔는데(웃음), 뭔가 앞으로 새롭게 시작할 좋은 기운을 얻은 것 같다. 우리 다시 좋은 작품으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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