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40주기, 이만희를 다시 불러내다
2015-04-29
글 :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소장)
이만희 감독 전작전, 5월14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포복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

이만희 감독의 묘비에 헌사된 이 문구는 이만희에 대한 글이 시작될 때 항상 인용되곤 한다. 이 세 문장은 이만희의 장르 혹은 소재를 포괄하면서도, 이만희 영화 속에 처한 구체적인 사람들을 절묘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은 돌아가신 영화사 연구자 이영일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황 속에 던져진 인간’이다. 이만희의 스릴러와 전쟁영화 몇편에 붙여진 명제표이지만, 나는 이만희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표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던져진 인간만이 아니다. 던지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 던짐이 자신의 환경을 타개하거나 그 구조를 결정짓고 변화시키는 거창한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만희는 그런 대단한 인물을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던져짐의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좁은 선택지에서나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자기 충족적 윤리를 가진 인간들이다. 그리고 이만희 감독은 가혹한 운명에 던져진 인간들의 힘겨운 선택에 지지를 보낸다. 그것은 단순한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04:00-1950>에서 박 중사(장동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병사는 상황 파악으로 싸우는 게 아니야, 신념으로 싸우는 거지.”

<검은 머리>

이만희의 연대기

일단 전기적인 사실에서 출발해보자. 1931년 10월6일 서울 왕십리생. 경신고등학교 졸업. 1950년 11월 입대하여 육군본부에서 암호병 등으로 한국전쟁 기간 중 복무했다. 1954년(혹은 55년) 제대 후 연기학원 및 극단 등에서 연기공부를 했다. 1956년 이후 안종화 감독 등의 조감독으로 생활하고 1961년 <주마등>으로 데뷔한다. 1975년 <삼포가는 길>을 유작으로 작고하기 전까지 약 15년간 51편의 영화를 남겼다. 매년 3~4편의 영화를 연출한 셈이다. 1967년에는 무려 10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아무리 당시가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다작의 시대였다 하더라도 거의 기록적인 수치다.

나는 그의 영화 인생을 대략 3기쯤으로 나눈다. 1961년에서 1965년, 1966년에서 1969년, 1970년에서 1975년. 이 구분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 인생을 좀더 요령 있게 살피기 위한 편의적인 구분이며 연도 기준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검은 머리> <마의 계단>과 같은 작품이 1기에 속한다. 장르영화 속에 자신의 개성을 기입하던 시기. 한국 영화사의 진정한 전성기였고, 이만희는 젊었다. 그 기간 그의 영화 작업과 함께했던 팀, 17클럽이 만들어졌다. 배우 장동휘, 문정숙, 이해룡, 촬영감독 서정민, 음악감독 전정근, 조명감독 장기종 등 이만희의 영화를 함께했던 그들은 17명이 매월 17일에 모인다고 해서 17클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965년은 이 감독이 <7인의 여포로>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해다. 그리고 그의 영화 경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1965년 하반기에 개봉한 <흑맥>과 <시장>은 그 전환의 흐름 속에 있다.

1966년을 전후하여 시나리오작가 백결을 만났고, 1967년 오랜 동지였던 서정민 촬영감독과 헤어지고 이석기 촬영감독을 만났다. 이만희가 의식적으로 영화예술의 자의식을 가지고 실험에 몰두했던, 전통적인 한국 영화사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예술성’이 높은 영화들을 만들었던 기간이다. <물레방아> <만추> <귀로> <기적> <휴일> <생명> <암살자> 등의 영화가 2기에 속한다.

마지막 3기는 1970년부터 1975년까지다. 한국 영화사와 현대사가 송두리째 암흑으로 진입하던 시기이다. 1970년 그는 <고보이 강의 다리>, 단 한편의 영화만을 만들었다. 60년대 말, 실험성에 몰두하던 이만희는 제작자에게 통제불능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휴일>은 검열을 통과하지조차 못했고, 지나치게 실험적인 <생명>과 <암살자>는 참혹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만추>로 영화 인생의 정점에 오른 지 불과 2~3년 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국방부가 제작한 <고보이 강의 다리>를 찍는 과정에서 백결, 이석기, 문정숙과 모두 헤어졌다(문정숙과는 <청녀>에서 다시 만나기는 한다). 71년 말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오기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화를 찍지 못했다. 그 기간 그는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72년에 두편, 74년에 세 편, 75년에 한편을 만들었지만, <삼포가는 길>을 제외하고는 당대 대중이나 평단의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 <04:00-1950> <들국화는 피었는데> <태양 닮은 소녀> 그리고 <삼포가는 길> 등이 이 기간에 만들어졌다.

<마의 계단>

그의 불온함에 대하여

이만희에게는 세번의 유명한 검열 관련 일화가 있다. 그는 <7인의 여포로> 반공법 시비로 1965년 구속되어 3월 보석으로 출소하기까지 약 40일간 옥고를 치렀다.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일이다. 영화는 중앙정보부와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의 지시하에 재편집과 재촬영을 거쳐 원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채 개봉됐다. 1968년 제작한 <휴일>은 제작된 영화가 아예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를 너무 어둡게 그렸다는 게 그 이유다. 아무리 엄혹한 검열이 횡행하는 시기였다 하더라도 완성된 영화가 검열로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이 영화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1973년 제작한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문공부가 영화진흥공사를 통해 직접 제작한 대규모 반공영화 프로젝트였는데, 편집을 둘러싼 문공부와의 갈등 끝에 최종 편집을 포기했다.

검열과 관련된 굵직한 일화 하나 가지지 않은 한국영화 감독은 없지만, 이 정도면 단연 독보적이다. 나는 가끔 검열자야말로 감독을 가장 잘 이해하는(어쩌면 감독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까지 해석해내는) 진정한 감식자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들은 이만희의 영화에서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함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불온함은 감독 혹은 관객(검열자)의 이성이 아니라 어떤 직관 혹은 감각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것 같다. 영화평론가 김소영은 2013년 영상자료원에서의 <귀로> 강연에서 그것을 ‘무드’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그녀는 이만희 영화에서 드러나는 “굉장히 쓸쓸하고 허무한” 무드를 “숨 쉴 수 없고, 활기 없는 사회에 대해서 저항 아닌 저항, 굉장히 수동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 “선명한 계급의식이나 가부장적인 의식이라기보다는 반골, 저항의식을 가진 감독과 텍스트-관객의 삼위일체”라고 표현한다.

나는 김소영의 수동적인 방식의 저항과 묘비명의 “묵묵히”를 연결시키고 싶다. 증언들에 따르면 이만희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갈수록 대사가 줄어든다. 이만희의 인물들은 그들이 마주한 잔혹한 운명 혹은 상황 속에서 그저 묵묵히 행동한다.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결단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가건 어떤 결과를 가져오건 간에 그 행동의 책임을 홀로 감당한다. 개별 인간이 집단으로 소환돼 하나라는 일체된 의식으로 주조되어가던, 그리고 그 흐름을 누구라도 거부하기 힘들었던 당대 특유의 집단주의 혹은 국가주의 속에서 이만희는 스스로 믿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개별자, 단독자를 그려낸다. 어두운 운명으로 표상되는 당대 한국 사회, 그리고 거기에 속하면서도 오롯이 맞서 있는 개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불온하다.

<삼포가는 길>

한국영상자료원의 전작전과 전시

한국영상자료원은 이만희 감독의 40주기를 맞아 4월23일부터 5월14일까지 3주간 자료원에 보관된 26편의 영화 모두를 상영하는 전작전을 개최한다. 2005년의 부산국제영화제 이만희 회고전, 2006년의 한국영상자료원 전작전을 거치면서 비평가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이만희 현상’이 나타났었다. 그사이 다시 10년이 흘렀고, 시네필과 연구자의 구성, 한국영화의 담론 환경과 영화 문화, 한국 영화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환경에서 이만희의 영화들을 다시 보여주고 그 반응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번 전작전이 10년 전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도는 낮을지언정 이만희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통해 <휴일>이,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 전작전을 통해 <고보이 강의 다리>가 발굴됐다. 그 이후 엄청나게 화질이 나쁘고 전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한 판본의 <흑룡강>이 2009년에, 그보다는 좀 낫지만 애정을 가지지 않으면 온전히 보기 힘든 정도의 화질로 <잊을 수 없는 연인>이 이번 3월에 발굴되었다. 이번 전작전의 새로운 영화들이다. 단지 두편이지만 이 두편은 이만희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 두편을 통해 이만희의 영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거나, 심지어 재구성해내는 작업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그의 영화필름들을 발굴해낸 아카이브 종사자로서 기대 섞인 희망사항이다.

또한 이만희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작가 백결, 조감독 출신 양택조, 후배 감독인 김홍준과 임필성, 영화평론가 김소영•정성일•허문영•김형석 등이 참여하는 다양한 GV와 대담은 이만희 영화 세계의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리고 1층의 영화박물관에서 전시가 진행된다. 같은 날 개막해 10월까지 대략 6개월간 진행될 예정이다. 유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라 고민을 많이 했다. 물건 없는 영화박물관의 전시는 어떤 식인지 와서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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