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사의 아수라장]
[곡사의 아수라장] 우리 모두 죄수가 될 수 있다
2015-05-01
글 : 김곡 (영화감독)
<빠삐용> <쇼생크 탈출> 등 감옥의 특질을 보여주는 영화들
<빠삐용>

초등학생 때 일이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나는, 배수관에 숨었다가 몸이 끼고 말았다. 옴짝달싹 못한 채 구해달라고 소리치며(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서 몸부림치다가 5분 만에 스스로 기어나오긴 했지만, 그 5분은 정말이지 5시간, 5일, 5달, 아니 5년 같았다. 시간은 마치 무한히 느려져서 정지된 것 같았다. 시간 감각 대신에 나의 측두엽을 강타한 것은 끊임없는 인과적 반성이었다. 내가 왜 이 지경에 처하게 됐을까, 어떤 루트를 탔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이 지경이 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지금쯤 친구들은 날 찾을까, 엄마는 내가 이 지경이 된 걸 알고 있을까…. 온갖 인과적 추론으로 위장된 망상들 말이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흡사 정지된 것처럼 퇴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겹겹이 퇴적되어가는 망상들이다. 물론 이 지층에도 두 계파가 있다. 한편에는 지금쯤 친구들이 날 찾기 시작했을 테니 구조대를 기다리자는 순진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신도 죽은 마당에 구조대가 올 리 없으니 네 몸뚱아리는 너 스스로 건사하라는 현실파가 있다. 전자가 구조대의 목소리라면, 후자는 나 자신 내면의 목소리였다. 내 몸을 가둔 배수관의 내벽을 진지라도 삼는 듯이 이 두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이명처럼 울려퍼지고 또 반향이 돼 울렸다.

<쇼생크 탈출>

시간과 목소리의 구속

감옥의 진정한 파괴력을 알기 위해서 우린 굳이 푸코를 꺼내들 필요는 없다. 나처럼 배수관에 갇혀 보면 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둘러보면 우리 주위엔 배수관보다 더 독한 감옥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때로는 학교도 감옥이고, 가정도 감옥이고, 군대도 감옥이고, 일터도 감옥일 수 있다. 우리가 “군대는 제대가 있지만, 직장엔 제대가 없다”는 농담을 할 때, 당신은 이미 이 사회의 죄수다. 감옥의 첫 번째 특질이 여기 있다. 감옥은 단지 신체만을 구속하는 게 아니라, 정신을 구속한다. 유죄든 무죄든 그건 상관없다. 유죄라면 그 끝없는 시간 속에서 당신이 저지른 죄를 곱씹으면서 혼이 나갈 것이고, 무죄라면 그 끝없는 시간 속에서 당신의 억울함을 성토하다가 혼이 나갈 것이다. 어떤 경우든 당신의 정신은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어져, 응당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다. 정신의 구속, 그것은 그대 잠재력에 낙인을 찍는 것이고, 항유되어야 마땅한 그대의 시간을 사형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대가 ‘할 수도 있었을’ 일을 못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예를 들어 내가 그 배수관에 갇히지만 않았더라도, 난 그 5분을 <카네기 자서전>을 읽고 크게 감명받는 데 썼을 수도 있고, 그래서 재벌이나 대통령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정신이 구속된다는 것은, 시간을 빼앗긴다는 말이다. 그 시간만큼 나의 시간은 무의미해져서 나의 실존은 사형대에 오른다. <빠삐용>과 <쇼생크 탈출>이 감옥영화들의 모범이 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감옥의 첫 번째 특질을 처절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교도관들의 폭력을 고발하거나 무죄를 입증하거나 탈옥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선 얼마나 시간이 무의미해지는가, 그래서 시간을 빼앗긴 자들이 얼마나 속절없이 절멸의 과정 속에 편입되는가 하는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주인공에게, 그 “어느새”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간이었을까? 특히 <빠삐용>의 꿈 장면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주인공이 깨닫는 진짜 죄는, “인생을 허비한 죄”다.

감옥의 두 번째 특질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감옥은 단지 대상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빼앗기에, 시선의 전쟁터가 아니라 소리의 전쟁터다. 사실 시선의 전쟁터는 범죄현장이다. 누가 목격했는가, 누가 숨었는가 하는 식으로, 보이는 범죄 흔적을 겨루기 때문이다. 반면 감옥은 보이지 않는 낙인을 겨룬다. 그래서 그것은 목소리들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대상에 가서 꽂히고 차폐 벽에 의해서 차단되기 쉬운 시선과 달리 근원지를 몰라도 어디선가 들려오기 마련이며,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처럼 귀를 감을 수는 없어서 으레 끊임없이 들려오기 마련인 소리의 특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방이 막힌 감옥 안에서 기댈 것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뿐이다. 만약 조그만 창문으로 별들이 보인다면, 그것 역시 목소리다. 비록 가닿을 수 없지만, 바로 그 이유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필살의 삼단논법: 감옥이 정신의 구속이고, 목소리는 정신의 활동이다. 고로 감옥은 목소리의 구속이다. 감옥에 갇히면 당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목소리요, 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목소리다. 심지어 당신을 구속하는 것도 목소리다. 그것은 재판관의 언도와 교도관의 명령이다. 우린 감옥영화를 읽어낼 때 자주 목소리를 잊지만, 감옥에 갇힌 영화가 진정 열심히 담아내는 것은 바로 이 목소리들이다. 사형수가 걸어갈 때 외친다는 “데드맨 워킹!”이라는 목소리도 그렇고(<데드맨 워킹> <그린 마일>), 교수형이 집행되기 전에 외친다는 “집행!”이라는 목소리도 그렇다(<집행자>(최진호 감독)). 그러나 영화는 반대편의 목소리도 열심히 건져올린다. 그것은 당신을 구속하는 목소리에 개기는, 당신을 해방하는 목소리다.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쇼생크 탈출>의 음악일 것이다.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독방에 갇혔을 때, 그 암흑과 공허를 버티게 해주었던 것은, 바로 마음속에서 울려퍼지던 음악 소리다. 그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감옥영화의 숨겨진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의미에서다. 이 영화의 아버지는, 수감생활의 규칙들을 전달하는 독일군 교도관들의 독일어를 엉뚱한 규칙으로 번역해낸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 목소리를 바꿔치기한다. 또한 남편과 아들을 쫓아서 스스로 수용소로 따라온 아내를 위해서, 그는 원내 방송을 감행하기도 하고.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통렬한 목소리는, 그것이 정말 농담이 되는 순간에 들린다. 주인공과 농담을 주고받던 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몰래 불러내 속삭인 말은, ‘내가 당신을 여기서 빼내주겠네’라는 구원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전히 ‘우스갯소리의 해답’을 물어보는 농담하는 목소리였다. 유대인들의 비명이 누군가에게는 우스갯소리도 안 된다는 사실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없다. 현대 감옥영화의 변주들 중엔 아예 목소리로 만들어진 감옥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목소리를 Ctrl+C하거나 Ctrl+V할 수도 있고, 아예 Ctrl+Alt+Del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그녀>의 인공지능 목소리가 그렇다. 모두들 휴대폰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소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바로 그 목소리에 갇혀 있는 셈이다. 영화 <그래비티>는 더 추상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우주까지 날아오른 인간을 가두는 것은, 진공으로 만들어진 목소리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거기서 목소리만을 들으며 시간을 정지시킨 채, 얼을 내놓는다.

<데드맨 워킹>

영화와는 달랐던 현실의 ‘바보’

그래서 감옥의 세 번째 특질은, 언제나 잘 들을 줄 아는 자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좀먹는 목소리(명령어)와 시간을 되살리는 목소리(음악소리)를 구분할 줄 아는 자, 그리고 그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다른 모든 신체적 능력과 현실적 이득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자이다. 즉, 그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맹목할 줄 아는 자다. 그것이 종교적 맹신에 가까울지라도. <빠삐용>의 죄수가 얼마 남지 않은 목숨까지 절벽에 내던졌을 때, 그리고 <쇼생크 탈출>의 죄수가 조그만 암석 망치로 벽을 파내고 또 파냈을 때, 그들은 맹목했다. 그것은 명령어들은 틀렸고, 나만의 목소리가 옳다는 맹신이다. 한국 감옥영화들은 바로 이 맹신자들의 한국적 캐릭터들을 찾아낸다. 그것은 할 말이 없고 증언에 서툴러도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죄수거나(<하모니>), 비록 말은 더듬지만 사랑만은 할 줄 아는 바보다(<7번방의 선물>).

하지만 이것이 바로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슬프다.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에 충실한 죄밖에 없는 세월호 희생양들의 시간은 닳고 닳아서 이젠 1년이 흘렀지만, 사실 그 1년은 이미 영원처럼 무한히 늘어져 거의 정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절멸감은 고스란히 유가족들에게 옮겨져, 그들을 또 한번의 죄수로 만들고 있다. 1년이 지났다지만, 그대들에겐 단지 365번의 4월16일뿐이다. 그리고 교도관의 명령어들은 여전히 그들을 옥죄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영화에서는 바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왜 현실에선 바보여도 얻을 수 없는가. 충분히 바보였는데. 충분히 바보였는데. 충분히 바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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