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고 있는 ‘차도녀’ 이미지와 다르게 수현은 솔직하고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촬영을 쉬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스탭들과 장난을 치기 바빴으며 종종 감추지 않고 큰소리로 호탕하게 웃곤 했다. 촬영이 시작되면 그는 자신이 신체를 어떻게 써서 왜 이러한 동작을 만들고 있는지 성실히 생각하는 모델이 되었다. 데뷔한 지 십년이 가까워오지만 출연작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한 발짝이라도 조심스럽게 내딛으려 하는 신중한 배우인 것도 같다. 무엇보다도 수현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헬렌 조 역으로 캐스팅되며 명실공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프린세스’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를 기웃거리고 싶어 하는 호기심 많은 탐험가였다.
“마블의 신데렐라”는 공주보다 모험가에 가까웠다. 수현이 들려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대개 “다양한 모습, 다채로운 캐릭터”로 수렴됐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주해 큰 굴곡 없이 자랐고, 국제학을 공부하며 앵커의 꿈을 키웠던 이력으로 미루어보면 수현이 엘리트 전문직 여성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큰 키와 세련된 외모, 당당한 미소까지 가진 덕에 배우가 된 뒤에도 수현은 그 이미지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중은 수현이 더욱더 멋진 “차도녀”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수현에게는 일종의 굴레가 되었던 모양이다. “언제나 다양한 모습의 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욕심이 나요. 브라운관에 비치는 모습이 아닌 나의 다른 모습을 사람들이 봐주길 바라죠. <브레인>(2011)을 끝내고 곧바로 시트콤 <스탠바이>(2012)를 선택한 것도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있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브레인>에서 수현은 신경외과의 이강훈(신하균)을 짝사랑하는 뷰티클리닉 대표 장유진을 연기했다. 도도하고 영민하지만 ‘내 남자에게만은 따뜻한’ 전형적인 ‘차도녀’ 캐릭터였다. 전형적이기는 했어도 같진 않았다. 데뷔작인 <게임의 여왕>(2006)과 뒤이은 작품 <도망자 플랜B>(2010)에서도 엘리트 여성을 연기했지만 장유진과는 조금 달랐다. 장유진은 서툴지만 온 마음과 노력을 다해 홀로 딸을 키우려 애쓰는 순진한 엄마이기도 했다. 그 서툰 모습과 순진한 구석이 수현을 장유진에게로 이끈 계기였고, <브레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수현에게 남은 이유였다. <브레인> 직후 출연한 시트콤 <스탠바이>에서 수현은 출연작 중 최고로 망가지는 연기를 보여줬다. 그 행보가 의아했던 건 사실이지만 결국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수현은 증명해 보였다. 수현은 잘 웃는 것뿐만 아니라 잘 웃길 줄도 아는 배우였던 것이다. 국제변호사, 엘리트 비서, 뷰티클리닉 대표이사까지 그간 연기한 배역이 깡그리 잊힐 만큼 수현은 망설임 없이 코미디 연기에 몸을 던졌다. 본명을 그대로 사용한 <스탠바이>의 김수현은 직업만큼은 번듯한 예능국 PD지만 넘치는 개그 욕심에 엉뚱한 행동을 일삼기 일쑤에 눈치없고 털털한 것이 도가 지나쳐 경솔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이었다. 처음으로 수현은 귀엽게 구불거리는 앞머리를 냈고 시종일관 반달눈으로 웃고 있었다. 쿨하고 이지적인 이전의 캐릭터에는 없었던 따뜻한 사랑스러움이 <스탠바이>의 김수현에게는 있었다. 본명 그대로의 이 캐릭터는 솔직하고 활기찬 수현의 평소 모습과 가장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주눅 들지 않는 기개
2년 전, <도망자 플랜B>를 흥미롭게 본 어느 디즈니 관계자에 의해 수현은 마블 제작진의 캐스팅 리스트에 올랐다.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인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비디오 오디션을 마친 수현은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 캐스팅 디렉터를 만났고 이후 한국에서 조스 웨던 감독과 마지막 미팅을 가졌다. 캐스팅이 확정된 직후에도 수현은 자신이 출연할 영화가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라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 프리미어에 참석했을 때까지도 수현의 손에 대본이 전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프리미어에서 만난 관계자에게 원작에 있는 캐릭터냐고 묻기도 했는데 ‘있는 것 같다’는 두루뭉술한 대답밖에 못 들었어요. (웃음) 처음엔 <앤트맨>이지 않을까 추측했어요. 오디션 대본에 과학, 세포재생, 창조 등의 단어가 적혀 있었거든요. 알고보니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었던 거죠. 머릿속에서 마블 코믹스의 온갖 캐릭터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헬렌 조라니, 정말 기뻤죠. 대중이 더욱 친숙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시리즈니까요.”
원작 코믹스의 헬렌 조는 마블 코믹스 세계관 안에서 일곱 번째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인 한국계 캐릭터 아마데우스 조의 어머니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는 가족관계가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고,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동료인 유전공학자라는 설정만 알려졌다. 다른 히어로들처럼 초능력을 쓰진 않지만 비상한 두뇌를 지닌 헬렌 조는 비전(폴 베타니)과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정신적으로 공황을 겪는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가장 인간적이고 강한 내면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 “연약한 인간이지만 주눅 들지 않는 기개”도 갖추고 있다. 울트론과 마주하고서도 “헬렌 조는 ‘내가 당신을 무서워해야 하느냐’고 받아칠 수 있는 여자”다. 조스 웨던도 수현의 그러한 면모가 마음에 들어 캐스팅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철저하고 정교하게 계산된 시나리오대로 촬영했지만 조스 웨던은 일부 장면, 가령 헬렌 조가 치타우리셉터에 홀리는 신에서 ‘빙의 상태’의 강도를 어느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냐고 수현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여러 버전으로 찍어보자고 했어요. 처음 촬영분은 저도 울트론만큼 악마같이 변한다는 버전이었어요. 저는 그것도 재밌었는데 결국 약한 버전으로 갔죠. 비브라늄과 만난 세포들이 원활하게 결합할 때도 과학자로서 신기해하는 정도로만 표현됐는데 처음 버전에선 희열이 과했거든요. 최종 버전에선 편집됐지만 비전의 머리에 마인드 스톤이 들어갈 때 울트론과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웃는 장면도 찍었어요. 그랬다간 영화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둘이 아닌 셋이 될 뻔했죠. (웃음) 다만 아쉬운 건 치타우리셉터가 저를 건드릴 때 너무 은근하게 사용된 것 같았어요. 드라마틱하게 저를 팍 쳤으면 ‘우와! 셉터다!’ 하는 느낌이 더했을 텐데 말예요. (웃음)” 3개월간 런던에서 촬영을 진행하며 수현이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동료 배우들의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만큼 편안하고 자유로운 표현력을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린 스크린 앞에서 허공에 대고 연기를 하는 그들의 “놀라운 집중력에 많이 자극받기도” 했단다. “그들은 표현에 있어 어떤 두려움도 없었어요. 마크 러팔로도 말로는 그린 스크린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가 헐크를 연기할 때의 모습엔 전혀 어색함이 없었죠. 저도 얼른 익숙해지려고 했고, 때로 (아이언맨 슈트의) 머리 정도는 모형으로 있었기 때문에 곧 집중할 수 있었어요.”
넷플릭스의 <마르코 폴로>와 저예산영화 <이퀄스>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촬영과 넷플릭스의 TV시리즈 <마르코 폴로>의 촬영을 모두 마친 뒤 수현이 고른 또 하나의 작품은 저예산영화 <이퀄스>다. 리들리 스콧이 제작하고 니콜라스 홀트,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함께 출연한다. 모든 인간적 감정이 제거된 세계, 억제되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병이 유행하고 ‘감염자’들은 세계로부터 추방당할 위기에 놓인다는 내용이다. 수현은 “화면 속에 나오는 여자”를 연기한다. “<아일랜드>(2005)가 생각나는 영화죠. 원래 니콜라스 홀트의 친구 역으로 오디션을 보았는데 화면 속 여자로 캐스팅됐어요. 화면 안에서 ‘우리의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며 너희는 이런 병에 걸린 것이다’라는 식으로 반복해 설명하는 인물이에요.” 포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로봇처럼 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톤으로 말하면서 감정만 쏙 빼고 연기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고.
수현은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홍보 일정을 마치는 대로 다시 한국을 떠나 연말까지 유럽에서 <마르코 폴로> 시즌2의 촬영을 시작한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칸이 통치하는 원나라에서의 마르코 폴로의 모험을 그린 대작이다. “사극이 하고 싶어” 선택한 작품이다. 수현이 맡은 역할은 쿠빌라이 칸의 사촌인 카이두(릭 윤)의 딸 쿠툴룬이다. 쿠툴룬은 여자로서의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고 남성 전사들 사이에서 홀로 버티며 용맹한 전사로 사는 길을 택한다. 새로 시작할 시즌2에서는 쿠툴룬의 역할도 더 확장될 거라 체력 훈련에 힘쓰며 “몸도 키우고 있는” 중이란다. 시즌2에선 쿠툴룬의 부족과 칸의 대립이 심화돼 부족 내 갈등 상황이 더 많이 그려질 예정이다. 고생길이 훤하건만 앞에 펼쳐진 그 길이 수현은 못 견디게 기다려지는 모양이다. “정말 기대하셔도 좋아요. 매번 새로운 것을 하고 싶고, 다양한 형태의 영화도 경험했으면 좋겠고요. 장차 어떤 배우로 살게 되든 저의 목소리에 힘이 생길 수 있다면 그 힘을 좋은 방향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