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5일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다. 그래서 뭘 할까 궁리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로보트태권브이>를 상영한다기에 갔다. 예상했던 대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이 많이 왔고, 한편으론 1976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을 중장년층도 상당수 극장을 찾았다. 상영 분위기는 예상보단 진지했지만 <로보트태권브이>가 발차기나 정권 찌르기를 할 때면 누군가는 환호성을 질렀고, 인조인간 메리가 시샘하거나 삐뚤어질 때 누군가는 탄식했다. 그만큼 <로보트태권브이>는 대한민국 영화 팬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슴 한구석에 모셔놓은, 좀 과장해서 말해보면 <인터스텔라>와 유일하게 맞짱 뜰 수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애니메이션이다(누군가는 표절 어찌고저찌고하지만 깡통로봇 고춧가루 공격이나 맞고 다 꺼지라고 해).
초대박 히트작 <외계에서 온 우뢰매>와 <영구와 땡칠이>
정말이지 1970년대와 80년대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였다. 76년 <로보트태권브이>를 시작으로 82년 <슈퍼태권브이>와 84년 <84태권브이>의 태권브이 열풍은 거짓말 좀 보태서 전국의 초딩들이 극장에서 나와서 바로 태권도장으로 달려갈 만큼 거대한 열풍이었던 것이다. 태권브이뿐이었는가. <스페이스 간담브이> <마린엑스> <초합금로보트 쏠라123> 등 거대 메커닉의 인기는 멈추지 않았고 <간첩 잡는 똘이장군> <해돌이의 대모험> 등 이승복 뺨치는 열혈반공사상을 전파하는 반공애니메이션과 <꾸러기 발명왕> <다윗과 골리앗> 등 꽤나 교육적인 애니메이션들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 모든 애니메이션 붐의 주역이신 김청기 감독은 86년 다시 한번 셀프 레코드 브레이킹하는 역작을 만들어내셨으니, 바로 바로 바로(세번으로도 모자란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였다. 아아,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웅장한 우뢰매의 로앵글 바스트숏 아래로 절박한 표정의 에스퍼맨과 에어로빅복을 입은 데일리의 므훗한 몸매가 담긴 우뢰매 책받침. 그 책받침을 가진 친구에게 난 내 책받침 10개와 바꾸자고 얼마나 알랑방귀를 뀌어대었던가. 이처럼 <외계에서 온 우뢰매>는 그깟 책받침 하나로 아이들의 위계를 재조정할 만큼 거대한 하나의 (초딩)사회적 현상이었다(또 누군가는 <외계에서 온 우뢰매>도 표절 어찌고저찌고하지만 에스퍼광선 맞고 다 꺼지라고 해).
아동용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다. 1970, 80년대는 아동영화들도 활화산처럼 폭발하던 시기였다. 일단 <유머 1번지> 사단이 <슈퍼 홍길동>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물을 장악했고 이건주와 김흥국 등 탤런트와 가수들이 <은하에서 온 별똥왕자> <반달가면> 등의 “그외” 시리즈물을 담당했다(“그외”라고 표현할 만큼 <유머 1번지> 사단 코미디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숭구리당당 숭당당 수리수리당당 숭당당~). 대한민국의 에드우드 혹은 B영화의 제왕이라 칭송받는 남기남 감독도 이 시절 아동영화 흥행감독이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남기남 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편수로도 유명하고 또한 “필름을 다 써야지 왜 남기남?”이라며 영화를 찍어댔다는 “다소 과장된” 전설이 남을 정도로 악착같이 찍어낸 감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컬트적 숭배는 바로 단 하나의 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역시 잊으면 안 된다. 그 영화는 바로 바로 바로 바로 바로(다섯개로도 부족하다) 1989년작 <영구와 땡칠이>인데, 당시 200만명 정도 봤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800만명 정도의 엄청난 초대박 흥행작이고, 그 흥행에 힘입어 <영구와 땡칠이> 속편은 물론 <맹구> 시리즈 등 아류작들이 쏟아져나오는 현상을 만들기도 했다(물론 그것보다 더 놀라운 현상은 영화의 내레이터가 “다 같이 불러볼까요? 영구야~” 하면 극장 안 초딩들이 일제히 “영구야~!!!”를 불러대며 대동단결했다는 것이다. 현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이신 유영식 원장은 이 현상을 일컬어 “한국 최초의 다이렉트 인터랙션 시네마”라고 칭하기도…).
이 모든 아동영화/애니메이션 열풍은 안타깝게도 199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국산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의 뮤지컬 애니메이션(<인어공주> <미녀와 야수>)이나 일본의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 (<아키라> <공각기동대>) 혹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에 밀리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산 애니메이션인 <블루시걸> <아마겟돈> <원더풀 데이즈>는 흥행 참패를 기록하며 사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동영화들의 상황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젠 유치한 <유머 1번지> 영화가 아니라 주윤발 아저씨가 쌍권총 쏴주는 홍콩 액션영화들이 초딩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아직은 그런 마초성이 부담스러웠던 초딩들에겐 최소한 중국 강시영화들이 좋은 대체물이 되어주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남기남 감독 같은 스타(! X 100. 느낌표 100개도 모자란다) 아동영화감독들은 더이상 명함을 내밀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기남 감독은 2003년 <개그콘서트> 멤버들을 데리고 찍은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를 끝으로 아동 영화계를 떠났고, 동시에 한국 영화계도 아동 영화계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면 2003년 이후 아동들은 극장에 뭘 보러 갔냐고? 미국과 홍콩, 중국에서 밀려오는 3D애니메이션을 보러가거나 전체 관람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를 보러 갔다. 한마디로 순식간에 그 거대하고 방대하고 뜨겁던 김청기와 <유머 1번지>, <로보트태권브이>와 <영구와 땡칠이>가 정말이지 “영구 없다” 이러면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로보트태권보이2020>은 가능한가
이런 아동영화/애니메이션 망각의 가장 큰 증거는 복원과 평론의 부재다. 사실 1970~80년대 영화들은 워낙 양이 방대해 모두 다 아카이빙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유실률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카이빙된 작품 중에서 중요 작품을 우선으로 DVD를 만들어 배포해도 좋으련만 아동영화/애니메이션 복원은 <로보트태권브이> 이후로 들려오는 소식이 없다. (여기서부턴 징징댐이 심해지므로 양해부탁드립니다. 숭구리당당 숭당당.) 물론 다른 훌륭한 영화들을 복원하느라 바쁘실 테지만 <초합금로보트 쏠라123>를 깔끔하게 복원된 HD급 영상으로 보고 싶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동영화/애니메이션에 대한 평론이 전무하다는 것도 비통하다. 70~80년대에는 영화평론이 아직 자리잡기 이전이었다고 치자. 웰메이드 광풍이 불었던 90년대에도, 1천만 신화가 기승을 부렸던 2000년대에도, 이전 패턴을 반복하는 무기력한 2010년대에도 70~80년대 아동영화/애니메이션에 대한 평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웃긴 건 평론가들이 나서지 않는 이런 연구를 외려 덕후들이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유명한 몇몇 블로거들은 당시 열광했던 남기남 영화들을 VHS비디오로 찾아내고 감상한 후 평을 올리기도 하는데, 영화 좀 봤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나조차 이런 분들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엄청난 관람편수와 방대한 지식을 자랑한다. 아동영화/애니메이션 전문으로 평론해줄 평론가 어디 없나. 아아 개탄스럽다. (삼천포1. 시네마지옥 총무 권용만은 파워블로거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70~80년대 아동영화 전문가다. 덕후 같으니라고. 삼천포2. 이런 덕후들은 VHS테이프를 어렵게 구매해서 DVD로 Rip떠서 케이스에 속지까지 만들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것도 혼자 보려고. 덕후 같으니라고. 삼천포3. 나도 김청기 감독의 <바이오맨>이 너무 보고 싶어서 VHS를 어렵게 구했다. 그리고 자체 제작 케이스까진 아니더라도 파일로 떠서 나 혼자 보고 있다. 덕후 같으니라고.)
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님이 애니메이션 학과 교수님이었다고 들었다. 분명 <로보트태권브이>를 1976년 극장에서 보셨을 테고 태권브이의 발차기에 환호성을 지르셨으리라. 70~80년대의 찬란했던 시기를 누구보다 잘 기억할 거고,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이 사멸의 위기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계시리라. 이쯤 되면 현 영화진흥위원회가 해야 할 일 중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뽀로로가 TV에서 소비되는 것도 중요하고 외국에 비싸게 팔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로보트태권브이2020>을 극장에 걸리게 하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 영화제 검열과 독립영화를 압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2>나 김진만 감독의 <오목어> 장편버전을 극장에 걸리게 하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