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계기로 내 인생의 자동차영화들을 추억하는 요즈음이다. 그중 <배니싱 포인트>(1971)는 극도로 단순하다 못해 곧장 승천할 기세의 괴작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자동차 탁송원 코왈스키(배리 뉴먼)는 콜로라도부터 샌프란시스코를 16시간에 주파한다는 미친 목표를 세우고 시속 257km까지 닷지 챌린저의 액셀을 밟는다. 이 자동차영화에는 카체이스도 노상 액션도 없다. 주인공은 장애물과 교통경찰을 무시하고 소실점까지 과속할 뿐이다. 운전 도중 문득, 영원히 달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이 든 적이 있다면 <배니싱 포인트>는 당신을 위한 영화다.
05/06
“저희 마블이 생각하는 슈퍼히어로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민간인 보호입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는 동안 이 슬로건이 도처에서 나부끼는 환각이 보였다. 조스 웨던 감독은 관객의 호흡을 절대적으로 휘어잡아야 할 오프닝 액션 시퀀스부터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장면을 강조한다. 헐크와 벌인 아프리카 격투 도중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부서질 건물 안에 주민이 없나 스캔하고, 서울 액션에서는 지하철 승객 구조가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의 합성육체를 빼앗는 미션보다 전면을 차지한다. 광역 소개령(疏開令)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멤버에게 개별적 구조 에피소드가 주어지고, 급기야 닉 퓨리가 이끄는 쉴드가 시민의 구명보트 노릇을 하는 장면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소코비아 시퀀스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솔직히 나중에는 “훌륭한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이만하고 진도를 좀…”이라고 부탁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슈퍼히어로 액션영화의 중대한 태생적 딜레마 하나는, 슈퍼파워를 가진 캐릭터끼리 대결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대량 인명살상 스펙터클이 오락성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2012년 개봉한 <어벤져스>도 치타우리족과 슈퍼히어로들이 맞붙어 맨해튼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전투로 끝났다. 1년 후 DC 코믹스의 <맨 오브 스틸>은 조드 장군과 슈퍼맨이 주먹다짐을 하며 메트로폴리스를 초토화하는 45분 파괴 시퀀스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데 두 영화 사이에는 사소한 듯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어벤져스>의 맨해튼 대첩에서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교전 지역을 최대한 제한하는 전술을 멤버들에게 전달하고 경찰을 몰아세워 시민을 대피시킨다.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는 천공의 포털을 막아 피해를 최소화할 궁리를 한다. 어벤져스들도 건물을 부수지만 붕괴를 막는 움직임도 보여준다. 반면 <맨 오브 스틸>의 클라이맥스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것은 첫째 지루해서였고, 둘째 슈퍼맨의 캐릭터를 어그러뜨렸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힘의 책무를 받아들여 자기를 입양한 지구인들을 보호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데에 영화 전반부를 소모한 클라크 켄트는, 정작 악당과 싸우는 도중 때려부순 건물 안의 무고한 인명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상상컨대 마블 스튜디오는, 아니 적어도 조스 웨던 감독은 <맨 오브 스틸>의 통각이 마비된 클라이맥스를 보며, 이 이슈야말로 슈퍼히어로 장르 전체가 장기 생존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민간인 보호 기치는 <맨 오브 스틸>의 안티테제다. 비슷한 맥락에서 <에이지 오브 울트론> 중 호크 아이(제레미 레너)의 아내 로라(린다 카델리니)의 대사가 주의를 끈다. “내가 당신의 ‘갚아주기’ 활동을 완전히 지지하는 거 알죠?”(You know I totally support your Avenging?) 극장에서 웃음도 자아낸 대사지만, ‘어벤징’을 이를테면 대문자로 시작되는 고유활동으로 표현한 린다의 표현은, 어벤져(Avenger)라는 작명을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revenge’도 마찬가지지만 동사 ‘avenge’의 직접 목적어는 남에게 입은 상처나 피해이지 그것을 끼친 가해자는 아니다. 또 ‘revenge’와 달리 ‘avenge’는 개인적 증오가 아니라 그릇된 힘에 의해 균형을 잃은 상태를 수평으로 되돌리려는 의지가 동기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공격 아닌 방어를 위해서만 포스를 사용한다는 제다이의 교전 수칙처럼, 조스 웨던 감독은 어벤져스를 차별화하는 ‘영웅 헌장’을 각인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05/07
자, 그러면 남는 문제는 방어하되 어떻게 방어하느냐다. 여기가 캡틴 아메리카와 토니 스타크가 갈라서고 파시즘이라는 시한폭탄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엄청난 부와 기술을 소유한 토니 스타크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 캡틴 아메리카는 “시작도 안 한 전쟁을 이기려들기 시작하면 항상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다”고 단언한다. 이 문제는 지난 7년 동안 11편의 영화를 만들고 향후 4년간 11편의 제작을 예고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전체를 포괄하는 대주제로 내세울 만한 거의 유일한 실질적 갈등이다(설마 인피니티 스톤 여섯개를 한데 모으는 것이 마블의 이야기 우주를 지탱하는 진짜 목표라고 믿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 아닌가?). 지난 2014년 5월 <에이지 오브 울트론> 촬영현장에서 인터뷰 기회를 얻은 나는 웨던 감독에게 <어벤져스>와 <캡틴 아메리카> 연작에 거듭 등장하는 “인간은 복종하도록 창조된 존재다”, “자유로부터의 자유”라는 표현이 장기적 복선으로서 갖는 의미를 물었더랬다. 조스 웨던의 답은 명료했다.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면서 파시즘을 피해가긴 어렵다. (중략) 슈퍼히어로들은 그들의 물리적, 도덕적 힘이 우월하고 리더십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으니 그냥 자기들이 인류에 명령을 내리는 게 맞지 않을까 자문하게 된다. 파시즘으로 통하는 안락함의 유혹이다. 그런 유혹을 반박함으로써 우리는 혼돈과 무질서가 인간성을 질식시키는 완전무결한 질서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더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결정했지만 조스 웨던은 일찌감치 캡틴 아메리카 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결론이 예정돼 있다고 하더라도 영화 내적으로 전개되는 갈등과 논쟁이 싱겁다면, 시리즈의 극적 긴장은 반감될 것이다.
과연 이와 관련해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는 토니 스타크를 둘러싼 매우 흥미로운 포석이 있다. 스타크는 파시스트는 아니나, 군수산업에 뿌리를 둔 파워 엘리트이며 본인의 의지가 현실을 장악할 수 있다는 확신을 평생 굳힌 인물이다. 이 캐릭터는 방패이자 창이다. 우선 어벤져스에게 선공 치명타를 날리는 스칼렛 위치와 퀵실버 남매부터 과거 살상무기를 팔아 부를 축적한 토니 스타크의 업보다. 큰 위험은 집중된 큰 힘으로 막아야 한다고 믿는 토니 스타크는, 이번 영화에서 아이언맨이 슈트를 입듯 완벽한 인공지능을 개발해 세계에 디지털 갑옷을 입히려 한다. 전능한 단일 통제 시스템을 발명하면 만사형통이라는 발상으로 울트론을 개발하지만, 울트론은 곧장 인류 절멸의 위협으로 진화한다. 울트론이 근육질의 전투형 안드로이드로 변모함에 따라 토니 스타크와 울트론의 혈연 유사성이 흐릿해진 점은 주제 전달을 고려하면 못내 아쉽다. 코믹스의 원 캐릭터가 어떠했든 울트론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처럼 지성적 존재이되 빅 데이터로 보강된 순수한 A.I.로 그려졌다면 한결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아니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1인2역으로 울트론을 연기하면 어땠을까?
울트론에게 액션히어로의 육체가 필요했던 이유는 자명하다.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는 마지막 30, 40분의 전면전 클라이맥스를 포함한 3, 4개의 액션 세트 피스를 포기할 수 없다. 울트론의 육체는 스크린에서 처단됨으로써 이 끝없는 연작의 이번 회차에 잠정적 카타르시스와 일시적 종결을 제공해야 한다. 여러 로봇의 몸에 옮겨다닐 수 있는 울트론의 ‘클라우드 컴퓨팅’스러운 편재성은 역설적으로 물리적인 액션의 카타르시스를 복제양산시킨다. 영화의 종장에서 울트론은 헐크에 의해 패대기쳐지고 스칼렛 위치의 손에 심장을 뜯기고 비전(폴 베타니) 앞에서 최후 진술을 하며 여러 번 죽는다. 울트론을 막겠다고 토니 스타크가 세운 대책이 어이없게도 ‘울트론 2.0’인 비전의 창조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토니 스타크라는 천재는 경험으로부터 학습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돌아보면 스타크의 학습 장애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아이언맨3> 결말에서 슈트들을 폭파해 호탕한 불꽃놀이를 벌이고 “아이언맨을 만드는 건 슈트가 아니”라며 표표한 뒷모습을 보였던 토니 스타크는 이후 별다른 설명 없이 슈트 군단을 재가동했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도 토니 스타크는 농장이나 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지만 이제 별로 귀담아듣게 되지 않는다. 토니 스타크의 캐릭터 궤적은 왜 자꾸 도돌이표를 찍어야 할까? 답은 사실 모두 안다. 마블 우주에 속한 영화에는 액션의 할당량이 있어서 아이언맨을 필요로 하고, 캐릭터의 변화와 발전은 다음 작품에서 소집될 다른 히어로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관객인 내가 맞닥뜨린 답답함은, 마블이 선택한 연속형 서사(serial storytelling)의 태생적 제약이다.
05/08
분명 조스 웨던은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앙상블 지휘력, 위트, 교차편집 센스, 장쾌한 클라이맥스 연출력 등 수중의 모든 도구를 활용해 존중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동시에 이 최선의 절충안은 히어로 앙상블 영화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계를 서서히 가늠하게 만든다. 일단 구조적으로 고정된 변수들이 있고 연작이 반복될수록 캐릭터의 증원과 더불어 고정 메뉴의 부피가 늘어간다. 내역을 보자. 서너개의 액션 시퀀스가 영화 속 텐트폴로 박혀 있고, 등장 영웅들의 심리와 관계를 설명하는 장면이 필요하며 차후 연작의 복선도 심어야 한다. 이야기 패턴은 새로운 악당이 등장해 인피니티 스톤 중 하나를 탈취하고 그것을 회수하는 코스의 변주다. 요컨대 독자적 이야기로 다른 뭘 해보기에는 러닝타임이 빠듯하다. 마블의 인물이 신생 캐릭터와 새 관계를 맺을 수는 있을지언정 전진하거나 깊어질 여지가 있을까?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도 인물 탐구라고 할 만한 부분은, 일상이나 경험이 아니라 스칼렛 위치의 주문이 모든 멤버로부터 끌어낸 과거의 트라우마로 ‘브리핑’된다. 결과적으로 헐크뿐 아니라 어벤져스 전원은 마음의 병에 짓눌린 환자처럼 보이게 됐는데, 과거에 얽매인 군상이란 그리 매력 있지 않다. 개봉 직후 대두된 블랙 위도우가 여성 캐릭터로서 퇴행적으로 그려졌다는 불만도 조스 웨던의 잘못이기보다는 이 세계의 비좁음과 관계 있다. 근본 문제는 블랙 위도우의 연애가 아니라 이 여섯 히어로 군단 중 여성이 딱 한명이라는 지분의 불평등이다.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PR)의 린다 홈스가 제시한 가설이 재미있어 소개한다. 블랙 위도우에게 헐크의 스토리를 줬다면 자기 힘을 혐오하는 여성이, 캡틴 아메리카의 몫을 줬다면 통제 강박에 빠진 여성이 될 것이다. 호크 아이에 대입하면? 뭐니뭐니해도 가정이 우선인 여성 캐릭터가 돼버린다. 블랙 위도우는 유일한 여성 주역이기에 성정치학의 리트머스지가 될 수밖에 없다. 끝으로 마블 우주 특성상 관객은 인물의 안위를 심각하게 염려하기 어렵다. 이제 잘 알려진 대로 이 시리즈에서 인물의 죽음은 네일아트만큼 지속된다. 지금껏 죽은 줄 알았던 닉 퓨리, 버키, 로키 등이 살아 돌아왔고 <어벤져스>에서 장렬히 퇴장한 콜슨 요원은 TV시리즈에서 부활했다. 영구적 상실은 없다고 보장된 싸움이, 연대기의 전개와 더불어 관객의 몰입도 심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충분히 즐겼지만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나의 반응은 한편의 영화에 대한 절대적 만족이었나? 무수한 덫과 함정을 무사히 통과한 ‘선방’에 대한 안도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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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신념
황윤 감독의 전작 <작별>과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인간의 편의에 내몰린 야생동물이 처한 현실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황윤 감독이 진즉 채식주의자가 됐으리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신작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여전히 돈가스를 좋아하고 엄마 식성을 이어받은 아들의 식단을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황윤 감독은 그냥 주어지는 당위로는 움직이지 않는 귀납형 인간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의 계기는 구제역 살처분 사태. 개와의 우정을 통해 반려동물을, 동물원의 호랑이 한 마리와 가까워짐으로써 야생동물을 이해했던 황 감독은 ‘식육공장’과 농장에서 길러지는 돼지들을 지근거리에서 접촉하면서 육식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푸드 코트와 놀이방 식단 등을 두고 가족, 친지와 때로 지리멸렬한 입씨름을 감수하며 더디게 실천 방도를 찾아간다. 말투는 둥글고 접근법은 온건하지만 그녀는 터프하다. 만약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분노와 슬픔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공장식 사육의 참상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견딜 비위가 없었을 테고 결국 목격한 광경을 세상과 나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잡식가족의 딜레마>에는 오직 근원적 낙천성에서만 나올 수 있는 추진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