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정치 부조리의 희생양, 누벨바그의 스타
2015-06-05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Jean Seberg 진 세버그
<슬픔이여 안녕>

어찌 보면 진 세버그와 프랑스와의 인연은 운명인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인연은 장 뤽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에서 주인공이 된 사실이다. 미국 배우로서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의 주역이 되면서, 새로운 영화미학을 전세계로 알리는 전령이 됐다. 진 세버그가 파리의 거리에서 신문을 팔기 위해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칠 때, 그것은 새 미학의 도래를 알리는 선언적인 제스처였다. 소년 같은 짧은 금발에, 도시적인 감각, 그리고 자유로운 분위기는 세버그의 개성이자 새로운 영화의 대중적인 매력으로 각인됐다.

운명 같은 프랑스와의 인연

진 세버그의 영화 데뷔는 마치 여왕의 대관식 같았다. 데뷔작은 오토 프레민저 감독의 <성인 잔>(1957)이다. 프랑스의 영웅인 잔 다르크의 전기영화인데, 당시 할리우드의 거물이었던 프레민저 감독이 신인 오디션을 통해 주역을 발탁했다. 이것은 비비안 리가 선택됐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오디션 이후,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관심을 끌었던 뉴스였다. 진 세버그는 여기서 1만8천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주역에 발탁됐다. 거물 감독이 선택한 신인배우 진 세버그는 영화를 찍기 전에 이미 스타급의 관심을 받은 것이다.

세버그는 <성인 잔>을 준비하며, 자신의 개성이 된 짧은 헤어스타일을 선보였다. 성인의 수난 과정을 연기하기 위한 당연한 분장이었는데, 그것이 세버그의 매력이 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참담했다. 영화는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흥행은 볼품없었고, 진 세버그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있다는 혹평을 받았다. 19살 신인배우에겐 혹독한 내용의 리뷰가 줄을 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진 세버그는 저널리즘으로부터 큰 상처를 받는 평생의 악연을 갖는다.

프레민저 감독은 자신이 발탁한 신인이 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다시 세버그와 팀을 이뤄 새 영화에 도전했다. 그녀의 이름을 비로소 알리게 되는 <슬픔이여 안녕>(1958)이 그것이다. 데뷔작이 프랑스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작품이었다면, 이번에는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사강의 원작을 각색한, 남프랑스의 해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은 사강이 18살의 ‘어린’ 나이에 발표해서 더욱 유명한데, 세버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10대 소녀 세실 역을 맡았다. 외모는 <성인 잔>과 비슷했다. 짧은 금발에, 건강한 기운이 넘쳤다.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며 성적 자유를 권리로 생각하는 바람둥이 부친(데이비드 니번)과 사는 딸 역이다. 자신도 부친처럼 구속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꿈꾸는데, 아버지에게 결혼 상대자(데보라 커)가 나타나면서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혼, 가족이라는 제도를 두려운 구속이라고 여기는 딸은 이전의 ‘자유’로 돌아갈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남프랑스의 바다를 배경으로, 세버그의 건강하고 자유로운 매력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도 미국에선 거의 외면받았다. 도덕적인 태도가 적지 않은 거부감을 줬다. 이를테면 바람둥이 부친의 문란한 태도, 지나치게 친밀한 부녀관계 등이 특히 문제시됐다. 세버그는 또다시 배우로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대신 성적 방종의 ‘헤픈’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썼다. 반전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누벨바그의 영화인들이 프레민저의 역량을 상찬하고 나섰다. 세버그의 존재도 새롭게 평가됐다. 당시 평론가였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현재로선 유럽 최고의 배우”라고 치켜세웠다. “그녀의 머리모양, 실루엣, 걸음걸이, 그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런 종류의 섹스어필은 이전엔 못 보던 것이다.” 고다르도 <슬픔이여 안녕>에서의 세버그를 본 뒤, 자신의 데뷔작에 출연을 요청했다.

로맹 가리를 만나 사회문제에 개입

고다르가 저예산영화 <네 멋대로 해라>를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쓴 요소가 바로 캐스팅이다. 적은 돈으로 스타 캐스팅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인데, 고다르는 알고 지내던 세버그의 프랑스인 남편에게 접근했다. 세버그의 첫 남편은 변호사이자 영화인이었고, 부부는 당시 파리에 살고 있었다. ‘무명’ 감독 고다르가 세버그를 설득한 것도 <슬픔이여 안녕>에서의 건강하면서도 동시에 깨지기 쉬운 연약함이라는 이중성을 매력으로 상찬한 덕분이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 됐는데,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세명의 스타가 동시에 탄생했다. 곧 감독인 장 뤽 고다르, 남자주인공 장 폴 벨몽도, 그리고 진 세버그였다.

걸작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이 된 뒤의 세버그의 행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성적 매력을 이용하는 통속적인 작품들에 주로 나왔다. 워런 비티와 공연하며 정신병자 여성을 연기한 <릴리스>(감독 로버트 로슨, 1964) 이외에 영화사에서 특별히 언급되는 작품이 없다. 대신 세버그는 프랑스의 인기 작가 로맹 가리와의 사랑과 결혼으로 더욱 유명했다. <자기 앞의 생>의 작가인 로랭 가리와 살며, 세버그는 사회적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는 정치적 격동기인 ‘1968년 전야’였고 세버그는 인종차별, 여성차별, 반전 등 당대의 사회문제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문제가 됐던 게 급진적인 흑인 결사단체인 ‘블랙팬서’와의 관계였다. FBI의 표적이 된 것이 바로 흑인단체와의 친연성 때문이었다. 세버그에 대한 도청, 미행, 협박 등이 이어졌다. 1970년 로맹 가리와의 사이에 둘째를 임신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블랙팬서의 흑인 멤버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뉴스위크> 같은 권위지에서도 뉴스로 다뤘고, 특히 황색 저널의 표적이 됐다. 훗날 밝혀졌듯, 이것은 FBI의 공작이었는데 세버그는 악의적인 뉴스에 충격을 받아 아이를 조산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딸아이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죽는다. 세버그는 언론의 잔인함에 대한 대응으로, 죽은 아이의 시신을 공개한 채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세버그의 삶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신경안정제에 더욱 의존했고, 로맹 가리와 헤어졌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다른 남자들과의 스캔들도 끊이지 않고 일으켰다. 결국 진 세버그는 1979년 40살의 젊은 나이에 약물과용으로 죽는다(혹은 자살한다). 로맹 가리는 세버그가 지난 9년 동안 딸이 죽은 날이 다가오면 매년 자살충동에 빠졌다고 밝혔다. 세버그가 죽은 날도 바로 그날 즈음이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로맹 가리는 세버그가 죽은 1년 뒤 자살한다. 유서에 세버그의 죽음과 관계없다고 썼지만,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서 세버그의 기구한 운명도 함께 떠올린다. 세버그는 정치적 부조리의 희생양이 됐지만, 세계영화사의 전환점이 된 걸작 <네 멋대로 해라>의 스타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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