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오! 마돈나]
[한창호의 오! 마돈나] ‘뉴할리우드’의 초상
2015-06-19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Faye Dunaway 페이 더너웨이
<네트워크>

프랑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영화 경향, 곧 누벨바그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청년들은 너도나도 장 뤽 고다르처럼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독일의 ‘뉴저먼 시네마’, 영국의 ‘브리티시 뉴웨이브’, 브라질의 ‘시네마 노부’ 등의 흐름이 그것이다. ‘새로움’을 갈망하는 이런 변화는 영화제작이 고도로 시스템화돼 있는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미친다. 청년들은 고비용의 스튜디오보다는 ‘독립영화’라는 소규모의 제작 시스템을 선호했다. 연출에서 상대적인 자유를 확보하여,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타일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 상징적인 작품이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이다. 바야흐로 ‘뉴할리우드’의 모험이 시작됐는데, <초원의 빛>(1961)으로 이미 스타가 된 워런 비티와 신인 페이 더너웨이가 주연으로 나왔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뉴할리우드’의 새로운 스타에 등극한 배우는 페이 더너웨이였다.

건달과 웨이트리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더너웨이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은 1960년대 청년의, 특히 여성의 심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텍사스의 시골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보니 파커(페이 더너웨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일상이 지겨워 죽을 지경이다. 창밖을 보니, 핸섬하게 생긴 건달이 그녀 엄마의 차를 훔치려 하고 있다. 보니는 “헤이, 보이!”라고 소리치며, 도둑질을 저지한다. 그런데 클라이드 배너(워런 비티)라는 청년은 당황하기는커녕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권총을 보여주며 자신은 차나 훔치는 좀도둑이 아니라, 은행을 터는 강도라고 소개한다. 보니도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오히려 총에 반했는지 감탄하는 표정으로 그 권총을 쓰다듬으며(의미는 다들 알 것이다), 은행을 턴다는 범죄에 스릴마저 느낀다. 만나자마자 보니는 운명처럼 클라이드의 애인이자 동료가 되고, ‘보니와 클라이드’(원제목)의 범죄의 ‘전설’이 시작된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1930년대의 유명한 은행강도 사건에서 스토리를 빌려왔다. 조셉 루이스 감독의 누아르 고전인 <건 크레이지>(1950)도 그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었다.

건달에 반해버리는 불량한 눈빛, 웨이트리스이지만 특별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여성잡지 모델 같은 헤어스타일과 유행을 타는 의상, 그리고 성적 관계에 대한 겁 없는 충동 등으로 더너웨이의 개성은 단숨에 각인됐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의 경제공황기다. 가난한 농민들, 도시의 하층민들은 은행 빚에 재산을 날리고, 집을 잃고, 길바닥에 쫓겨날 때다. 그래서인지 ‘보니와 클라이드’는 은행강도인데, 당시의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범죄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만큼 은행에 대한 반감이 컸고, 영화가 개봉될 때도 일부 관객은 강도들에게 감정이입까지 했다. 남성들은 클라이드가 은행에서 총을 발사하는 장면에서 사회적 울분의 표출은 물론, 성적 쾌감까지 느꼈다. 보기에 따라서는 클라이드가 보니와 사랑을 나누듯 은행을 터는 것 같기도 했다. 반면에 여성들은 보니가 강도질을 하는 순간에도 패션 매거진의 모델처럼 멋있게 치장을 하고, ‘갑갑한 세상’을 향해 총을 쏘아댈 때, 제도를 무시하는 그 무모한 태도에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말하자면 1960년대 반문화시대의 청년들은, 공황시대의 범죄영화에서 자기 시대의 고민을 그대로 읽고 있었던 셈이다.

페이 더너웨이는 단숨에 청년세대의 아이콘이 됐다. 제도와 전통에 대한 무시의 태도가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60년대 스타일의 ‘자유로운’ 기성복 패션은 새 세대의 자기선언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의 영화적 성취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반문화시대의 길들여지지 않는 청춘 같은 캐릭터는 잊혀지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보여준 패션 감각을 인용하는 영화들이 많았다. 그나마 케이퍼 필름인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감독 노먼 주이슨, 1968),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와 공연한 멜로드라마 <연인의 장소>(감독 비토리오 데시카, 1968) 등이 기억에 남을 정도다.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

페이 더너웨이는 대학 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하며 연기를 익혔다. 졸업 이후에는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경험을 쌓았다. 오토 프레민저 감독을 만나 <허리 선다운>(Hurry Sundown, 1967)에 출연하며 영화에 데뷔했는데, ‘독재’로 유명한 프레민저로부터는 좋은 기억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모습을 보고, 바로 그해에 아서 펜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역으로 캐스팅했다. 원래 당대의 스타였던 제인 폰다 또는 내털리 우드가 주연 후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인에겐 파격적인 기회였다.

1960년대의 히피세대, 정치변혁기, 청년문화를 상징하던 더너웨이는 30대를 맞아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잠시 헤매고 있었는데, 이때 만난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다. 더너웨이가 새로운 캐릭터를 찾아낸 작품이 바로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1974)이다. 당돌한 청춘이 아니라 많은 상처가 있는, 복잡한 심리의 히스테리컬한 캐릭터이다. 상대역인 잭 니콜슨이, 다시 말해 경험이 풍부한 남성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내면이 복잡한 여성을 연기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부친(존 휴스턴)을 사랑하고 증오하는, 부서질 것 같은 딸의 연기로 더너웨이는 심리묘사에서 최고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차이나타운>으로 더너웨이는 다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는 배우로 돌아왔다.

내면의 세계를 풍부하게 표현하는 능력은 시드니 루멧 감독의 <네트워크>(1976)에서도 빛났다. 방송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예시한 작품으로 유명한 <네트워크>에서 더너웨이는 시청률을 위해선 못할 짓이 없을 것 같은 맹목적인 프로듀서로 나왔다. 복잡한 내면이기보다는, 아예 내면이 부재하는 ‘텅 빈’ 캐릭터를 연기한 이 작품으로 더너웨이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더너웨이는 ‘뉴할리우드’ 시대라는 변화의 물결에 잘 올라탄 배우이다. 새 시대를 대변하는 청년들이 영화계로 몰려와 ‘새로운 영화’들을 내놓을 때 더너웨이는 ‘새로운 얼굴’로 등장한 것이다. 더너웨이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헤이, 보이!”(Hey, Boy!)라며 당돌하게 워런 비티를 부를 때, 그것은 옛 질서에 억눌려 살던 청년들(특히 여성들)의 자기선언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런 당돌하고 자신감 넘친 태도는 지금도 매력으로 각인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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