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쥬라기 월드>(2015)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 <레고무비>(2014) <그녀>(2013) <딜리버리 맨>(2013) <미스터 페이백>(2013) <무비 43>(2013) <제로 다크 서티>(2012) <머니볼>(2011) <죽여줘! 제니퍼>(2009) <딥 인 더 밸리>(2009) <신부들의 전쟁>(2009) <원티드>(2008) <위너스>(2008) <스트레인저스 위드 캔디>(2005) <커스 파트3>(2000)
TV영화 <저지먼트 데이: 지구붕괴>(2005)
TV시리즈 <파크스 앤드 레크리에이션>(2009~2015) <오씨>(2006~2007) <에버우드>(2002~2006)
마블의 진짜 신데렐라는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 프랫일지 모른다. 대개는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를 연기하던 이 푸근한 외모의 남자가 단 일년 만에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승승장구하는 톱배우가 되었으니 말이다. 프랜차이즈 <레고무비> 주인공의 목소리 연기를 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출연하기 전 프랫은 아무 역할로나 써도 좋을 애매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마도 캐스팅 디렉터 새라 핀은 TV시리즈 <파크스 앤드 레크리에이션>의 팬이었던 모양이다. 감독 제임스 건은 새라 핀이 주인공 ‘스타로드’ 피터 제이슨 퀼 캐스팅 리스트에 올려둔 프랫을 소위 ‘듣보’ 취급했다. 새라 핀이 리스트에 프랫의 이름을 올려두는 족족 제임스 건은 줄기차게 그를 내쳤다. 당시의 프랫을 떠올리자면 그럴 만도 했다. 새라 핀은 마지막 카드를 내놓는 심정으로 프랫을 제임스 건 앞에 직접 데려다놓았고, 제임스 건은 눈앞에 나타난 프랫을 단박에 그의 우주로 초대했다. “그때 프랫은 여전히 투실투실했다. 하지만 단 20초 만에 나는 내가 찾던 그 남자가 나타난 걸 알았다. 심지어 거의 울 뻔했다!” 생애 최대 위기의 순간을 뜬금없는 춤으로 피해가는 허풍과 유머, 끊임없이 비웃음당해도 기죽지 않는 긍정과 뻔뻔한 처세술, 낙천의 그늘에 가려진 약간의 어두움까지. 프랫은 그대로 스타로드의 현신이었다. 숱한 무시와 조롱을 딛고 우주를 구하는 히어로의 삶은 산전수전 다 겪고 자수성가한 프랫의 삶 그대로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프랫은 집 근처 대학에 진학해 한 학기만 다니고 바로 중퇴했다. 그는 도시에 머무르는 대신 하와이 마우이로 날아가 지냈다. 적당한 거처없이 해변이나 텐트, 차에서 노숙을 하던 때도 있었다. 낙천주의는 여전했다. “시카고의 길바닥이었다면 쓰레기나 주워 먹고 살았을 거다. 마우이에선 집 없이도 끝내주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직업이라 부를 만한 일은 없었다. 대개는 시간을 쪼개 남의 집 담장을 칠하거나 잔디를 깎았고, 집집마다 들러 과일이나 쿠폰을 팔기도 했다. 경비원으로도 일했고, 야간엔 스트리퍼가 되거나 짧은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강림한 건 그즈음이었다. ‘부바검프’(<포레스트 검프>를 모티브로 해 만들어진 새우요리 전문 레스토랑 프랜차이즈)에서 일하던 프랫은 그곳을 방문한 배우 겸 감독 래 돈 총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수호천사나 다름없었다. 그녀에겐 4일간 촬영장에 나와줄 배우가 필요했고, 나는 새로운 문을 열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녀를 만나고 마침내 나의 세상이 바뀌었다.” 프랫은 래 돈 총의 단편영화 <커스 파트3>에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로 프랫은 TV시리즈 <에버우드>에 출연하면서부터 얼굴을 알렸다. 시골 에버우드의 일상을 그린 드라마로, 프랫은 의사 집안의 장남 브라이트를 연기했다. 브라이트는 그의 꿈이었던 “그냥 악역이나 ‘모지리’ 이상의” 괜찮은 청년이었다. 프랫에겐 자신을 더욱 도약하게 해줄 발판이 필요했다. 그 무렵 촬영된 대부분의 영화들, <아바타>(2009)의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의 커크 선장(크리스 파인),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의 듀크(채닝 테이텀) 역으로 오디션을 보았으나 모두 실패였다.
“어떤 역할이든 얼마든지 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할리우드는 아직 그를 원하지 않았다. 간혹 프랫을 원하는 감독도 있었으나 그의 역할은 <신부들의 전쟁>의 존재감 없는 약혼자, <죽여줘! 제니퍼>의 제니퍼를 좋아하는 초짜 경찰, <딥 인 더 밸리>의 변태 친구 등 누구로 갈아치워도 무관한, 웃기거나 찌질한 캐릭터들 뿐이었다. 프랫만 한 배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때 TV시리즈 <파크스 앤드 레크리에이션>이 프랫의 점프를 도왔다. 가상 도시 포니 시청의 공원여가부가 배경인 오피스 드라마의 앤디 드와이어는 지금껏 그가 맡아온 역할의 총집합이었다. 지저분하고 무책임한 데다 헤어진 연인의 집 앞에서 노숙하며 그녀의 새 사랑을 방해하는 앤디는 너드 중의 너드, 변태 중의 변태였다. 첫 시즌만 해도 모두가 싫어하는 루저였던 앤디는 두 번째 시즌부터 새 연인과 직업을 갖게 되며 포니시의 최고 귀염둥이로 발돋움한다. 관록 있는 코미디 배우들과의 협연은 프랫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레슬리(에이미 폴러)가 앤디의 (팬티만 입은 채로) 벗은 모습을 보고 놀라는 장면에서 프랫은 ‘진짜’ 얼굴을 보려고 전라로 잔디를 뛰어다녀 폴러를 진심으로 경악하게 했고, 촬영장에선 한시도 장난과 춤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 큰 덩치로 애교를 부리다 세트며 소품을 부서뜨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식탐과 허세, 호빵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배, 빗지 않은 곱슬머리, 대책 없는 낙관주의까지도 앤디를, 프랫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앤디 덕에 프랫은 더 다양하고 많은 역할을 받을 수 있었다. <머니볼>에선 우수한 야구선수 스캇 해티버 그를, <제로 다크 서티>에선 믿을 만한 군인 저스틴을 연기했다. <딜리버리 맨>에선 주인공의 친구이자 그를 돕는 변호사 브렛으로, <그녀>에선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를 위로하는 편지회사 직원 폴을 연기했다. 목소리 출연이기는 하나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 <레고무비>의 주인공 역까지 따냈다. <쥬라기 월드>에선 <쥬라기 공원>의 샘 닐을 연상시키는 해군 출신의 공룡훈련 교관 오웬 역을 꿰찼다. 오웬은 만인을 구할 주인공답게 용맹하고 프로페셔널하며 “소개팅 자리에 수영복 팬티를 입고 나올” 정도로 격식에 매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모두의 사랑을 받을 현대적인 쾌남으로 프랫만 한 배우도 없었다.
<레고무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쥬라기 월드>까지 주연을 맡은 프랜차이즈영화 세편이 모두 북미 박스오피스 수익 2억달러를 돌파하면서 프랫은 명실상부한 대세 배우로 수직 상승했다. <쥬라기 월드>는 역대 북미 오프닝 수익, 해외 오프닝 수익, 북미를 포함한 월드와이드 오프닝 수익까지 모두 신기록을 세웠다. 지난해엔 <피플>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자’ 2위에까지 오른 바 있다(1위는 크리스 헴스워스다). 프랫의 가장 큰 매력인 타고난 낙천주의와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다정한 면모, 체중 감량으로 환골탈태해 제자리를 되찾은 잘생긴 이목구비 못지않게 그칠 줄 모르는 개그 욕심도 인기에 큰 몫을 했음이 틀림없다. 주가 최고조인 스타 배우가 SNS에 “<쥬라기 월드>의 프레스 투어에서 우발적으로 말하게 될 무언가에 대해 미리 사과하는 사과문”을 (구구절절하기까지 한) 장문으로 써서 올리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촬영현장에 대해 묻는 인터뷰어에게 짐짓 진지한 얼굴로 “공룡과 함께 촬영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린 모두 살아남았다. 물론 촬영 중단 한 마리의 공룡도 다치지 않았다!”고 답하는 것 역시 그렇다. 어쨌든 안톤 후쿠아가 만드는 <황야의 7인> 리메이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두 번째 편과 더불어 프랫은 또 한번의 우주 출정을 준비하고 있다. 제니퍼 로렌스와 함께 새로운 행성을 찾아나선 남녀의 로맨스를 그리는 모튼 틸덤의 신작 <패신저스>에 출연하기 때문이다. 애초 약속된 출연료인 1천만달러보다 200만달러를 추가로 더 받게 됐다고 한다. 진정한 ‘우주 대스타’가 또 한번 강림할 날을 기다려보자.
에밋 대단~해!
크리스 프랫이 목소리 연기를 맡은 <레고무비>의 미니피겨 에밋은 동료들로부터 누구였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흔한 캐릭터다. 취향도 기호도 없고 그저 “모든 게 다 멋져!”(“Everything is awesome!”)라고 외치는 긍정적인 인물. 그러나 에밋은 세상을 전복할 잠재적 독창성을 부여받은 인물이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만 있게 하려는 프레지던트 비즈니스(윌 페렐)로부터 세계를 구할 ‘스페셜 마스터빌더’를 찾아다니는 와일드스타일(엘리자베스 뱅크스)은 에밋에게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고, 재능이 넘치며 특별한 사람, 그게 당신이란 거죠. 내 말이 맞죠?” 비로소 에밋은 자신이 굉장하고 특별한 피겨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