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우연이다. 지난번 <쳐다보지 마라>에 관해 쓰면서 이 영화를 떠올렸었다. 로빈 하디의 <위커맨> 말이다. <쳐다보지 마라>와 같은 해에 만들어졌다. 둘 다 영국산 컬트영화를 대변하다시피하는 작품이다. 미국 개봉 때에는 두 영화가 묶여서 동시상영으로 배급되었다. 두편 모두 해괴하고 불균질하며 상영 내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질감을 가진, 아무튼 도대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쳐다보지 마라>에는 도널드 서덜런드가 나온다. <위커맨>에는 크리스토퍼 리가 나온다. 두 사람 공히 해괴한 취향을 가진 영화광들에게 어딘가 사연 있는 동네 국밥집 아저씨 같은 배우다. 그런데 지난주 갑자기, 그러니까 집에 돌아와 바지를 벗다가 다른 한쪽 다리가 채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너를 체포한다는 말을 듣는 것마냥 갑작스럽게
크리스토퍼 리가 죽었다.
크리스토퍼 리가 죽었다, 는 문장은 흡사 “오늘 우리 회사 구내식당 점심 메뉴는 김치찌개에 낙타 고기야”, “아니 또?”라는 대화처럼 이상하다. 참을 수 없이 괴상하다. 드라큘라에 사루만에 두쿠 백작에 서머아일 영주였던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것인가. 크리스토퍼 리는 1958년 <드라큘라>에서도 늙었었고 73년 <위커맨>에서도 늙었었고 74년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007과 싸울 때도 역시 늙었었으며 2000년대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도 꾸준히 늙었었는데 이제 와 새삼 늙었다는 게 세상을 떠날 이유로 합당한 것인가. 아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때로 어떤 배우가 영원히 살겠거니 하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주는 <위커맨>을 추억하며 크리스토퍼 리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위커맨은 고대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인신공양을 하는 의식을 펼칠 때 사용했던 구조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사람 모양의 우리를 만들고 그 안의 칸마다 제물을 가둔 채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위커맨이 실재했느냐에 관한 논쟁은 무척 오래됐다. 갈리아 전쟁기에 언급만 될 뿐 가공의 신화적 가십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냥 상상의 산물로만 생각하기에는 문헌 속에서의 묘사가 구체적이고 일관되어 있다. 일단 역사 속 인신공양 그 자체는 확정적인 증거들이 넘쳐난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몇개의 컷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에드워드 우드워드가 연기하는 경찰관 하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얼마 전 약혼을 했다. 이후 언급되다시피 그는 아직 동정의 몸이다. 이 동정의 꼰대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가 동정의 꼰대라는 사실은 농담거리라기보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왜 그여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응하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하위가 어느 소녀의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서머아일이라는 이름의 섬을 찾으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항구에서부터 일이 삐걱댄다. 항구에서 만난 노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위가 찾고 있는 소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평온한 얼굴 사이로 문득문득 삐져나오는 불쾌한 웃음은 이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쉽게 감지하게 만든다. 실종된 소녀의 어머니도 그런 소녀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숙박을 위해 찾은 펍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위는 자신이 이 섬의 사람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걸 간파한다. 사실 모를 수가 없다. 정교한 거짓말이라기보다 참기 어려운 웃음을 눌러가며 늘어놓는 빈정거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위는 섬을 둘러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문화 충격에 휩싸인다. 이 섬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대신에 고대의 자연신들을 섬긴다. 뿐만 아니라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성교에 관련된 말과 행동을 한다. 밤이 되면 들이며 길 위에서 너도나도 자연스레 뒤엉켜 섹스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의 주제가 섹스다. 아이들은 남근상 주변을 빙빙 돌며 춤을 추고 뛰어논다. 이 섬에서 공공연한 섹스는 금기가 아니다. 자연의 풍요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되레 학습과 사회화를 통해 권장된다.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진격의 기독교인 하위는 거의 통증에 가까운 분노와 환멸을 느낀다.
하위의 증오심은 이 섬을 다스리는 서머아일 영주를 만나면서 극에 달한다. 크리스토퍼 리가 연기하는 서머아일 영주는 우아한 몸짓으로 낡은 종교 대신에 채택한 자연신 숭배가 이 섬의 풍요로움과 평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설명한다. 하위와 서머아일 영주의 종교적 가치관이 격돌하는 이 장면에서 크리스토퍼 리의 연기는 과연 압도적이다.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확정적이다. 그 발음 하나하나가 음악처럼 관객의 귀를 휘감아 적신다. 시를 읊듯 뱉어내는 서머아일 영주의 웅변은 장엄하다. 그러나 그것은 설득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구역질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하위는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차 영주의 집을 나선다. 이교도 나부랭이들에게 질릴 대로 질린 하위는 이 섬 어딘가에 소녀가 살아 있으며 마을 축제날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5월1일 축제날. 가면을 쓰고 축제 행렬에 숨어든 하위는 드디어 섬의 비밀과 마주한다.
<위커맨>에서 하위와 서머아일 영주는 종교적 신념에 근거하여 상대를 쉽게 판단하고 행동하며 비이성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는 점에서 서로를 투영한 거울상과도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좀더 유효하게 꼬집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 하위의 억압되고 비틀린 욕망이다. 자연스레 하위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던 당대의 관객은 극 후반 하위의 눈앞에 위커맨이 등장한 순간 겁을 집어먹고 비명을 질러댔다. 이 순간은 이야기를 전부 다 알고 영화를 다시 보는 관객에게도 여전히 섬뜩하다. 이상하게 주눅이 들고 빨려들어가는 듯한 장면이다. 그것은 이성이나 종교관으로 간파할 수 없는, 너무나 상스럽고 압도적으로 거대한 고대로부터의 불온함이다. 한없이 견고하게만 느껴졌던 기독교 세계관이 저 불온한 풍경 앞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경험, 이것이야말로 저 흔한 신체훼손 장면 하나 없는 <위커맨>이 가장 무시무시한 영화의 목록들 가운데 영원히 회자되고 언급되는 이유다.
<위커맨>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사실 마을의 기이한 풍경을 다룰 때마다 펼쳐지는 노래들이다. 정서적으로 그 위력이 커서 <위커맨>을 뮤지컬영화로 생각하게도 만든다. 이 괴상하고 기발한 노래들은 꿈인지 환영인지 농담인지 연극인지 알 수 없는 이 영화의 비틀린 현실감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 가운데 크리스토퍼 리가 피아노를 치며 묵직한 저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다. “주전자가 많이 깨졌군요, 우리 예쁜 아가씨. 못을 많이 박아서 그렇게 된 거랍니다. 성할 리가 없지요.”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노래를 자꾸 다시 듣게 되는 밤이다. 나의 위대한 암흑의 군주, 저 모든 악취미들의 제왕. 부디 편히 잠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