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전선 이상있다?’ 최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의 초반 성적을 두고 충무로의 혹자는 제작사인 좋은영화, 그것도 김미희(38) 대표의 ‘선구안’이 예전 같지 않다고 수군댈지도 모르겠다.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시작으로 지난해 <선물>과 <신라의 달밤>까지, 연달아 내놓은 영화 세편의 평균 서울관객 수가 100만명. 매번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호타준족’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의 초반 기세가 대단한 돌풍을 예고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김 대표는 조급해하는 기색도 아니었고, 당황스런 눈치도 아니었다. 늦잠을 자고 나왔다는 그는 이번 영화가 앞으로 자신의 관심이 가닿는 지점을 분명히 보여준 것에 대해서 오히려 만족스럽다고 했다. 또 ‘흥행제조기’라는 패찰을 고수하는 것보다는 이제껏 미뤄둔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어간다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장규성, 김영호 감독 외에도 그는 얼마 전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과 <낮은 목소리> 시리즈로 알려진 변영주 감독을 끌어들였고, 류승완 감독의 차기작에도 힘을 불어넣었다. 바깥이 어둑해질 때까지 이어진 2시간의 인터뷰는 앞으로 그가 예고한 변화의 전조를 감지하기에 충분했다.
-청바지 차림은 처음 본다.
=봄맞이 행사로 봐달라. 변화를 주려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혹시 <피도 눈물도 없이> 성적이 저조해서 기분전환하려고 그런 건가.
=무슨 소리? (웃음) <피도…>는 류승완이라는 개성있고 아이디어 많고 에너지 넘치는 감독과 작업하고 싶어서 시작한 영화다. 또 결과적으로 그 부분에 대한 평단의 반응도 충분히 끌어냈다. 거기에 전도연이 변신했고 이혜영 선배가 돌아왔으니 애초 목표는 이뤘고, 지금은 해피하다. 돈 들였으니 흥행도 좀 되면 좋겠다는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부차적인 거였다.
-생소한 장르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사회가 암울해서 그런지 아직은 관객이 밝은 영화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주유소 습격사건>만 하더라도 통쾌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소재 자체가 칙칙해도 됐지만, 이 영화는 가장 어두운 밑바닥 생활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한 면이 있고, 아직 그런 것에는 호응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요즘 감독에 대한 욕심이 부쩍 많아졌다.
=결국 영화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감독. 누구랑 같이 가느냐가 앞으로 그 영화사가 계속 굴러갈 수 있을지를 결정하니까. 내게 없는 장점들을 품고 있는 감독들이 좋다. 제작자라면 다들 그렇지 않나?
-<피도…>를 시작으로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김상진 감독이 따로 영화사를 차려 나간 뒤에 뭐가 변한 건가. 품고 있던 욕심을 슬슬 풀어놓는 것 같다.
=김상진 감독이 딴살림 차렸다고 달라진 거 없다. 요즘도 매일 보다시피 한다. 가끔 분당의 작업실 습격해서 시나리오 안 쓰고 게임하고 있으면 뭐하는 짓이냐고 ‘야지’놓기도 하고. 심심했는지 조만간 우리 위층으로 다시 이사온다고 그러더라. (웃음) 김 감독하고 같이 시작할 땐 흥행 확률이 높은 작품들 위주로 간 게 사실이다. 대박이 터질 줄 몰랐지만. 근데 앞의 작품들이 너무 강하다 보니, 나중에 다른 걸 하고 싶은데도 계속 코미디만 들어오는 거다. 그래서 류승완 감독이 이 시점에서 꼭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김용균 감독의 <신데렐라>나 변영주 감독의 <밀애>(가제)는 개인적인 호감도 작용한 것으로 아는데.
=<와니와 준하> 시나리오를 봤는데, 순정만화의 감성을 그대로 옮겨놨구나 했다. 내가 원래 순정만화 광팬이다. 그거 보면서 김용균 감독은 섬세한 코미디를 곁들인 이야기도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기회가 돼서 같이 하게 됐다. 변영주 감독은 사회적인 발언을 많이 해서인지 만나기 전엔 좀 딱딱할 거라 생각했다. 근데 여성영화인 모임에서 만나 보니 이렇게 유쾌한 사람이 있나 싶더라. 코미디영화를 맡기고 싶을 정도로. 그러다 얼마 전에 신혜은 프로듀서로부터 <밀애>를 소개받았고, 변 감독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구상을 30분 정도 들었다. 격정적인 멜로영화이지만, 인물들이 그 과정에서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의욕도 좋았다. 몇몇 장면에 대한 이미지 설명에서는 굳이 말로 풀어놓지 않아도 될 만큼 감독의 의견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김지운 감독처럼 어떤 장르를 시도해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능력을 갖춘 감독인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본인은 안 한다고 하지만, <밀애>(가제)가 끝나면 코미디영화 한편 하자고 조를 거다.
-감독들 붙잡고 수다를 즐기는 걸로 유명하다.
=수다는 아니고 그냥 커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편한 자리 만들어서 유년 시절, 첫사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감독을 닮는 거라고 본다. 수다처럼 보이지만, 그런 자리는 내겐 일의 연장인 셈이다.
-<밀회>라고 불렸던 변영주 감독의 프로젝트는 이전에 캐스팅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좋은영화의 캐스팅 파워에 대한 기대가 없진 않을 텐데.
=그런 게 어딨나. 절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개봉할 때보다 캐스팅할 때 훨씬 스트레스를 받는다. <신라의 달밤> 때도 김상진 감독하고 눈물의 빵을 나눠 먹었고, <선물> 때는 장염에 걸릴 정도였다. 그때는 또 병원이 파업해서 혼자 끙끙 앓아누워 고생했다. <피도…>도 전도연을 캐스팅한 데는 류승완 감독의 명성이 컸고. 패러디영화인 <재밌는 영화>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보면 하루 만에 ‘뚝딱’ 된 걸로 보이지만, 조금씩 작업해서 얻은 결과들이다. <밀애>도 다음주부터 캐스팅 들어가야 하는데 한숨이 나온다. 그렇게 고민하고 사람 만나다 보면 얼굴이 좋아질 리 없다.
-제작자로서 장단점에 대해 자평한다면.
=아이템을 직접 쓰는 것도 아니고, 비즈니스적 마인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만나는 사람들이 자기 장점을 잘 펼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줄 정도다. 괜한 겸손의 말이 아니다. 정말이다. 그거 하나로 버텨왔고, 버티는 것 같다. 인복이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현장 경험이 없어 제작자로서 겪은 어려움은 없나.
=시네마서비스에서 기획이사로 있을 때도 강우석 감독님에게 제작일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매번 그러마 해놓고서 결국 간청을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현장 가면 열심히 물어본다. 카메라 기종이나 조명기기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솔직하게 ‘이건 뭐냐, 뭐가 좋나’ 스탭들에게 알려달라고 한다. 그거 모른다고 해서 뭐라 그러는 사람은 없으니까.
-주위에서 가끔 ‘못됐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집이 세다고 들었다.
=근성이나 오기 같은 거 중학교 들어가면서 몸으로 체득한 것 같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난 빨간 똑딱이 구두도 혼자 못 신는, 매번 징징대는 그런 애였다. 긴 머리 땋아주는 것부터 엄마가 항상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했으니까. 그러다 중학교 때 아버지 사업 실패로 집이 넘어가게 됐고,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됐다. 그게 어떤 계기였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은 우리집이 그렇게 가난한지 몰랐다. 얼굴도 하얗고 그런 애였으니까. 그때는 누가 어디 놀러가자고 해도 ‘나 일찍 가야 되거든’ 하고 집에 와서는 밥하고 살림했다. 남들보다 부지런해야 했던 시절이었고, 그게 쭉 이어진 것 같다. 지금도 내가 맞다고 판단되는 건 무조건 밀고 나아간다.
-영화계에 들어와서 겪은 전환점도 있을 것 같다.
=<투캅스3>. 시리즈의 후광이 있으니 이건 대충 만들어도 되지 않겠어, 하고 김상진 감독하고 안일하게 시작했던 게 실패의 이유였다. 너무 참패를 당해서, 둘이서 그때 서로 말도 안 하고 아침 11시부터 술을 먹었다. 술도 못 먹는 내가 그랬으니 심정이 오죽했겠나. 근데 김 감독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투캅스3>가 있었기 때문에 <주유소 습격사건>에 더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았나 싶다. 시나리오가 좋았지만, 그렇게 안 덤볐으면 그 정도로 흥행이 안 됐을 거다. 그때 이것도 안 되면 늙은 남자한테 시집을 가거나 다 접고서 어디 취직을 가거나 하는 뭐 그런 생각까지 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품만 해도 꽤 된다.
=<신데렐라>와 <밀애> 외에도 얼굴에 딱 ‘멜로’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것 같은 김영호 감독의 <유월>이 있다. 오래된 러브스토리를 세련되게 풀어나가는 멜로영화다. 와 왕가위 영화의 중간 느낌 정도라고 하면 될까. 또 <재밌는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 장규성 감독의 <선생 김봉두>라는 시나리오가 있다. 휴먼코미디인데 촌지를 밝히는 선생이 낙도로 쫓겨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제 곧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도 있고.
-멜로와 코미디영화가 주를 이루는데, 아무래도 멜로영화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멜로적인 감성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제작에 들어가도 접근하는 게 조금 다르다. 코미디영화는 큰 틀에서 이야기가 통하면, 주로 감독과 작가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믿고 맡기는 것은 똑같지만, 멜로영화는 소소하고 디테일한 부분에서 의견도 많이 내는 편이다.
-멜로영화에 대한 관심은 사실 일상에서 멜로적인 상황을 많이 못 접해서 그런 것 아닌가.
=무슨 말인가. 나도 멜로 많다. (웃음) 내가 살아온 햇수가 몇인데 멜로 없었으면 어떻게 하나. 물론 연애 하면 ‘너는 내 인생에 들어온 거니까 무조건 내 인생에 맞춰야 돼’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이 되게 힘들어하고, 무서워하긴 하지만. (웃음)
-개인적으로 도전해 보고픈 장르가 있나.
=굉장히 감동적인 역사물이나 신나는 어드벤처영화를 언젠가 하고 싶다. 어드벤처 경우에는 한때 잠깐 준비를 했었는데, 우리나라 시장 환경에서 아무래도 처음 10분 동안 공감대를 끌어내기가 어렵더라. 그게 안 되면 이후 전개가 황당무계한 것 이상은 아니잖은가. 소재는 갖고 있는데, 언젠가는 그런 영화를 하고 싶다. 내 조카들이 보고서 ‘우리 이모가 저걸 만들었어’ 할 수 있는 그런 영화. 옛날에 내가 보면서 좋아했던 것처럼. 어드벤처와 판타지와 휴머니즘이 골고루 섞인.
-그렇게 일 욕심이 많은데도, 공언한 것처럼 몇년 뒤에 다른 일 찾아 할 수 있겠나.
=영화를 접는다는 게 아니었다. 근데 그 말 하고 나서 오랫동안 같이 작업해온 박정우 작가가 그런 이야기 하면 밑의 사람들은 어떡하냐고 해서 놀랐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영화를 그만두겠나. 다만 개인적으로 엉뚱한 일을 벌이고 싶다는 욕심을 털어놓은 것인데 그게 와전됐다. 그게 어떤 건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털어놓을 수 없지만, 영화와는 아주 먼 분야의 일이다. 돈이 되는 일은 절대 아니고, 정신적으로 좀더 안락해지는 뭐, 그런 종류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