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박해천의 영화비평] 아파트, 마카오, 컨테이너 박스
2015-07-10
글 :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공간을 통해 추적한 정재곤에 관한 서사
<무뢰한>

아파트에 포위된 풍경들

형사가 차에서 내려 걸어가면, 영화가 시작된다. 강력계 형사 정재곤의 눈앞에서는 거대한 타워크레인들이 아파트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중이다. 이 아파트들은 재개발 열풍이 도시에게 안겨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도시는 고도성장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춘을 꿈꿨고, 아등바등 살던 사람들은 아파트 한채 면적만큼의 행복을 상상하며 중산층의 삶을 꿈꿨다. 물론 밀려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에 밝지 못한 이들은 어디에나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에게 ‘기회’란 상승을 위한 도약대가 아니라 삶의 예측 불가능성만 증가시킬 뿐인 선택의 기로였다.

정재곤은 아파트 건설 현장에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심히 주차장을 걷는다. 그 역시 남들처럼 부동산 열풍에 기대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 그 시도는 실패했을 것이고, 가정은 파탄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범인을 쫓되 돈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아파트의 풍경이 매번 정재곤을 포위한 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나 그 풍경과 마주칠 수밖에 없지만 결코 그 풍경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삶의 표준 궤도에서 이탈한 그에게는 신기루일 뿐이다.

이제 살인 사건 현장으로 향할 차례다. 2층 주차장에서 지상으로 내려가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새벽녘의 재래시장에는 음습한 분위기가 감돈다. 팽창의 속도에 휩쓸려 한때는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죽음을 기다리며 늙어가는 공간. 재개발의 정밀 폭격에서 비껴선 그런 공간들은 낮은 지붕들로 제 몸을 가리고선 도시 곳곳에 움푹 파인 시간의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거기에서 시간은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급속도로 쪼그라든다. 이 재래시장도 그런 공간 중 하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공간일수록 어김없이 독특한 퇴락의 지표를 전시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정재곤의 눈에 띈 것은 살해당한 조폭 애인의 발이다. 진홍색 페디큐어를 한 채 싸구려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발. 아마도 그녀는 인근 싸구려 술집의 작부일 것이며, 죽은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늙은 포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던 상승의 동아줄. 이제 남자가 죽었으니, 그녀의 삶은 한번 더 무너져 내릴 것이다. 정재곤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밑바닥과 밑바닥의 밑바닥

김혜경은 추락 중이다. 강남 룸살롱의 텐프로에서 조폭 두목의 세컨드를 거쳐 성남 단란주점의 새끼 마담까지, 그녀의 행로에는 거칠 것이 없다. 그런 가운데에도 마지막 희망만큼은 버리지 못한다. 애인 박준길이라면 자신을 구원해줄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박준길이 자신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그녀는 애인의 도피를 돕기 위해 마지막 재산이던 월세 보증금마저 뺐다. 그 집에 살 때만 해도 보통 사람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원룸이나 투룸이 아니라, 소형 평형대 아파트의 실내 배치와 유사한 신축 다가구주택을 선택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버리지 못한 꿈과 희망이 너무 많아서 그녀의 인생은 더욱 가파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박준길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 김혜경의 꿈과 희망에 동참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사실 5억 빚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녀의 보금자리는 성남의 낡은 허름한 언덕배기 아파트다.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다. 도망자 애인을 맞이할 매트리스 한장만 방바닥에 깔려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아파트에서 단란주점 ‘마카오’까지의 거리가 그녀의 새로운 행동반경이다. 저녁 무렵이면 주변 고깃집을 들러 한복을 입고선 직장인들을 호객하고, 새벽녘의 퇴근길에는 ‘원조신내양평서울해장국집’에 소주잔을 기울인다. 그녀는 이 공간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고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걷는다.

물론 일상의 동선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혹시라도 외상 빚을 받기 위해 강남으로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명품 대여업체는 필수 코스다. 이전 단골이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퇴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텐프로 시절의 ‘김혜선’으로 변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애인의 죽음과 함께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실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자의 ‘진심’에 대한 믿음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 정재곤이 죄의식에 찾아가는 인천 송림동의 뒷골목은 상승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제거된 밑바닥의 밑바닥, 림보(limbo)다. 원망과 분노는 모두 휘발되어버리고 체념만이 생존의 기술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김혜경은 부엌칼을 집어 든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정재곤에게 터벅터벅 다가가 그의 복부를 찌른다. 포옹의 순간도 잠시, 김혜경은 흐느끼며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고, 정재곤은 배에 칼을 꽂은 채로 뒷골목을 빠져나와 언덕길을 내려간다. 그의 등 뒤로는 어김없이 도심의 아파트 단지들이 흐릿하게 펼쳐진다.

용산의 첫 만남에서 봉변을 당할 때만 해도 제이인베스트먼트의 민영기 상무는 정재곤을 그저 ‘또라이’라고 생각했다. 궁한 사정을 뻔히 아는데도 똥폼 잡으며 스폰서를 거절하더니만, 두목의 전 애인이자 배신자의 애인인 김혜경과 붙어먹을 궁리를 하다니, 한마디로 ‘미친놈’이었다.

컨테이너 박스와 단칸 셋방 사이

상무 직함이 박힌 명함을 들고 다니기는 하지만, 사실 민영기는 신도시 건설 현장의 컨테이너 박스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변기나 수도꼭지를 납품하면서 두목의 사생활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똘마니로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과거를 떠올려보면, 나름 성공한 인생이다. 주제 파악에 능하며 눈치가 빠르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절대 넘지 않는다”는 것이 민 상무의 최대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장점 덕분에 별다른 재주 없이 승진도 하고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물론 서대문쪽에서 놀던 ‘홍은동 뽀빠이파’의 오야붕이 부동산 이권 사업을 통해 제이인베스트먼트의 이사장으로 변신하는 과정과 비교해보면,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민 상무는 얼마 전 아빠가 되었다. 이사장 노친네의 눈에만 제대로 들 수 있다면, 컨테이너 박스와 단칸 셋방을 오가던 ‘에쿠스’가 중산층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로 향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자식만큼은 부모와 때깔이 다른 인생을 살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현실주의자 민 상무가 보기에 정재곤은 한심한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채로 어른들의 세계에서 밀려난 ‘소년병’ 환자라고나 할까?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런 ‘무뢰한’ 같은 인간들은 꼭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고 다니면서, 덜떨어진 현실 감각에 타인에 대한 서툰 연민을 뒤섞어 자기만의 ‘신파’를 완성해 보이려고 발버둥친다. 그렇다면 민 상무가 인천 송림동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러고 돌아다니니까 김혜경 같은 년에게 칼침이나 맞고 그러는 거지”라고 혼자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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