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헬렌 헌트] 투명하게 역할에 스며들기
2015-07-14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헬렌 헌트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2012) <덴 쉬 파운드 미>(2007)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2000) <캐스트 어웨이>(2000) <왓 위민 원트>(2000)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

배우들이 연출로 자신의 새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제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아역배우로 시작해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거치며 스타로 성장한 다음, 나름의 저예산 독립영화로 영역을 옮겨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놓는 배우, 감독들을 우리는 여럿 보아왔다. 여배우, 감독만 치더라도 (조금씩 다른 경로를 거치긴 했지만) 조디 포스터나 소피아 코폴라, 그리고 최근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안젤리나 졸리 등이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이들에 비하면 헬렌 헌트는 꽤 조용한 ‘감독 신고식’을 치른 편이다. <라이드: 나에게로의 여행>(이하 <라이드>)은 2007년 <덴 쉬 파운드 미>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한 그녀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사실 <라이드>의 출발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헬렌 헌트는 하와이에 여행 갔다가 서핑을 하던 한 여자가 서핑을 끝내고 물 밖으로 나와 깨끗한 물로 가슴을 헹군 뒤, 해변가에 누워 있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보고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서핑하는 엄마’(a surfing mom)라는 이미지만 붙들고 몇년을 씨름한 끝에 헬렌 헌트는 지금의 이야기를 완성해냈다. 첫 번째 영화 <덴 쉬 파운드 미>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출발점으로 한 작품임을 떠올려본다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라이드>가 결국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첫 번째 이야기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헬렌 헌트는 유명한 잡지사 편집자이지만, 대학에 입학해 곧 집을 떠나갈 아들 앤젤로(브렌턴 스웨이츠)의 빈자리에 안절부절못하는 ‘아들 바보’ 싱글맘, 재키로 직접 출연한다. 오랫동안 매달렸다던 이미지의 강렬함에 비하면 이야기는 어딘가 심심해 보이지만, 헬렌 헌트는 욕심내지 않고 단조로운 이야기에 모나지 않은 색을 차곡차곡 입혀나간다. 그런데 연출과 연기를 모두 담당했기 때문일까? 영화에서 그녀는 일종의 ‘중재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은 신인인 브렌턴 스웨이츠를 위해 자신의 연기 톤을 조율해나간다. 최근 <더 기버: 기억전달자>(2014)와 <더 시그널>(2014)의 주연을 연달아 거치며 새로운 ‘훈남’ 블루칩으로 떠오른 브렌턴 스웨이츠이지만, 40년이 넘는 연기 경력을 가진 헬렌 헌트와 대당을 이루며 극을 끌고 나가는 것은 아직은 힘이 달리는 게임일 수밖에 없다. 이때 연출자로서 헬렌 헌트가 브렌턴 스웨이츠의 잠재력을 포착해냈다면, 오랜 경험을 가진 베테랑 배우로서 헬렌 헌트는 영화 전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헬렌 헌트는 언제든 자신의 몸을 낮출 줄 아는 배우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그런 ‘속 깊은' 배우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연기지도자이자 감독이기도 했던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연기를 ‘천직’으로 여길 것 같지만, 막상 그녀는 연기를 그저 ‘재미있는 일’ 혹은 ‘현장에 가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일’ 정도로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빠른 데뷔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한 조•단역 시절을 거쳐야만 했다. <트랜서>(찰스 밴드, 1985), <페기 수 결혼하다>(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86), <토요일 밤의 남자>(빌리 크리스털, 1992), <밥 로버츠>(팀 로빈스, 1992) 등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평범에 가까운 외모 탓인지 아니면 그저 운이 없었던 탓인지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오디션마다 떨어지고, 제대로 연기할 기회조차 거의 얻지 못했던 헬렌 헌트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1992년, TV시리즈 <결혼 이야기>였다. 뉴욕에 살고 있는 신혼부부가 겪는 에피소드를 시트콤 형식으로 엮어낸 이 작품을 통해 헬렌 헌트는 에미상을 네 차례나 수상하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뒤이어 출연한 <트위스터>(얀 드봉, 1996)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헬렌 헌트는 그제야 배우로서 자신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지명도를 얻은 것과는 별개로 어린 시절, 토네이도에 아버지를 잃은 후 복수하듯 토네이도를 쫓아다니는 고집스런 기상학자 조 역할은 어딘가 헬렌 헌트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많은 이들이 헬렌 헌트를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외모, 게다가 연기와 연출을 겸하는 필모그래피까지 똑 닮은 조디 포스터와 비교하곤 하지만, 아마도 이 지점쯤에서 사실상 둘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트위스터>가 개봉하고 한해 뒤, 조디 포스터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1997)에서 우주의 외계 생명체와 교신하는 집요한 과학자 앨리 역을 맡게 되는데, <트위스터>의 헬렌 헌트와 달리 그녀는 상대배우나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는 오롯한 존재감을 뽐낸다.

오히려 헬렌 헌트의 뭉근한 진가를 알아봐준 것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의 제임스 L. 브룩스 감독이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이 영화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괴팍한 주인공 잭 니콜슨으로 남아 있지만 그의 삐죽한 연기를 가능케 했던 건 사실 시선이 잘 가지 않는 상대역으로 이를 든든하게 받아준 헬렌 헌트의 편안한 연기 덕분이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잭 니콜슨의 명대사, “당신은 나를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해요”(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는 신기하게 헬렌 헌트의 이후 필모그래피에 대한 예언처럼 들린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녀지만, (그녀 자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헬렌 헌트는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기보다 상대배우를 ‘좋은 남자’로 만들어주는 데 훨씬 더 큰 역할을 한다. 여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닉(멜 깁슨)에게 마음을 읽히는 직장 동료(<왓 위민 원트>(2000)), 기약 없이 소식이 끊긴 ‘로빈슨 크루소’, 척(톰 행크스)을 기다리는 여자친구(<캐스트 어웨이>(2000)), 그리고 권태에 빠진 닥터T(리처드 기어)의 유일한 안식처인 골프코치(<닥터 T>(2000)에 이르기까지, 헬렌 헌트는 기꺼이 자신과 함께한 상대배우를 좋은 남자로 만들어주곤 했다. 그런 그녀이기에 전신마비 작가와 섹스 테라피스트라는, 소재도, 연기도 파격에 가까운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2012)에 흔쾌히 출연을 결심한 건 그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색깔로 따진다면 헬렌 헌트는 결국 투명한 색을 가진 배우일 것이다. 그녀는 때로 함께 출연한 배우의 색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자기의 색을 기꺼이 희생한다. 연출자로서 두편의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배우’로 캐스팅하면서 염두에 둔 가장 큰 미덕도 바로 이런 ‘투명성’ 같다. 그녀는 콜린 퍼스나 베트 미들러의 넘치는 ‘존재감’을 무던히 받아내며(<덴 쉬 파운드 미>), 브렌턴 스웨이츠의 아슬아슬한 연기를 단단히 지지해주지만(<라이드>), 자신의 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어쩌면 배우 헬렌 헌트의 그런 유연한 매력을 가장 잘 아는 감독은 바로 헬렌 헌트, 그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트위스터>

그녀의 어설픈 ‘리즈 시절’

헬렌 헌트를 생각하다 뜬금없이 얼마 전 우연히 본 배우 이미연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탁월한 미모로 9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던 그녀는 이 인터뷰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40대가 된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은 내가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주연의 자리가 더이상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 슬픔의 깊이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다. 나이듦이란 이렇게 배우들에게 (특히 어쩔 수 없이 여배우들에게 더) 가혹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헬렌 헌트가 직접 연출하고 출연까지 한 <라이드>를 보면서 곱게 주름이 내려앉은 얼굴로, 자신의 영화를 들고 또 한번 우리를 찾아온 그녀에게 먼저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이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트위스터>에서 하얀 민소매 티셔츠에 헝클어진 금발을 휘날리며 들판을 질주하던 그녀의 어설픈 ‘리즈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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