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화두이자 비전이다.” 25년여간 삼성나이세스와 삼성영상사업단 영화팀을 거쳐 CJ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까지 지낸 길종철 전 CJ E&M 상무의 확고한 생각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며 그가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영화의 본질은 스토리라는 데 대한 강한 확신이다. 2013년 10월, CJ E&M을 퇴사한 이후 그는 스토리 연구에 더욱 몰두하고 있다. 현재 한양대 연극영화과 특임교수로 학생들에게 이야기의 근간에 대해 가르치는 한편, 얼마 전 문을 연 영화 비즈니스 전문가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 로카(LOCA)에서도 스토리와 관련된 특강을 하고 있다. 그가 스토리에 대한 이론적 접근에 이토록 매달리는 건 결국 대중에게 통하는 영화에 한발 더 다가가려는 치열한 시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스토리의 실체는 무엇일까. 일주일에 대여섯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그가 수시로 찾아간다는 CGV오리에서 그를 만나 물었다.
-CJ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직에서 CJ E&M 콘텐츠개발실(현 콘텐츠개발팀)로 자리를 옮긴 뒤 불과 1년여 만인 2013년 10월 말 CJ를 떠났다. 어느 정도 준비된 결정이었나.
=몸이 아파 수술을 하게 되면서 결심이 섰다. 쉬면서 영화도, 책도 더 많이 보게 됐다. 그동안 추천만 받고 읽지 못했던 영화 관련 필독서도 하나씩 꺼내 읽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보이더라. 영화의 본질적인 부분을 전혀 모르고 영화 비즈니스를 해왔구나 싶기도 하고. 때마침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도 들어왔고 강의 준비를 위해 더 공부하게 된 것도 좋았다.
-‘본질적인 것’이라 함은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관심일 거라 짐작된다.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직원들에게 줄곧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한 걸로 안다.
=삼성영상사업단을 접은 1999년, MBA 과정을 밟으려고 미국의 위스콘신대학을 찾았을 때다. 당시 저명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을 만났는데 그게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무작정 찾아가서 수업을 듣고 싶다고 하자 그가 자신의 저서인 <영화 예술>로 박사과정을 밟는 학생이 진행하는 수업을 추천해줬다. 영화도 공부해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특히 내러티브, 스토리, 플롯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게 스토리라는 본질에 대한 배움의 시작이었다.
-스토리 연구를 할 때, 특별히 시나리오작가 로버트 맥키의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교본으로 삼고 있다.
=10년을 주기로 내게 귀인이 오는 것 같다. (웃음) 2000년에 데이비드 보드웰을 만났고, 2012년에는 내한한 로버트 맥키와 조우했다.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언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엠퍼시”(Empathy)라고 답하더라.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무릎을 탁 쳤다. 오랫동안 투자와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면서 내가 계속 해온 질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뭘까,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길래 사람을 감동시키는 걸까.’ 마케팅, 배급이라는 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중요한 건 스토리고 그것이 영화의 본질이며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가만 보니 그의 책이 스토리에 관한 모든 걸 포괄하더라. 작가란 무엇인가부터 이야기의 구성 요소와 원칙, 스토리에 대한 정치학적이고 철학적인 접근까지. 대중, 예술, 독립영화 모두에 적용해볼 수 있는 이론이다. 로버트 맥키가 내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에게 매료됐고, 그의 책을 읽고 또 읽는다.
-그렇게 공부한 이론과 오랫동안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접목해 흥행한 한국영화에 대한 사례 분석을 시도하는 걸로 안다.
=‘영화를 통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까’가 내 화두이니만큼 일단은 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영화들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3월 로카에서 ‘천만 영화 스토리텔링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처음 강연을 했고, 5월에는 ‘로버트 맥키의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와 한국영화 그리고 스토리 디자인’으로 두 번째 강연을 했다. 그때 <국제시장>(2014), <명량>(2014), <변호인>(2013), <7번방의 선물>(2013),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분석 대상이었다. 다소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관객과 폭넓게 소통하는 영화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보인다. 천만 영화는 로버트 맥키가 말하는 고전적 설계(모든 사회에서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이야기 구성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단일 주인공, 닫힌 종말, 외적 갈등 등이 해당된다)에 충실한 영화다. 첫째로 단일 주인공을 내세운다. 2시간 안에 관객을 설득해야 하니 그만큼 한 사람한테 스토리를 집중해 감동을 끌어올린다. 둘째는 갈등의 층위를 최대한 다양하게 가져간다. 인물의 내면적 갈등뿐 아니라 친구, 연인, 가족과 겪는 갈등, 개인이 소속된 회사, 지역사회와의 갈등, 외부 환경과의 갈등 등 외적 갈등까지 고루 다루더라. 또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숨어 있는 이야기의 힘이 굉장하다.
-이야기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어떤 이야기가 관객의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가.
=<명량>의 경우를 예로 들겠다. 겉으로는 절대적 열세 상황에서 거둔 극적 승리가 흥행을 이끌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건 역사적 사실의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내면적으로 들어가면 <명량>은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에 관해 말하고 있다. 장수, 군인, 백성들 모두가 느끼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건드렸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픽션으로 구축한 영화적 세계다. 인물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게 한 게 이 영화의 백미이자 흥행을 이끈 절대적인 요인이다.
-스토리의 힘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최근 멀티캐스팅을 내세우는 영화가 많아진 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겠다.
=인지도가 높고 연기력이 좋은 배우 여러 명을 한 영화에서 만난다는 건 투자자, 제작자, 관객 모두에게 좋은 일인 건 분명하다. 다만 멀티캐스팅 영화라도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중심인물은 확실해야 한다. 중심인물을 통해 주제가 전달되고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도둑들>(2012), <감시자들>(2013)은 여러 주인공을 내세우고도 성공한 경우다. 여러 명이 마치 하나의 주인공처럼 움직이도록 설계한 게 주효했다. 스토리의 원리상 단독 주인공이 훨씬 이야기 전달력이 높다. 물론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논할 문제다.
-일각에서는 천만 영화가 되고 안 되고는 배급사의 의지에 달렸다는 말도 나온다. 그만큼 스크린 수, 상영일수 확보가 흥행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의미인데.
=배급이나 마케팅을 잘해서 흥행했다는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산업의 특징이니까. 물론 지금의 천만 영화는 개봉 당시에 스크린을 많이 점유하고 오래 상영되면서 얻은 결과인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는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관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보는 면이 있다. ‘배급사가 밀면 관객은 본다?’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재미가 없으면 관객은 절대 영화를 보지 않는다. 또 하나, 천만 영화는 영화비평가, 업계 관계자, 영화과 학생들 모두에게 충분히 평가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오히려 천만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연구해야 한다. 천만 영화의 시나리오를 제대로 읽어보면 동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 이 영화가 언제 개봉할 지 모르고 출발한다. 개봉 당시의 트렌드를 분석해 맞추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꾸 배급 시기나 경쟁작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건 대세를 바꾸지 못한다. 설령 분석했다 해도 다음 영화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다. 나는 노력해서 달라지지 않는 일에 힘을 빼지 말자는 쪽이다. 준비하면 조금이라도 향상될 수 있는 일 그게 바로 스토리 연구다.
-CJ E&M 퇴사 직전까지 몸담은 곳이 원천 소스를 개발하는 CJ E&M 콘텐츠개발실(현 콘텐츠개발팀, 이하 개발팀)이었다.
=올해까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개발팀 후배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현재 개발팀과 한양대가 산학협력의 일환으로 제작지원하는 첫 번째 작품의 캐스팅과 촬영 작업이 한창이다. 데뷔를 준비하는 신인감독의 영화로 나도 기획과 개발에 참여했다. 사실 내 궁극적인 관심과 비전은 ‘스토리를 어떻게 확장해야 매체별로 다르게 적용할 수 있을까’에 집중돼 있다. 그러려면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 수 있는 원천 소스를 잘 개발해야 한다. 지금은 영화화, 드라마화, 글로벌화까지도 가능한 웹툰에 주목한다. 원천 소스에서 출발해 산업적 기여를 생각하려 한다.
-원천 소스로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은 어떻게 내리나.
=반짝이는 아이디어,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은 주제의식.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야기 유형, 즉 장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아이템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인 생각을 갖고 매체별 특성을 알고 각색을 시도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스토리텔링의 미래가 어디에 있을까. 아직 결론은 못 내렸지만 케이블이나 지상파 방송을 보면 미드나 장르드라마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주목한다. 로버트 맥키도 최근 TV가 스토리텔링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레 내다보고 있다.
-근래 중국, 동남아시아 등으로 한국의 시나리오작가나 감독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다.
=창작자가 그냥 팔려가는 건 한국영화계, 스토리계의 전망을 어둡게 할 뿐이다. 창작자들이 할리우드로 옮겨간 뒤 홍콩의 영화산업이 급격히 쇠락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해외로 진출하는 개개인을 뭐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시스템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 인구가 늘어나거나 시장이 커지지 않는 한 타계책은 스토리의 가치를 키우는 데 있다. 그래서 한국영화의 국내시장 점유율을 일정 정도 이상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만 해도 한국영화 위기론이 부상하고 있지 않나. 지금이라도 스토리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로카 강연 때 신씨네의 신철 대표도 수강할 정도로 강연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뜨겁다. 시나리오 읽어달라는 부탁뿐 아니라 직접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제안도 받았을 것 같은데.
=제작을 해보라는 분들도 있는데 각자의 영역이 있는 것 같다. 스토리 연구가 내 나름의 영역이 아닐까. 할리우드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스토리 컨설팅, 스크립트 닥터라는 걸 해볼 수도 있다. 제작사나 작가들이 가진 뛰어난 아이디어를 잘 꿰어내 결과를 내보고 싶다. 혼자 해보다가 이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싶으면 좀더 사람을 모아서 시스템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가서 판단할 문제다. 시나리오? 한번쯤 써봐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한데. (웃음)
-혹시 요즘 관심이 가는 이야기가 있나.
=사랑? (웃음) 최근에 좋은 러브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꽤 오래 연구 중인 주제로 어떻게든 풀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