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소희의 영화비평] 마돈나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2015-07-16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마돈나>에서 주체의 공백을 메우는 견자들
<마돈나>

<마돈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서술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여자, 마돈나를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하는 이야기다. 자연히 영화의 초점은 마돈나는 누구인가에 맞춰진다. 마돈나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출 때 영화는 ‘마돈나는 왜 타락할 수밖에 없었나’를 보여주는 이야기에 그친다. 마돈나는 불쌍한 타자로 고립되거나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여성으로 해체된다. 이 둘을 피하기 위해 이 영화가 누군가의 시선에 비친 마돈나를 그릴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의 타락사

혼수상태에 빠진 마돈나를 재구성하는 인물은 해림(서영희)이다. 해림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없으므로 해림이 누구인가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이 필요하다. 해림이 마돈나를 찾도록 의뢰를 받았다는 점, 주변 인물을 탐색한다는 점 등에서 그녀의 특수한 위치는 사립 탐정과 비슷하다. 사립 탐정이라고 칭한 이유에는 탐정이 남성적 캐릭터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한 것이다. 의뢰인 상우(김영민)는 10년째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 철오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마돈나의 심장을 원한다. 마돈나를 찾는 해림의 여정은 영화적으로는 공백에 가까운 마돈나라는 인물을 살리는 과정인 동시에 마돈나의 정체가 밝혀지면 그녀를 더 빨리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이라는 의미 역시 내포되어 있다.

해림은 마돈나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그녀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서술자들을 만난다. 해림은 적어도 그 출발선 상에 있어 남성의 권력에 종속돼 다른 여성을 위기에 빠뜨리는 여성 캐릭터들과 다르지 않다. 해림은 마돈나를 위기에 빠뜨리거나 외면한 또 다른 여성이 된다. 영화는 마돈나의 타락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마돈나에게 공감하던 여성들의 타락사를 쓴다. 마돈나의 주변 여성들은 타고난 머리색을 검은색 잉크로 감춰야 했던 장미나(마돈나)를 동정하던 동창 최 선생이었다가, 전화 상담원 장미나가 불합리한 이유로 해고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던 동료였다가, 화장품 공장에서 함께 일하다가 결국 그녀를 배신한 룸메이트 준희, 길거리에서 지쳐 누운 마돈나를 거둬준 뒤 그녀에게 성 접대를 강제한 마담이 된다. 여성들의 타락상은 VIP 병동의 의사 혁규를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된다. 혁규는 상우에 의해 미나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도록 강요받는다. 혁규의 확신은 곧 ‘모르겠다’는 외면으로 바뀐 뒤, ‘아니다’라는 부정으로 탈바꿈한다.

해림은 사건에 연루된 자인 동시에 판단하는 자이다. 해림은 병원에서 살아갈 가치가 없는 두 가지 인생을 본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여자 마돈나와 상우의 아버지 철오다. 해림은 이들을 보며 “이럴 바엔 사는 게 더 힘들 것 같아요”라고 내뱉는다. 마돈나와 철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각자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마돈나에게는 복중 아기가, 철오에게는 그의 아들이 각각 삶을 붙드는 존재다. 상우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10년째 아버지를 붙잡고 있고, 아기(딸)는 마돈나의 뱃속에서 10달의 산달을 채웠다. 철오와 상우, 마돈나와 태아를 연결하는 끈은 명백히 대조된다. 전자는 돈이라는 연결고리로 묶여 있으며, 돈줄이 끊어지는 순간 관계가 끝날 것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마돈나와 태아의 관계는 탯줄이 끊어진 뒤에도 연속된다. 마돈나의 태아는 어머니 마돈나를 모방한다. 마돈나가 고통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안 태아는 어머니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스스로 목을 조른다. 판단자로서의 해림은 ‘마돈나의 아기는 태어날 만한가’를 두고 고심한다.

스스로 목을 조르는 태아의 행위는 입이 막힌 마돈나의 삶을 상기시킨다. 마돈나는 타고난 외모 때문에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다. 타고난 머리색을 염색한 머리카락으로 착각한 선생님에게 원래 머리색이라고 답했다가 체벌을 받은 순간부터, 마돈나는 체벌받지 않으려면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게 된다. 그 순간 그녀의 입은 막힌다. 상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위기에 처한 마돈나가 사실을 밝혔음에도 혼자 누명을 쓰고 해고됐을 때 그녀의 입은 다시 한번 막힌다. 자신을 추행하는 회사 셔틀버스 기사를 고발했으나 그가 사장의 조카라는 이유로 묵인되는 것을 경험한 뒤, 마돈나의 생각하는 입과 말하는 입은 사라진다. 마돈나는 이제 오직 먹는 입, 성교하는 입이 된다.

태아 스스로 목을 조르는 행위는 마돈나의 삶을 모방하는 동시에 여성이 여성을 본다는 것에 대한 다른 의미를 상상하게 한다. 그 의미를 체화해 보여주는 인물이 해림이다. 플래시백 장면에서 해림은 마돈나처럼 고통받는 여성이다. 해림은 길 위에서 홀로 아이를 낳은 뒤, 그 아기를 가방에 넣어 물속에 던져버린다. 이제 막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해 VIP 병동에 배정된 해림은 마치 과거가 없는 사이보그처럼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고 머리카락은 칼로 자른 듯 단정하다. 무엇보다 그녀는 ‘텅 빈 눈’을 지녔다. 해림은 마돈나만큼이나 공백에 가까운 텅 빈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림은 이미 죽은 사람이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복중 아기다.

여성의 가능성

해림은 상우에게 의뢰받은 것 이상을 한다. 해림의 과잉된 행위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거기에는 단지 마돈나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정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마돈나가 누구인지 찾아다니는 해림의 캐릭터는 마치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였는지를 찾는 마돈나의 태아의 미래 같다. 어머니의 복중에서 자살하려는 태아는, 마돈나의 임신이 박 기사의 강간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 ‘아기를 살려야 할까요’라고 묻는 해림의 의문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말은 마치 자살하려는 태아가 ‘제가 태어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것 같다. 아기는 부재한 엄마의 자리를 채워나가는 자신의 미래(해림)와 자신이 태어나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과거(마돈나)를 동시에 본다. 그리고 아기는 자살을 할 참이다. 그러나 마돈나의 환영은 아기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해림에게만 나타난 마돈나의 환영은 마치 자살하려는 태아를 다독이는 것처럼 들린다. 아기를 살리기로 한 선택은 결국 자신이 타고난 것(강간에 의한 출생)에 대해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말은 또 늘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해왔던 마돈나를 위한 응답이기도 하다. 해림이 철오의 숨통을 끊는 것은 죽음(자살)과 탄생 사이에 죽음의 손을 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철오는 마돈나가 거쳐간 남성-자본가들이 응축된 하나의 석고상이다.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는 늘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마돈나>가 의미 있는 건 주체 자리를 공백으로 둔 채 “여성이여, 다른 여성을 보라. 그것이 곧 나를 보는 것이다”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해림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의 가능성은 상대를 타자화시키지 않고서 타자를 볼 수 있는 잠재력이다. 탐정으로서의 해림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마돈나를 보는 사람이었다가 또 다른 마돈나가 되었다가, 마돈나의 속으로 들어가 태아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최종적으로 ‘~되기’ 이후의 분리를 그린다. 영화는 해림이 마돈나의 딸에게 마돈나의 진짜 이름인 장미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때 해림은 버스 차창 밖으로 사진관에 걸린 사진 속 임신한 마돈나의 밝은 모습을 보고는 놀란다. 잉여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탐정으로서의 해림이 마돈나에 대해 미처 다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 자각의 순간이다. 이것은 마돈나 외에 마돈나에 대해 누구도 잘 알 수 없다는 수긍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마돈나가 누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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