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가냘프고 나이가 매우 많은 교수님이 있었다. 그분 수업에 들어가면 뭐랄까,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는데, 아무리 월급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저렇게 힘들게 서 있는 노인을 두고 새파란 젊은이들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왜 강의실엔 경로석이 없는 거지, 마음 불편하게.
그런 교수님이 답사에 따라갈 차례가 되었다. 신입생들은 긴장했다. 도중에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누가 대표로 심폐소생술이라도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철모르는 병아리들이 오종종 모여 수군대는 것을 듣던 복학생은 웃었다. “너네, 최고령 교수님 안경이 왜 그렇게 두꺼운지 알아?” … 늙어서? “술 마시고 들어가다가 계단에서 구르면서 계단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치는 바람에 안구에 충격이 와서 시력이 떨어졌거든.” 무슨 구어체 문장이 이렇게 길어.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근데 그날 교수님 혼자 마신 술이 고량주 대자로 네병.”
알고 보니 그분은 그런 일을 겪고도 술을 끊지 못한, 아니 끊지 않은 강건한 술꾼으로서 답사를 앞둔 학생을 강의실로 불러다 근심 어린 얼굴로 이런 당부를 남긴 사람이었다. “유적은 글로 배울 수 있지만 우리 땅의 기운은 글로 배울 수 없는 것이니, 답사를 가거들랑 반드시 그곳의 물맛을 보고 오게.” 네? 물맛이라니요? 교수님은 무지몽매한 학생 때문에 언짢았다. “답사를 가면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답사가는 전 지역에서 전 종류를, 열심히. 여력이 되면 지방 소주도.”
그렇다, 열심히 하면 신장 156㎝, 몸무게 48㎏(추정), 춘추 63살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고량주 대자 네병을 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라는 현실 부정적인 제목(술이 깨기를 기다리다간 그대, 결코 집에 가지 못하리니)의 일본영화에서 의사는 알코올중독자 아사노 다다노부에게 묻는다, 어떻게 술을 마시면 이 지경이 될 수 있느냐고. “그냥…아침부터 밤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마시면 식도정맥류 파열과 위 부종과 뇌혈관 축소와 대규모 토혈을 모두 이룰 수 있습니다.
주정뱅이들의 성전(聖典)인 만화 <음주가무연구소>에 이르기를, 진정한 주정뱅이가 되려면 3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혈뇨와 혈변, 토혈이 그것이라 했다(그렇다면 나는 20대에 이미 그랜드슬램 달성).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진리에 불과한 것인지, 코카서스 인종의 강인한 체력을 자랑하는 서양 주정뱅이들을 보면 유전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결핍되어 있다는 나의 인종적 한계를 한탄하게 된다.
<28일 동안>의 그웬(샌드라 불럭)을 보며 나의 시름은 깊어졌다. 저 여자는 대체 어떻게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 다음날 아침에도 벌떡 일어나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뜀박질을 하면서 내내 해장술을 마실 수 있는 거지?(그래, 사실은 그게 제일 부러웠다, 해장술. 한국에선 천명을 아는 나이, 50대는 되어야 깨우친다는 그 해장술)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이불을 부여잡고 뒹굴다가 출근을 포기하고 연차 쓰기를 어언 수십일, 유급휴가를 전부 탕진하고도 어찌나 연차를 써댔는지 12월 월급을 받아보니 50만원이 깎여 나왔던 나로선 가히 주선(酒仙)의 경지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됐든 술을 마시면 해장은 해야 할 터인데, 서양 주정뱅이들은 해장도 필요 없다. 알코올중독 마누라에게 술 마시지 말고 멕시코 여행이라도 가자던 <남자가 사랑할 때>의 천사 남편 마이클(앤디 가르시아)마저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커피 마시고 속이나 풀어. 커피? 커피로 속이 풀리나? 러시아에서 살았던 친구가 해장한답시고 피클 국물 들이켜는 걸 보고 충격받은 적은 있지만, 그건 그래도 야채고, 왠지 비타민 C도 있을 거 같고(맛이 시니까)….
숙취와 마주하지 않고 싶다면 술이 깨서 숙취가 몰려오기 전에 재빨리 술을 공급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홍상수 영화에 보면 그런 사람 많이 나온다). 그것이 진정 주정뱅이의 도(道)다, 그럼 아사노 다다노부는 영영 집에 가지 못하겠지만. 술로 인해 펼쳐진 기나긴 가시밭길을 걷는 <오디세이아>이자 <천로역정>, 술 마신 진상은 술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주 도처에 널려 있다는 진리를 두 시간에 걸쳐 웅변하는 영화 <낮술>을 봐도 그렇다.
영화 초반, 전날 열심히 퍼마신 혁진(송삼동)은 떡이 되어 버스에 널브러져 있지만, 쉬지 않고 낮술을 부어주었더니 어느 순간, 영화에서 숙취가 사라진다. 남은 것은 촉촉한 술기운과 숱한 주사(酒邪)의 업보뿐, 술이 남긴 업보라면 달게 받아야지요.
그처럼 술이 깨기 전에 술을 넣어주어야 한다는 주정뱅이의 욕망은 끈질기고도 강렬하여서, 밤마다 찾아오는 원혼의 그림자를 술로 이기던 <오싹한 연애>의 여리(손예진)는 2차를 같은 술집 이웃 테이블로 떠난다. 맘이 급하거든, 장소가 뭐가 중요해. 3차를 가고 싶었는데 2차밖에 가지 못하여 울적했던 어느 밤, 나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투덜거렸다. “남들은 데리러오는데 너는 왜 그래? 빨리 나 데리러 와.” “지금 어딘데?” “집.” 그날 밤, 나는 한밤중 주정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집에 온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고 거실에서 안방으로 옮겼다, 3차 하러.
남들 4년 다니는 대학을 5년 다니느라 유독 길었던 나의 대학 시절, 그에 비하면 배운 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주정뱅이의 도만큼은 확실하게 배웠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의 배움으로 남았으니, 지금도 내 청춘의 리스트엔 이런 이름들이 또렷하다. 선양 엑스포, 선학, 보해, 한라산…. 역사를 알면 오늘을 바꿀 수 있다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세상은 날마다 뒷걸음질을 치고 있으나 몸에 새긴 술맛은 나를 배반하지 않으니, 그래서 오늘 밤도 숱한 주정뱅이들은 한병, 한병, 술을 헤아린다.
알코올 조기교육?
냉정한 세상에서 진정한 주정뱅이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것들
흔적을 감춰라
자율학습이 끝나고 늦은 밤에 돌아오는 고등학생들 때문에 우리는 매우 자주 술을 마시다 말고 과외를 하러 가야 했다. 그리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술 안 마신 척하기’ 비법은 이런 것이었다. 초콜릿으로 속에서 올라오는 술냄새를 누르고, 커피 우유를 마셔 입에 남은 술기운을 씻을 것이며, 최후에는 구강 청정제로 마무리하라. 하지만 진정한 고수, 주정뱅이의 단계를 넘어 알코올중독의 세계에 입문한 <남자가 사랑할 때>의 앨리스(멕 라이언)는 이런 방법을 썼다. “날마다 보드카 한병을 마셨어. 당신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아, 보드카가 그런 술이었구나, 소주만 마시느라 몰랐지.
피부를 관리하라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진정한 교훈은 집에 갈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술만 마시면 제아무리 아사노 다다노부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아저씨 얼굴이 된다는 것이다(비슷한 예로 사람이 고기를 너무 먹으면 송중기가 한석규 된다는 교훈을 남긴 고기 마니아 세종의 이야기, <뿌리 깊은 나무>가 있다). 외모는 헛된 껍데기에 불과할지니 진정한 주정뱅이라면 얼굴이 아니라 주량과 주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법. 많이 마신 다음날엔 반드시 피부화장을 하고(남성용 비비크림도 있어요) 차가운 숟가락으로 부기를 가라앉히자.
일찌감치 깨우쳐라
될 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진리는 주정뱅이의 세계에서도 빛을 발한다. 시골에서 자란 <음주가무연구소>의 작가 니노미야 도모코는 동네 아저씨들과 더불어 술잔 기울이다가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중학 시절 잠시 술을 끊었고, 고등학교에서 다시 주정뱅이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최고의 주정뱅이가 되었다! 조기교육의 위력은 그처럼 막강하니, <28일 동안>의 그웬도, <술이 깨면 집에 가자>의 츠카하라(아사노 다다노부)도, 어릴 적에 주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