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영화인은 물론 만화와 게임 팬들은 매년 7월 미국 샌디에이고에 모여 한해 동안 어떤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냈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창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지, 소식을 주고받고 자랑하고 관련 상품을 사고파는 행사 ‘코믹콘’을 연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만화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아왔던 그래픽노블 전문 번역가 최원서씨가 생애 첫 코믹콘 참관기를 보내왔다. 현재 전세계 영화산업을 뒤흔드는 슈퍼히어로영화 등 장르영화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성지’와도 같은 ‘코믹콘’을 생생한 글과 함께 만나보자.
인터넷으로 소식만 접하던 샌디에이고 코믹콘 참가는 이번이 처음이다. 코믹콘의 정식 명칭은 ‘샌디에이고 코믹콘 인터내셔널’, 줄여서 ‘SDCC’라고 한다. 팝 컬처 팬들에게는 참으로 설레는 행사다. 1970년 네명의 만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골든 스테이트 코믹북 컨벤션’이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1회 행사에 약 300명이 참가했다. 애초 행사의 취지는 수집한 만화책들을 판매 또는 맞교환하거나 몇몇 작가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세계에서 10만명 이상의 팬들이 참가하는, 만화와 영화를 포함해 팝 컬처 전반을 아우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행사가 되었다.
팝 컬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코믹콘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들은 이듬해 라인업을 발표하고, 감독과 영화배우들은 행사장에 패널로 참석한다. 유명 작가들은 사인회를 갖거나 작업물을 직접 판매하기도 하고, 완구 회사들은 대형 부스를 차려 한정판 상품을 판매한다. 매년 4일간 개최되는 이 행사는 샌디에이고시의 주요 산업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경제 규모는 약 20억원에 달한다.
컨벤션센터로 가는 길
온 도시가 떠들썩
행사장으로 향하는 길목만 봐도 코믹콘이 샌디에이고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행사임을 알 수 있다. 라디오에서는 코믹콘 관련 뉴스와 교통 상황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관광명소로 유명한 컨벤션센터 맞은편 가스램프 디스트릭트의 레스토랑들은 만화와 관련된 테마로 인테리어와 외관을 꾸몄다. 컨벤션센터에서 운영하는 무료 셔틀버스는 5개 노선이 운영되고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시내 호텔을 순회하며 참가자들을 행사장으로 실어 날랐다. 힐튼 베이프론트, 메리어트, 옴니 호텔 등 협력 숙박업소에서는 코믹콘과 관련된 전시회나 관련 행사들을 메인 볼룸에서 열고 있었으며 심지어 코믹콘에서 파는 상품을 판매하는 호텔도 있었다. 한마디로 도시 전체가 코믹콘 행사장 같다. 내가 숙박한 윈덤 샌디에이고 호텔에서도 특수 제작한 코믹콘 테마의 방 카드키를 나눠주었으며, 로비에는 입장권 배지를 단 사람들만 돌아다녔다. 그리고 가스램프 디스트릭트 입구에는 각종 부스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부스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규모가 크며, 어떤 업체는 아예 국내 롯데월드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를 설치해놓기도 했다. TV시리즈/게임 제작업체뿐만 아니라 면도기 제조회사 시크(Schick)는 20세기 초 미국 살롱을 모티브로 정교한 미니어처 바버숍을 재현해놓기도 했다. 물론 참가자들은 그곳에서 신제품을 체험할 수 있다.
프리뷰 나이트
미리 만나는 재미
7월8일(수)
일종의 전야제 행사다. 원래 열성 팬들을 위해 사전에 부스를 둘러보고 입장권 배지를 발급해줄 목적의 행사였으나, 현재는 각종 홍보 영상을 방영하거나 한정판 완구를 먼저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프리뷰 나이트에서는 올 하반기와 내년 시즌에 방영 예정인 드라마 <슈퍼걸> <틴 타이탄스 고!> <컨테인먼트>, 그리고 DC 코믹스의 인기 타이틀 ‘페이블즈’의 스핀오프 시리즈인 ‘루시퍼’를 원작으로 한 <루시퍼>의 프로모션 영상과 파일럿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전야제였음에도 행사장 주변에는 밤 10시가 넘도록 증정품인 대형 백팩을 멘 사람들로 가득했다.
행사 1일차
“설마 이게 구입 줄인가요?”
7월9일(목)
드디어 대망의 행사 첫날, 호텔 앞 셔틀버스 정류장에 줄을 섰다. 이미 각종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전부 입장권 배지를 달고 있었다. 전날 프리뷰 나이트에 다녀온 사람들은 어제 받은 대형 백팩을 메고 있었다. 버스를 탄 지 약 15분 후, 드디어 샌디에이고 컨벤션센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만화로 표현된 눈 그림과 함께 ‘San Diego Comic-con International’이라는 대형 간판이 보였다. 오전 9시였지만 행사장 앞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뤘고, 행사장 건너편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 신작 게임 대형 홍보 부스의 모형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부스라고 표현했지만 거의 TV 레크리에이션 쇼에서 당장 사용해도 될 정도의 대형 서바이벌 놀이기구에 가까웠다. 입구에서 배지를 보여주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행사장에 들어갔다.
1층 이벤트홀은 입구에서 끝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대형 홀이다. 이곳에 루카스필름과 하스브로, 레고부터 개인 부스까지 약 12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부스들이 꽉 들어차 있다. 대기업들의 부스 퀄리티는 매우 높아서, 웬만한 전시회나 테마파크의 기획 전시 수준을 웃돌았다. 1층 부스들을 대충 훑어보는 데만 2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같은 부스라 하더라도 오전과 오후 전시물들이 계속 교체되었다. 이벤트홀 동쪽 끝에는 아티스트 전시 구역으로, 만화 원작자들이 원화를 판매하거나 사인한 프린트들을 판매하는 곳이다. 그곳의 한 테이블에서 루카스아츠사의 게임 <샘 앤드 맥스 힛 더 로드>(Sam & Max Hit the Road) 박스아트의 대형 프린트와 관련 서적을 파는 곳을 발견했다. 테이블 뒤에 앉아 있는 백발의 아저씨는 원작자 스티브 퍼셀이었다. 악수를 청하고 한국에서 온 팬이라고 하자 매우 반가워했다. <샘 앤드 맥스 서핑 더 하이웨이> 2008년 한정판을 구매하고 사인과 스케치도 받았다.
코믹콘의 또 다른 재미 중 하나는 행사장에서만 파는 컨벤션 한정 상품들을 구입하는 것이다. 올해에도 하스브로, 마텔, 펀코 등 다양한 회사들이 한정 완구 상품을 소개했다. 그런데 당일 행사장에 10시쯤 도착해보니 이미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의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업체 직원에게 “설마 이게 구입 줄인가요?”라고 묻자, “이 줄에 서려면 오전 7시에 행사장 2층에서 구입 티켓을 발급받았어야 한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특히 가장 인기가 좋고 중고 시장에서도 높은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곤 하는 한정판 레고는 아예 추첨 방식으로 구매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 한정판 세트 말고도 매일 12시에 추첨을 통해 행사장 한정 미니 피겨를 무료로 배포한다. 물론 이 줄도 너무 길어서 가뿐한 마음으로 포기할 수 있었다. 올해의 한정 미니 피겨는 TV시리즈 <애로우>에 등장하는 캐릭터 ‘아스널’이었다.
행사 2일차
윌 아이스너를 만나다
7월10일(금)
행사장 2층에 위치한 9개의 컨퍼런스 룸에서는 업체들의 연간 계획, 영화사의 신작 발표, 완구 제조사의 제작 과정 소개에서부터 업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세미나와 강의까지 다양한 주제의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9개의 방에서 아침부터 자정까지 프로그램이 진행되기 때문에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프로그램은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줄을 서야 하는 반면 참석자가 거의 없는 프로그램도 있다. 따라서 사전에 홈페이지에 소개된 공식 스케줄이나 행사장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공식 가이드를 참조해서 참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오늘은 전설적인 작가 윌 아이스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행사 <윌 아이스너: 그래픽노블의 챔피언> 패널을 듣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DC 코믹스사 전 사장 폴 레비츠, 인기 인디만화 <본>의 작가 제프 스미스 외에도 전설적인 카툰 작가 세르지오 아라곤즈, 그리고 마블사 전 편집장 대니 핑거로스 등이 패널로 참여한 수준 높은 토론이었다. 약 한 시간에 걸쳐 패널들간의 회고와 토론이 이어졌고, 이어서 객석의 청중과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청중은 열성적으로 호응했고 질서 있게 질문을 던졌다. 1층 이벤트홀에서 상품들을 보면서 느끼는 구매욕에서 오는 희열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행사 3일차
폭스 패널과 새 영화 소식
7월11일(토)
매년 코믹콘에서 영화사 폭스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 90년대 말, 마블이 재정 상태가 위태로울 때 주요 지적 재산인 <엑스맨>과 <판타스틱4>의 영화 판권이 폭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반응이 좋지 않았던 <판타스틱4> 시리즈와 달리 <엑스맨> 시리즈는 소니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함께 2000년대 슈퍼히어로/만화 크로스오버 장르영화를 성공적으로 주류에 안착시킨 사례로 꼽힌다. 올해도 폭스는 대형 부스를 차려 매년 판매하는 한정판 블루레이 세트를 판매했고, 오후 6시 폭스 패널 무대에는 8월 개봉예정인 <판타스틱4>의 출연진을 등장시켰다. 조시 트랭크 감독은 “코믹콘이 최근에 너무 영화판 일색이라 안 온 지 꽤 됐다”라고 말해 관객의 웃음을 유발했다. 5명의 주연배우들이 인사를 마친 후 최종 예고편이 방영됐고 다음 무대는 <데드풀>이었다. 원래 ‘데드풀’은 조연 정도의 인지도에 머물렀으나 2000년대 이후 인기를 얻기 시작해 이제는 단독 주연작까지 만들어지게 됐다.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티저 예고편 영상이 스크린에 상영되자 관객의 반응은 엄청났다. 무엇보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엑스맨 슈트를 입은 새 캐릭터의 등장은 <엑스맨> 시리즈와의 크로스오버 가능성도 암시했다. 아직 등급이 부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는데 캐릭터 자체가 성인 취향인 만큼 감독은 <블레이드> 시리즈처럼 R등급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마지막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후속작인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출연진과 감독의 무대였다. 휴 잭맨이 무대에 올라 “이번 영화를 마지막으로 울버린과도 작별이다”라고 말한 뒤 그의 울버린 역 오디션 영상이 짧게 상영됐다. 특수효과를 입히지 않은 장면들이 3편 정도 이어졌다. 공개된 영상을 종합해보면 새로운 <엑스맨> 3부작의 마지막편이 될 이번 영화는 원작 만화의 전성기 중 하나였던 1980년대 분위기에 충실할 것 같다. 일단 영화의 배경이 80년대이고, 80~90년대 초반 원작에 나왔던 주요 스토리라인이 융합되어 있다. 또한 캐릭터들도 80년대 당시 복장에 충실한데, 스톰의 경우 원작처럼 모호크 머리를 하고 있으며 새 캐릭터인 사일로크, 쥬빌리 등의 복장도 원작과 매우 유사하다. 제임스 맥어보이, 마이클 파스빈더, 요즘 출연하는 영화마다 승승장구하며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오스카 아이작 등의 출연진이 서로에게 농담을 던져가며 행사를 진행했다. 마지막에 스탠 리가 등장해 모든 출연진과 사진을 찍은 것이 이번 패널의 백미였다.
행사 4일차
감동의 홀 H 입성
7월12일(일)
이날의 메인 이벤트는 오전 10시30분에 열린 워너브러더스의 프레젠테이션. 1시간 정도 기다렸는데도 거의 맨 뒷줄에 겨우 착석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2016년 개봉예정인 <배트맨 대 슈퍼맨>과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새로운 예고편이 공개됐다. 예상과는 반대로 관객의 호응은 후자의 압승이었다. 전반적으로 어두우면서도 무겁지 않은 분위기의 예고편에 관객은 열광했고 특히 할리 퀸 역의 마고 로비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데이비드 아이어 감독은 “우리는 마블과는 다르다”라고 하며 DC 팬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조커 역의 자레드 레토를 제외한 수어사이드 스쿼드 캐스트 전원과 잭 스나이더 감독, 배트맨 역의 벤 애플렉을 한자리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비록 자리가 멀어서 대형 화면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이번 코믹콘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이벤트였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배우 그리고 팬들이 의견을 나누며 소통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은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영화로 만나는 코믹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코믹콘은 그 규모와 내용에서 상상을 압도하는, ‘문화 현상’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행사였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행사를 다룬 영화도 있다. 2011년 스탠 리와 조스 웨던이 제작하고, 모건 스펄록이 감독한 <코믹콘 에피소드4: 한 팬의 희망>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이다. 대형 만화책 딜러, 만화가 지망생과 그의 친구, 코믹콘 코스프레 경쟁부문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코스튬 디자이너, 그리고 코믹콘 패널 회장에서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하려고 준비하는 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모두 실존 인물이 출연하며, 각각 목표 달성 여부와는 별개로 코믹콘에서 무언가를 얻어간다. 3일간의 행사 동안 행사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을 개략적으로 볼 수 있으며, 행사장 분위기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프랭크 밀러, 세스 로건, 케빈 스미스 등 유명 인사들의 인터뷰도 등장한다. 현재 DVD로 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