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엄마, 나를 낳아줘!
2015-08-04
글 : 박수민 (영화감독)
필멸의 ‘마더콘’ 소년 J. C. - 존 코너 혹은 제임스 카메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1980년대에 태어나 틴에이저로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통과했던 세대에게 <터미네이터>는 각별하다. 특히 <터미네이터2>(1991)가 그렇다. 퍼스널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 콘솔 그리고 인터넷의 태동과 발전이 곧 자신의 성장사(史)였던 이들에게, 1985년생 존 코너는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1995년이 배경인 2편에서 존의 나이 10살, 미래 전쟁에서 인류를 구원하기로 되어 있는 또래의 주인공은 해킹 스킬을 지닌 오락실 겜돌이로 처음 등장했다. 방 청소나 하라는 (양)부모의 명령에 쿨하게 야유하며 친구와 달아나는 모습은 격한 친근감과 대리만족을 주었다. 새엄마가 이렇게 친절할 리 없어요, 라는 대사도 개인적으로 깊이 남았다.

그러나 존 코너는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2003)에서 무기력한 청년 실업자가 되어 실망을 안긴다. 물론 어려서 겪은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느닷없진 않다. 거의 근본주의자가 된 홀어머니에게서 받았을 훈육의 역효과, 인류의 지도자가 될 장래에 대한 맹목적 기대와 부담감을 생각하면 개연성 충분한 결과다. 문제는 이후 계속된 시리즈에서 그의 입지가 흔들리는 계기가 된 것. 언제나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주인공은 실상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남자였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고 운명은 만들어가는 거라더니, 끝내 심판의 날을 막지 못한 존 코너. 그의 생존과 각성은 이제 없는 엄마 대신 여친 캐서린 브루스터 덕분에 겨우 가능했다.

4편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에선 다크 나이트(크리스천 베일)를 존 코너로 데려왔어도 이야기를 이끌 주체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프랜차이즈가 전편의 후광 없이도 굴러가려고 애를 쓸수록 없던 캐릭터와 설정만 생겨났고 되레 존 코너는 유명무실해졌다. 팬들은 1편 카일 리스의 몸속 정충(精蟲)과 2편의 예쁘장한 어린이 외에는 나이 먹은 존에게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설정으로 존재할 때가 더 근사했던 캐릭터의 한계. 그리고 캐릭터의 늙음에 겹쳐지는 팬들 자신의 늙음. 새 시리즈의 약점은 어쩌면 늙은 아놀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궁디팡팡을 못 받은 남자, 존 코너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와 이니셜마저 같던 이 미래의 구세주는 급기야 리부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에 이르자 최종 악역으로 전락한다. 기계에 감염된 터미네이터 인간, 존 코너는 이제 적그리스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를 지켜줄 든든한 로봇 아빠가 없었기 때문인가? 나는 존 코너의 몰락 이유를 엄마, 즉 여자의 부재에서 찾는다. 존은 터미네이터보다 실은 사라 코너를, 엄마 같은 여자를 더 필요로 한다. 그는 여자 품에서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고백해야만, 모성이 우쭈쭈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주어야만 밖에 나가 운명에 맞설 수 있는 남자다.

3, 4편에서 그가 엄마 대신 육체적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캐서린은 이 리부트에서 행방이 묘연하다. 그녀가 임신한 존의 아이 역시 언급이 없다. 다른 타임라인의 세계라서 존의 처자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우리는 이번 기회에 존 코너의 심리 상태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에게 자기 자신을 임신시키기 위해 과거로 아버지를 보내는 남자의 심리는 대체 무엇인가? 존재를 보호받으려는 욕구는 모성을 필요로 하고, 가장 안전한 자궁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욕망은 시간을 몇번씩 역설로 되돌린다. 자신을 다시 낳고 키워주는 여자 없이는 존재를 지속하지 못하는 존 코너의 ‘마더콘’(マザコン: ‘마더 콤플렉스’의 일본식 줄임말) 성향과, 그 불가피한 기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나는 또 다른 J. C. -제임스 카메론을 추궁하고 싶다. 그는 이후의 인과를 결정한 최초의 설정과 거기 담긴 관념의 주인이기에 책임이 있다.

<터미네이터2>

1편(1984)은 성서를 그대로 가져온 이야기다. 성모마리아인 사라 코너는 예수그리스도가 될 존 코너를 낳을 운명이고, 헤롯왕 스카이넷이 보낸 군인 터미네이터가 유아 대신 모친 살해를 하러 나선다. 이 플롯에 주요 반전으로 더해진 것이 미래에서 온 카일 리스가 곧 존의 아버지라는 타임 패러독스다. 아버지의 정액 이전에 아들의 의지가 먼저 존재한 셈이라서 카일도 요셉에 가까우니 이건 뭐 ‘무염시태’(無染始胎: 가톨릭에서 말하는 원죄 없는 잉태)나 다름없다. 그러나 사라 코너, 즉 여성 입장에서 이건 성서도 테크 누아르도 아닌 그냥 호러다. 위험한 스토커(터미네이터)와 근본을 모를 남자(카일) 사이, 강간 위협을 연상시키는 폭력에서 도망친 여성이, 끝내 예상치 않은 임신을 하고 혼자 모든 책임을 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라는 왜 끝내 존을 낳고 꿋꿋이 길러야만 하는가?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운명은 만들어 가는 거란 메시지를, 반드시 엄마가 되어야 하는 한 여성의 정해진 운명이 지탱하고 있다.

이 무책임한 여성(모친) 수난의 기저에 깔린 어떤 심리의 실체. 여성이 당연히 해줄 거라고 보는 희생으로서, 또는 거부 안 할 운명으로서의 ‘모성’(母性)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카메론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다. 그는 작품마다 강한 여성상을 내세우며, 유사 가족의 형태를 이루는 그룹 안에서 같은 의지를 공유하는 주인공 남녀를 등장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매번 남성은 어떤 의지를 여성에게 전하고는 퇴장하고, 이 의지를 끝까지 생으로 잇는 것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대체 가능한 부계는 일종의 DNA를 남기는데, 대체 불가한 모계는 이것을 육체로 강력하게 전달한다. <트루 라이즈>(1994)만을 예외로 놓고 보면, <터미네이터> 1, 2편과 <에이리언2>(1986), <타이타닉>(1997) 모두 이런 양상을 드러내며, 모성이 생명 전체를 아우르는 관념으로 확장된 것이 <어비스>(1989)와 <아바타>(2009)다. 바다와 우주를 배경으로 생명의 테마를 (여성이 아닌 어린 남성의 관점으로서) 모성으로 이해시킨 스토리에, 나머지를 몽땅 테크놀로지로 가득 채운 일련의 가족영화들이 바로 제임스 카메론의 필모그래피다.

제임스 카메론의 ‘여성편력’?

나는 카메론도 여성에게 강한 의존 심리를 지닌 ‘마더콘’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그의 사생활은 우리가 알 바 아니지만 제작자 게일 앤 허드, 감독 캐스린 비글로, 배우 린다 해밀턴 등으로 이어지는 결혼과 이혼의 반복은 혐의가 좀 짙다. 절묘하게 프로젝트의 착수와 마감에 맞춰, 하나같이 암사자 같은 누님들과 살다 도망친 이 남자의 역사가 과연 ‘여성편력’일까? 그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서 “나는 세상의 왕이야!”라고 외쳤을 때, 나는 어째선지 “해냈어요, 엄마! 세상의 정상이에요!” 하고 외쳤던 <화이트 히트>(1949)의 제임스 캐그니가 떠올랐고, 이 J. C.를 돌봤던 사라 코너들의 마음속에 어떤 모성이 스쳐갔을지 괜히 궁금했다.

다시 <터미네이터>의 J. C.로 돌아와서, 시리즈 내내 기계들에게 필멸(必滅)의 대상이었던 존은 이제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와 같이 자랐던 존 코너의 이런 멸망은 예견된 결과지만 미흡함이 남는다. 존은 스카이넷에 의해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융합의 길을 선택했어야 한다. 엄마를 향해 반복하는 시간 장난이 아니라, <매트릭스> 트릴로지에서 네오가 기계와 인간 사이에서 한 것과 비슷한 일 말이다. 필멸의 마더콘 소년은 모성을 그만 찾고 자신의 운명을 홀로 마주해야 한다. 2015년, 존 코너도 이제 서른살. 자기희생을 깨달을 나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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