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황진미의 영화비평] 염석진의 최후가 의미하는 것은
2015-08-04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근대 여성과 독립운동을 중심에 두고 ‘먹고사니즘’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다

※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암살>

<암살>은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조선독립군의 암살 작전을 그린다. <범죄의 재구성>(2004), <타짜>(2006), <도둑들>(2012)에서 보았던 최동훈 감독의 실력 그대로, 놀라운 짜임새와 인물들간의 조화가 돋보인다. ‘케이퍼 필름’이 제작한 영화답게, <암살>은 케이퍼 무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장르의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몇몇 스타일리시한 장면이나 장중한 음악으로 고전영화의 풍미를 살려낸 호쾌한 액션물이다.

영화는 1930년대를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단지 상하이의 조차지나 경성의 미쓰코시 백화점을 그럴듯하게 그렸다는 뜻이 아니다. 1930년대 초 사정을 매우 정교하게 그려낸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국을 수립한다.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항저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지도력이 약화된다. 일본군 헌병대와 총영사관은 대거 밀정을 투입했다. 당시 상하이와 만주에서 폭탄테러가 계획됐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1930년대 경성은 소비문화의 성장으로 모던보이, 모던걸이 등장했지만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어 대규모 테러는 계획되지 못했다. 영화는 김구, 김원봉 등 실존인물에 안옥윤, 염석진 등 허구의 인물을 가공해넣으면서 1933년에 경성에서 엄청난 암살사건이 일어났다는 허구를 주조해낸다.

민족주의와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정의의 논리

<암살>은 일제강점기의 무장독립투쟁을 그리면서 선악의 구도를 사용한다. 낡은 민족주의에 기댄 영화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암살>은 민족주의가 아닌 인류적 보편의 문제로 일제 침략을 바라보고 있으며, 한동안 탈민족주의 담론으로 유행하던 ‘먹고사니즘’도 비판적으로 넘어선다.

가령 <청연>(2005)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다 민족주의에 걸려 넘어진 영화이다. 영화는 일본군 행군을 보고 “닌자의 비상”을 떠올렸다는 발칙한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출발하지만, 박경원(장진영)의 ‘친일부역’에 대한 변명을 해대느라 엉뚱한 신파를 동원하고, 본래 의도했던 신여성에 대해서도 다루지 못했다. 또한 박경원의 ‘일만친선 황국위문 일만연락비행’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죽음으로 봉합한다. 그런데 박경원의 비행을 단지 황국신민으로서 자아실현이라고 보기에는 국제적인 문제가 있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을 찬성한다는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친일파’라서 나쁜 것이 아니라, ‘전범’이라서 나쁘다. 이는 민족주의를 둘러싼 친일-항일의 이분법으로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놓치기 쉽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앞서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은 의도적으로 탈민족주의를 표방했었다. 영화에서 서사를 끌고 나가는 주인공이자 최종 승자는 ‘이상한 놈’ (송강호)이다. 그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본 놈 밑에 있나, 양반 놈 밑에 있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며, 한몫 챙겨서 땅을 사서 가축을 기르며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영화는 그의 ‘먹고사니즘’을 추인하며, ‘민족의 기상’ 운운하는 독립군의 말을 헛소리로 처리한다.

한동안 한국영화의 안팎에서 ‘먹고사니즘’은 어떠한 이념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올해 개봉작들은 연달아 그러한 비도덕을 성찰한다. <나의 절친 악당들>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손님>은 “살기 위해 지은 죄도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암살>에서는 먹고사니즘을 넘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물론 <암살>에도 “독립운동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라 말하는 ‘속사포’ (조진웅)나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주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그를 돕는 영감(오달수)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자긍심이나 “거세당한 돼지로 살 수 없다”는 존엄에 대한 자각이 이들을 변화시킨다. 일제가 나쁜 것은 일본이어서가 아니라 반인륜적이고 파시스트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은 실수한 소녀를 “왜 줄에서 이탈하냐”며 쏴죽이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안옥윤(전지현)이 총을 잡은 것은 1920년 만주참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일본군은 학살자이다. 일제에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로 취급받던 김원봉에게 한 요원이 묻는다. “일본인 민간인을 희생시켜도 됩니까?” 모든 민간인들은 죽여서는 안된다고 김원봉(조승우)이 답한다. 실제로 의열단은 암살대상을 조선총독부 고관, 일본군 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대지주 등으로 제한했다. 제국의 지배자와 친일 부역자들을 상대로 한 싸움이지 일본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영화는 조선독립에 찬성하는 일본인의 존재를 통해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근대화와 여성, 그리고 친일의 논리

영화에서 주목할 대목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이다. 안옥윤, 아네모네 마담, 안옥윤의 엄마 등이 보여주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여성과 근대와 민족이 만나는 지점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여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는 희생자인 위안부와 서구 소비문화의 첨병인 신여성이다. 그러나 여성이 근대를 받아들일 때 국가가 빠질 수 없다. 봉건적 질서 속의 여성은 직접 국가와 관계 맺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되고자 할 때, 국가는 이등국민으로 여성을 소환한다. 식민지 여성에게 국가는 존재하지 않지만 국가의 부재가 이들의 주체형성에 관여한다. 신여성 중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관여했지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봉건질서가 여전히 남아 있던 3•1운동 당시 유관순으로 대표되는 여학생의 참여가 그토록 높았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영화는 남자현, 박차정 등 실제 여성 독립운동가를 연상시키며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암살>에서 전지현은 1인2역을 통해 부르주아 신여성 미츠코와 여성 독립운동가 안옥윤을 연기한다. 미츠코는 “나도 독립운동 하는 사람 좋아해. 그런데 넌 안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미츠코는 친일파인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 말하며, “경성에선 다 이렇게(친일을 하며) 살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안일하고 순진한 인식은 곧 죽음으로 되돌아온다. 그것도 아버지에 의해. 강인국(이경영)은 자기 출세에 해가 될 거란 판단에 가차 없이 딸을 죽인다. 자기 대신 죽은 미츠코의 방에 들어온 안옥윤은 웨딩드레스를 보고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듯 눈물을 삼킨다. 온갖 풍파를 다 겪은 안옥윤이 가장 끔찍하게 느끼는 것은 부르주아 여성이 되어 정략결혼이란 굴레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부재하는) 국가와의 대면을 피한 채 부르주아 신여성이 되는 것을 여성의 근대화로 오인한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강인국은 자신의 친일이 가족을 위한 일이자 가난한 조선을 잘살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손으로 아내와 딸을 죽였다. 이는 그의 경제개발 논리가 결국 가족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죽이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이 염석진(이정재)이다. 그는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끌려와 살려주는 대가로 밀정이 되어 임시정부에 투입된다. 그는 중국에서 정보를 빼돌리다 경성으로 와서 종로경찰서 수사관으로 일한다.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로 일한다. 그는 반민특위에 고소됐지만 빠져나온다. 영화는 해방의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반민특위 방청객의 흥분으로 그대로 이어간다. 이것은 엄격한 증거주의를 채택한 반민특위의 무력함을 꼬집는 것이기도 하고, 당시의 국민들이 해방의 열기만큼 친일파 청산에 냉철하게 대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를 따르는 변절자 염석진은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가 해방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냐고.” 1949년 반민특위는 친일 청산에 실패했다. 그러나 안옥윤처럼 말해야 한다. “그 명령, 82년 만에 집행합니다.” 염석진의 최후는 단지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위한 봉합이 아니라, 반드시 처단해야 할 자들을 더이상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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