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밴크로프트가 침대에 앉아 셔츠를 벗었다. 더스틴 호프먼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기 위해 더스틴 호프먼은 안간힘을 다한다. 앤 밴크로프트는 거침이 없다. 촬영장이 후끈하다. 더스틴 호프먼은 앤 밴크로프트의 아들뻘이라는 설정이다. 심지어 극중에서 그녀는 그의 부모와 친구다. 정확히는 아빠 동업자의 아내다. 더스틴 호프먼이 남성적인 멀쩡함을 과시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만진다. 그런데 이게 뭐랄까, 가슴을 만졌다, 라기보다 손을 가슴 위에 널어놨다고나 할까. 이 모든 걸 지켜보던 감독 마이크 니콜스는 빵 터졌다. 촬영장이 떠나가라고 웃기 시작했다. 무단 투기를 했다가 걸린 사람마냥 가슴에서 손을 뗀 더스틴 호프먼이 카메라를 등지고 방구석의 벽으로 향한다. 그리고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한다. “로빈슨 부인, 이건 옳지 못한 짓이에요.” “내가 매력이 없니?” “아니요, 로빈슨 부인, 부인은 제 부모님 친구 중에 제일 멋진 분이에요.” 하지만 더스틴 호프먼이 벽에 머리를 박은 건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어찌됐든 마이크 니콜스는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이 어마어마한 명장면이 탄생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는 빤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정말 힘들고 어렵다. 고를 수가 없다. 당연하잖아. 다만 그때 상황마다, 혹은 머릿속에 떠올린 기준에 따라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다르게 떠오르기는 한다. 좋아하는 장면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대부2>와 <록키>와 <미드나잇 카우보이> 중에서 갈등되긴 하는데, 아무래도 역시 <졸업>을 꼽을 수밖에 없다. <졸업>은 정말이지, 아, 거의 모든 장면이 시퀀스 단위로 전부 다 좋다.
<졸업>은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시작을 알린 영화다. 아,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뭐냐 하면 글쟁이들과 영화사가들이 <졸업> 이전의 할리우드와 그 이후의 할리우드를 구분짓기 위해 규정한 개념인데, 천편일률적인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반항과 자유를 영화 문법과 제작 시스템 위로 가져와 발언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영화들과는 구분되었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 <졸업>과 함께 아메리칸 뉴시네마를 본격적으로 선언한 영화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다. 이후 <와일드 번치> <미드나잇 카우보이> <솔져 블루> <작은 거인> <어둠의 표적> <대부> <맨츄리안 캔디데이트> <도청> 등 수많은 뉴시네마 걸작들이 발표되었다. 서로 너무 다른 영화들처럼 보이겠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 영화들은 언뜻 봐도 좋은 놈 나쁜 놈을 가를 수 있는 기존의 대중영화 갈등 구조를 완강히 거부했다. 더불어 기존의 질서가 젊은 세대들에게 강요하는 것들, 요컨대 너도 이렇게 살아야 나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조롱했다. 어차피 니들처럼 살아서 니들처럼 될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물론 노파심에 말을 더하자면, 이들은 무려 아메리칸 뉴시네마라는 걸 선언해놓고도 알량한 작가주의에 함몰되어 <황무지>같이 덩치 큰 졸작을 마지막으로 몰락해버리고 스필버그와 루카스에게 바통을 넘겼다. 블록버스터라는 말도 그때 생겨났다. 이를테면 6월항쟁씩이나 해놓고 도로 노태우에게 표를 준 한국의 시민정신 같은 거랄까. 결국 애들은 애들일 뿐이었다는 말로 귀결될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왜 “애 같은 애”들이 어른스러운 기민함과 능청스러움을 같이 누릴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멍청하기 짝이 없이,
아무튼 그렇다는 이야기다.
요즘 같아서야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일 테니 <졸업>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자면 전말은 이렇다. 주인공이 아버지 동업자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주인공은 기성세대의 질서에 억눌리고 기가 죽고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고 어쩌고저쩌고, 어찌됐든 너무나 심란하고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까. 물론 그는 이런 거시적인 고민에 빠질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중산층 집안의 자제다.
그는 로빈슨 부인의 유혹에 결국 넘어간다.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싶지만 그런 거 없다. 의미 없는 육체관계만 늘어간다. 그러던 와중에 속사정을 모르는 부모들(물론 여기서 로빈슨 부인은 제외된다)의 요구대로 로빈슨 부인의 딸과 소개팅을 강요받는다. 그는 매우 언짢다. 그래도 귀찮기 싫어서 억지로 만난다. 그런데 유레카! 만나고 보니 너무 좋은 거다. 이건 내 여자다, 싶은 거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예상하다시피 로빈슨 부인의 방해가 시작되고 결국 주인공은 여자친구에게 털어놓는다. 내가 니 엄마랑 잤다. 그는 버림받는다.
이후 주인공은 정을 뗀 여자친구의 대학교를 찾아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 결혼하려 한다. 아니 왜 갑자기 결혼을? 싶지만 이 영화가 67년도 영화라는 걸 감안하자. 계속되는 주인공의 구애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 상심한 주인공은 짐을 싸고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그날 새벽 그녀가 찾아온다. 자다 깬 주인공을 앞에 두고 그녀가 애매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당장은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자기가 결정하기 전까지. 그녀가 방을 나선 후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 주인공이 외친다. 믿을 수 없어! 보는 나도 그랬다.
이야기는 익숙한 결말로 치달아간다. 그녀는 부모가 결정한 상대와 결혼을 하러 가고,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쫓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장에 당도한다. 이제 막 언약을 나눈 부부를 향해 주인공이 창문을 두드려대며 절망과 희망을 섞어 외쳐댄다. 일레인! 일레인! 일레인! 그걸 한참 바라보던 그녀도 마침내 소리친다. 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결말. 그는 웨딩드레스 차림의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탄다. 그런데 우리가 다 아는 결말임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이 있다. 많은 이들이 <졸업>의 결말을 해프닝으로 끝난 예쁘고 파릇파릇한 이야기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버스에 올라탄 그들의 표정을 보라. 처음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승객들의 시선을 외면하며 기쁘고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얼굴에서 빛이 빠져나간다. 급기야 표정이 사라지고 어두운 기색이 되고야 만다.
부모의 질서를 부정하고 맞서고 눈앞에서 깨부순 그들은 처음에는 기쁘고 흥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은 이후에 그들이 짊어질 세상의 무게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당장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감을 실감하고 표정이 어두워진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아이가 어른이 되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 정말 얼마 되지 않는 희귀한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들이 부모의 요구를 따랐어야 했다고, 어른의 질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불행할 거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후 혼란스럽고 방황했을 것이다. 어렵고 당황스럽고 혼자 힘으로 많은 것을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불행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은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다. 불행할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은 걸 책임지고 노력한다. 어른스러운 길이란 건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선택과, 이후 어른스럽게 책임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이 행복했을 것이라,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행복할 거라 확신한다. <졸업>은 낭만이나 후회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생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때 느껴지는 단 한장의 촉감과 그것의 어마어마한 무게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만하다는 것에 관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