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people] 현실의 답답함을 코믹하게
2015-08-13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감독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차지한 안국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27기로 장편제작연구과정을 거쳐 2년간 공들인 시나리오로 영화를 완성했다. 촬영 전 각본을 읽은 박찬욱 감독은 “근래 읽은 가장 재밌는 시나리오”라고 말했고, 전주국제영화제 이상용 프로그래머는 “한국 독립영화계의 지형도 안에서 B급영화적 분위기로,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끝까지 밀어붙인 흔치 않은 경우”라고 평했다. 영화는 엘리트가 되고 싶었지만 공장에 취직하는 데 만족해야 했던, 사랑을 꿈꿨지만 남편의 자살 시도 이후 계속되는 시련에 허덕여야 했던 수남(이정현)이라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수남이 어찌하여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정현을 캐스팅하는 데 박찬욱 감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수남 역의 캐스팅 1순위가 이정현씨였다. 그런데 정현씨 소속사에 시나리오를 보낸 지 2시간 만에 거절당했다. 캐스팅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원래 이렇게 빨리 답이 오는 건가보다 했다. (웃음) 그러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분장실장님이 박찬욱 감독님과 친분이 있어서 내 시나리오를 보여드렸고 박 감독님이 재밌게 읽었다며 한번 보자고 연락을 주셨다. 만나뵌 자리에서 캐스팅 얘기를 하다가 감독님이 “(이)정현이 어때?” 하시더라. 앞선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바로 정현씨에게 연락해주셨다. 알고 보니 내 시나리오가 정현씨에게 가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잘린 거였다. 시나리오를 읽은 정현씨가 곧바로 하겠다고 연락해왔다. ‘이제 나만 실수 없이 잘하면 되겠다, 내가 정현씨 덕을 보겠구나’ 싶더라.

-박찬욱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워낙 박찬욱 감독님 영화를 좋아해서 소장하고 있던 ‘복수 3부작’ DVD에 사인부터 받았다. 감독님의 칭찬에 얼떨떨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막 자랑도 하고 싶고.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시나리오 비평 수업 때는 한번도 칭찬을 못 받았는데…. (웃음) 박 감독님께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엔딩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지 정도만 여쭤봤다. 잘 찍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시더라.

-고교 진학을 앞둔 수남은 학업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공장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꿈은 철저히 깨지고 쓰디쓴 현실을 맛본다.

=수남은 만약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만 제대로 주어졌다면 뭐든 될 수 있었을 사람이다. 기회가 없었기에 계급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단추가 단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끼워졌다면 그녀는 아마도 지금과는 전혀 다를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여성을 중심으로 극을 써내려가다보니 막힐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내가 봐도 재능이 참 많은 분인데 나나 아버지 같은 집안의 남자들 때문에 본인에게 주어진 기회를 많이 놓치셨다. 수남을 통해서 생활환경이나 사회적 시스템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려보고 싶었다.

-사회 체제, 계급, 성차에 따른 불평등에 대한 고민이 극에 자연스레 녹아 있다.

=내 오래된 질문이다. 국가 시스템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데 개인의 힘은 갈수록 작아진다. 뉴스를 봐도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지 않나. 대신 피해자를 괴롭히는 건 언제나 비슷한 계급의 여론이다. 같은 계급끼리 싸운다고 해서 자신이 보다 높은 계급적 위치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는 사이에 사건으로 이득을 얻는 자는 생기나 그가 누군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상황이 주는 답답함을 코믹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코믹하게 가려던 의도는 연출적으로 성공한 것 같은가.

=전주국제영화제 때도 그렇고 잔인하다는 평이 많아서 사실 좀 충격받았다. 내가 <복수는 나의 것>(2002)을 너무 많이 봤나? (웃음) 나부터도 잔인한 영화를 못 본다. 너무도 사실적이라 잔혹한 장면은 별로 없다. 관객이 ‘에이, 저건 말도 안 돼. 뻥이야’ 이러면서 웃길 바란다.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면서 수남의 손은 점점 더 때가 끼고 부르튼다. 극의 비극성이 더해질수록 수남의 손의 변화가 도드라지는데.

=손이야말로 신체에서 노동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다. 수남은 기술을 배워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인데 그렇게 되지 못하면서 거칠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남의 처지를 그녀의 손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수남과 청각장애인 남편 사이의 로맨스 감정은 상당히 불균형적이다. 남편을 향한 수남의 마음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며 거의 집착에 가까워 보인다.

=수남은 자기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 정말 필요한 것을 못 찾고 있다. 그 빈 부분을 남편으로 채워보고자 한다. 심지어 남편이 자살을 시도했을 때조차 그를 죽지 못하게 하잖나.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린 거다. 수남은 정말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옆에 있으니까 사는 걸까. 이 질문을 바탕으로 두 사람의 로맨스를 그렸다. 그래야 이들의 사랑이 갑갑한 노동의 현실과 맞물리며 더욱 짜증스럽게 보일 것 같았다.

-극중 캐릭터나 설정, 에피소드 등에서 만화적인 상상력이 엿보인다. 혹시 만화광인가.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을 비롯해 일본 만화를 상당히 좋아한다. 시나리오 구상 초기에 만화 <이치 더 킬러>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인 인물들이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서로에게 위해를 가한다. 각자의 다른 성향과 욕구가 맞물리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속 인물들을 그려가는 데 기준점이 돼주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의 연결고리가 뭘까 떠올려보게 되더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인공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세계에 들어갔다가 또다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 세계를 빠져나가는 기본 구조가 이 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열심히 일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될 뿐인 수남의 처지를 ‘성실한’이라는 단어로 비틀어봤다.

-어떤 결심을 한 듯 수남이 라이더 재킷을 걸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마지막에 책임감 없는 희망을 보여주거나 회피하는 느낌으로 결론을 맺고 싶지 않았다. 관객이 엔딩의 수남을 보면서 수남의 미래를 한번 더 상상하길 바랐다. 이런 결말이 수남에게 행복일지 불행일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으로서 관객이 꼭 눈여겨봐주길 바라는 장면이 있나.

=어떤 장면이라기보다는 정현씨의 연기를 유심히 봐주면 좋겠다. 현장에서 나뿐만 아니라 스탭들이 정현씨의 연기를 보며 운 적이 있다. 시나리오상에서는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는데 그녀의 연기를 보니까 눈물이 나더라. 정현씨의 집중력이 그만큼 대단했다. 정현씨가 그동안 영화를 많이 안 찍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깝고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 작품이 이정현이라는 배우에게 또 한번의 의미 있는 평가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나.

=준비 중인 아이템이 세개 정도 있다. 재밌게 쓰려고 했는데 써놓고 보니 디스토피아적 결론이 난 작품이 하나, 로맨스가 하나. 그리고 리얼리즘적인 영화가 있다. 그동안 찍은 단편 <더블 클러치>(2011)와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2008)가 모두 장르영화다. 어쩌면 리얼리즘 영화를 찍는 게 두려워 내가 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들을 고루 찍으며 내공을 쌓으려 한다. 길게 보는 안목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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