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 많던 구로공단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위로공단>의 출발점이었다는 이 의문의 답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이다. 그녀들은 여전히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캄보디아의 하청 봉제공장에서, 마트와 콜센터, 항공기 안에서 불안정한 고용과 감정 착취, 신체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성차별을 견디고 있다. 수평 트래킹이 훑어가는 끝없는 미싱 대열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생산의 활력이나 보람이 아니라 시시포스의 노역이다. <위로공단>이 믿는 정의는 김진숙씨의 말로 요약된다. 복잡할 거 없다. 하루 22시간 일해도 월세를 치를 수 없다면, 노동자 본인이 하루 수십벌 만드는 옷을 한달치 가처분소득으로도 살 수 없다면, 그 세계는 잘못된 세계다.
08/04
빠르다. 달린다. 몰아친다. <베테랑>의 감상에 자주 보이는 단어들이다. 정작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이 유머와 액션으로 점철된 스피디한 영화로 인지되는 현상에 놀라는 중이다. 감독이 보는 실상은 전작보다 액션 빈도가 높지 않고 웃음기 없는 장면도 상당해서다. <베테랑>이 질주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중고차 절도단 소탕 작전을 통해 서도철 형사(황정민)를 비롯한 광역수사대 캐릭터를 소개한 전반 20분의 잔상이 크지 않은가 싶다. 이 20분을 이루는 주요 3개 시퀀스의 도입부는 카메라가 중고차 마켓, 부두, 경찰서 등 넓은 공간을 누비며 분주한 인물들을 둘러보는 긴 트래블링 숏으로 찍혀 있다. 복잡한 블로킹을 요하는 롱테이크로 관객 입장에서는 왁자한 공간에 대뜸 던져서 무엇을 볼지 눈치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컷으로 연결하는 경우에도 달리는 차가 화면을 밀어넘긴다거나 신호등을 지도의 점으로 바꾸는 매치 컷으로 단절감을 최소화했다. “영화의 속도감에 대한 나의 취향은 어릴 적 보았던 동시상영 영화의 영향이 큰 것 같다. 3시간에 두 프로를 틀기 위해 한국 극장에서 짧게 편집했던 영화, TV용으로 재편집된 서부극들로부터 습득한 리듬감이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의 경우 초반 연출의 제1목표는 속도감보다 앙상블 살리기였다고 말한다. “속도감은 <짝패>처럼 한 호흡에 달려가는 90분대 영화에서 중요하다. <베테랑>은 앙상블의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자르지 않고 1분 이상 지속되는 숏으로, 경쾌하지만 명료하게, 인물들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하고 싶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관객이 액션과 리액션을 찾아보도록 만들려고 했다. 스테디캠 효과를 낼 수 있는 신형 경량 장비 모비(MoVI)가 도움이 됐다.”
액션의 노선도 맥락을 함께한다. <베테랑>은 타이트하게 촬영한 싸움을 잘게 잘라 붙이지 않고, 무릎 선에서 잘리는 미디엄 숏으로 정직하게 보여준다. “전작에서 오마주한 영화들이 감독이 되겠다는 자의식이 형성된 후 본 영화들이라면 <베테랑>의 오마주는 감독의 꿈을 갖기 전 좋아했던 80년대 홍콩과 미국 형사영화들을 향한다”고 류 감독은 구별한다. 대다수 관객은 코믹하고 살짝 비현실적으로 과장돼 있다는 점을 <베테랑> 액션의 특징으로 꼽을 것이다. 예컨대 극중 인물들은 소화전이나 스패너 같은 쇳덩어리에 ‘깡’ 소리나게 부딪치고도 멀쩡하게 몇합을 더 겨룬다. 감독이 열거하는 <베테랑> 액션의 영화 외적 영감이 <톰과 제리>, 한나 바버라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TV코미디 인기 코너였던 ‘변방의 북소리’이고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액션과 유머로 점철된 영화’라는 관객의 인상은 액션과 유머를 동반 고조시켜 터뜨리는 설계가 빚어낸 착시일 수도 있다.
08/05
내가 배우 황정민을 실제로 처음 본 장소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무대였다. 노래하고 춤추는 그는 우주 최고 미남이었다. 두 번째 그의 실물과 마주친 곳은 진짜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 앞이었다. 그는 크로스백의 끈을 이마에 걸고, 긴 팔다리로 휘적휘적 리듬을 타며 걷고 있었다. (조동진의 <제비꽃> 가사는 아니지만) 내가 그를 세 번째 보았을 때 황정민은 허진호 감독의 <행복> 촬영현장에서 카메라가 돌지 않는 틈틈이 자작곡인가 싶은 멜로디부터 옛날 가요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노래하고 박자를 탄다 해서 기분이 꼭 유쾌하다는 의미는 아닐 테지만 어쨌거나, 내가 본 황정민은 음률과 리듬을 십년 묵은 야상처럼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고르게 좋은 연기를 보이는 이 배우의 모습 중 류승완이 찍은 황정민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유는 특유의 ‘흥’(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황정민의 액션 연기야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베테랑> 초반 황정민은 전에 없이 성룡풍의 기교적 동작을 시연한다. 배우의 속성을 고려해 서도철의 액션을 디자인한 부분이 있는지 류승완 감독에게 물었다. “<그림자 살인>의 황정민 액션을 좋아한다. 정우성과 황정민은 둘 다 팔다리가 긴 배우인데 정우성이 강렬한 싸움의 느낌을 정통으로 잘 살린다면, 황정민은 영화적 액션에 자기 리듬을 맞출 수 있는 배우임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황 선배는 휴식 시간에 탭댄스를 추고 운동화 끌고 밥 먹으러 갈 때도 몸에 리듬감이 있다. 초반 카센터 신 경우 환경이 중요한 액션이다. 우리가 설계한 연기를 아주 재미있게 구현해줄 거라고 믿었다. 명동에서 조태오(유아인)와 맞붙는 결말에서는 싸움 기교보다는 감정적 에너지로 바닥에서 엉키면서 딱 맞게 소화했다.” 뭉뚱그리자면 ‘춤 같은 액션’이 키워드인 셈이다. 부두에서 중고차 절도단을 급습하는 순간 헤드라이트를 방정맞게 깜박여 쓸데없이 약을 올리는 형사. 그것이 바로 황정민의 서도철이고 <베테랑>이라는 영화가 가진 톤의 단면이다.
영화를 본 다음 <베테랑>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보통의 시나리오보다 상세한 액션 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류승완 감독이 스크립트에서 액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첫째, 스탭 전원이 현장에서 동일한 그림을 머리에 넣고 있길 바라서이고 둘째는 특성상 예산이 많이 드는 액션 신의 일정과 비용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말 난 김에 이젠 정착된 류승완 감독의 액션 연출 프로세스를 받아 적어둔다. “개략적 스크립트를 정두홍 무술감독이 읽고 담당 프로듀서, 촬영감독, 배우까지 모두 모여 아이디어를 나눈다. 이를 바탕으로 무술감독이 ‘숙제’를 해오면 검사의 시간이 있다. ‘참 잘했어요’부터 ‘다시 하세요’까지 있다. (웃음) 서울액션스쿨에서 기본 컨셉을 세우고 배우 트레이닝 과정에 스턴트팀이 합류해 살을 붙이면 동영상 콘티가 나온다. 다음은 미술팀, 촬영부 차례다. 미술감독이 로케이션 헌팅에 반드시 동행해 현장의 ‘액션 요소’- 소화전이라든가- 를 발견해 더하고 세트 디자인도 끝내면, 모든 배우와 촬영, 미술, 제작부, 연출부가 액션스쿨에 모인다. 가(假)세트- 라고 해도 편의점 종이박스와 청테이프로 만든 것이지만- 로 여기가 싱크대다 냉장고다 세팅해서 실제로 촬영에 쓸 카메라로 찍어본다. 이때 소형 카메라를 쓰면 정작 촬영장에서는 카메라 자리가 안 나오는 사태가 생겨서다. 이렇게 얻은 화면으로 그림 콘티에 착수하고 시나리오를 최종 정리한다.”
08/06
투박하게 말하면 <베테랑>은 류승완 필모그래피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 이후 처음으로 회한 없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에서는 살아보려고 애쓰는 불운한 사람들끼리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싸우다 쓰러졌고 <부당거래>는 권력의 암시장에 휘말린 주변인이 결국 거래 시스템의 작동에 일조하고 자멸하는 이야기였다(얼마나 비관적인 ‘액션 키드’인가!). 비록 인물은 패배했지만 <부당거래>는 갑 없이 을, 병, 정이 뒤엉키던 류승완의 전작들과 다르게 공적인 불의와 그로 말미암은 개인의 불행이 한국 사회에서 생산, 증식되는 구조를 주시함으로써 허무를 벗어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베테랑>의 서도철과 동료들은 유보 없이 정의롭고 유능한 경찰이며 조태오는 영락없는 공공의 적이다. 여기서 광역수사대의 승리는 게임의 그것에 가깝고 요행의 지분이 크다. 만약 조태오가 섣부른 무리수를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 조 회장의 계획대로 정•재계 끈을 당겨 대처했다면 서 형사의 승산은 희박했을 것이다. <베테랑>의 요행수들은 찜찜한 동시에 그럴싸하다. 총경은 막내 형사가 칼을 맞자 내 새끼를 누가 건드리느냐는 가부장적 분노를 발동해 판을 뒤집고, 명동에서 조태오를 가로막는 시민은 “어린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네”라고 나이를 앞세워 제동을 건다. 요컨대 <베테랑>에서 류승완 감독은 그것이 고작 가상의 게임일지라도, ‘깃털 뽑기’에 불과하더라도, 100% 당당한 명분과 의지가 뭉친 결과가 아닐지라도 승리의 감각을 관객에게 간절히 환기시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이유는 물론 2015년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정당거래’의 가능성을 잊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다. “어쩌면 세월호 사건 이후 내게 일어난 변화 같기도 하다. <짝패>에서는 ‘어차피 안 될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농담할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농담을 하기엔 현실의 패배주의가 너무 심각하고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몇년을 힘없이 살아보니 자신에게 짜증이 났고 우리는 언제까지 져야만 되나 반발심이 들었다. 그러니 <베테랑>은 확실히 반작용이다.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웃음)”
서도철 형사와 조태오가 벌이는 마지막 처절한 격투에서 가장 눈에 밟힌 점은, 휴대폰을 쳐들고 두 사람을 에워싼 익명의 군중을 명백히 우군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었다. “그 싸움은 확실히 서도철과 조태오의 싸움이 아니라 조태오와 우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서 형사가 신진물산에 혼자 뛰어들었을 때는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맥을 못 춘다. 하지만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 열려 있는 길거리는, 내 ‘나와바리’라고 서 형사는 믿는다.” 감독은 솔깃한 비유로 한발 더 나아갔다. “관객은 서도철을 응원하지만 서도철이 아니고, 조태오를 미워하지만 조태오가 아니다. 하지만 지나가다 한마디 던지는 아트박스 사장은 관객일 수 있다. 관객이 온전히 이입할 대상을 만들어 클라이맥스 스크린 속으로 관객이 뛰어들게 만들고 싶었다. 마당놀이처럼.”
과연 피투성이가 된 서도철이 조태오의 죄목을 대로 복판에서 쩌렁쩌렁 나열할 때, 나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송강호)가 법정에서 민주주의를 논하며 안긴 카타르시스를 떠올렸다. 리더십과 투명한 위기 대처를 갈망하는 마음들을 대리 충족시켰던 <명량>의 울돌목 해전 시퀀스도 생각했다. 그러나 <베테랑> 명동 장면의 중요한 차이는 그 자리의 시민들이 조태오와 서도철이 누구인지, 어쩌다 때리고 맞는 중인지 전혀 모르는 채 눈앞의 상황에 즉자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의 맥락도 구경꾼 본인의 평소 정치적 성향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영문은 모르지만 난폭운전을 하던 남자가 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심하게 폭행하니까 저건 아니잖아 움찔하는 정도다. 감독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거기서 정의를 위해 그 싸움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서도철이 쓰러지면 괜찮냐며 일으켜주고, 주춤거리면서도 조태오에게 쉽사리 길을 터주지 않는다. 만약 두 사람에 대한 정보와 선입견이 있었다면, 조태오가 재벌 후계자인 걸 알았다면, 아트박스 사장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면 상식적으로 명백한 답을 가질 사건 사고에 대해, 오히려 필터가 끼어들 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이 말에서 사람들의 기본적 선의에 대한 류승완 감독의 최소한의 믿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미디어와 지식의 기능에 대한 그의 실망을 감지한다. <부당거래> 말미에 원로 법조인은 비리로 고발된 검사 사위에게 “남자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라고 곧 어물쩍 넘어갈 것을 암시한다. <베테랑>으로 류승완 감독은 반발한다. 아니다. 우리가 눈 부릅뜨고 주시하면 그냥 안 넘어갈 수도 있다.
류승완 감독은 그가 사랑하는 <베테랑>의 진짜 히어로는 서 형사가 아니라 항의하고 폭행당하고 다시 깨어나는 배 기사(정웅인)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가 제일 정당한 인물이다. 배 기사는 동료 운송노동자들이 하청 사무소 직원을 윽박지를 때 동참하지 않고 진짜 당사자인 대기업에 곧장 찾아가 요구한다. 그리고 비폭력으로 저항한다. 잘 보면 배 기사의 주먹이 거칠게 분장돼 있다. 한때 싸움질하고 살았지만 아버지가 된 후 어떤 결심을 한 남자다. 아들 앞에서 끝내 욕하지 않고 비폭력으로 싸웠던 사람이 결국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움직인다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내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 봐! 우리 이렇게 저항해도 죽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베테랑>은 운명이나 실존은 건드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표면의 영화로서 표면적 차원의 잘잘못을 활달히 거론한다. 좋은 사람, 좋은 삶이 무엇인지 상이 뚜렷하고, 그걸 위해 지금 가능한 일을 같이 하자고 옆 사람에게 권하는 투가 스스럼없다. 류승완 감독과의 대화를 마치며 조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베테랑>을 보자마자 감독과 무척 닮은 영화라 느꼈던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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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 만세
<디올 앤 아이>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공간은 캣워크가 아니라 사옥 지하의 옷 짓는 아틀리에다. 가장 매력적인 인물도 아틀리에를 관장하는 플로랑스와 모니크, 두 장기근속자다. 쾌활한 플로랑스와 걱정 많은 모니크는 <인사이드 아웃>의 조이와 새드니스처럼 절묘한 복식조다. 그들은 모든 옷을 짓고, 신경이 곤두선 신임 보스의 요구를 받아주는 한편 부자 고객 비위를 맞추러 장거리 출장 가봉도 간다. 오래전 모델 피팅을 숨어 구경하는 어린 직공이던 이 장인들은 패션쇼 날이 밝아오자 “남의 옷인 양 씹어주겠어”라고 웃으며 행사장으로 간다. 프레데릭 청 감독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디올 앤 아이>를 고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신임 디렉터 라프 시몬스의 간접 대화로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실질적 동력은 디자이너와 아틀리에의 긴장, 그리고 조직의 위계 안에서 창의적 일을 분업하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