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패
2015-09-03
글 : 김혜리

※<판타스틱4>와 <오피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

<침묵의 시선>에서, 50년 전 인도네시아 민간인 학살로 형을 잃은 아디는 가해자와 방조자들을 방문해 왜 그랬는지 묻는다. 누구 하나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사과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잔혹 행위가 금시초문인 여인이다. 아버지를 평생 존경해온 효녀의 얼굴은 대화가 진행될수록 굳어가고, 아디가 피살자 유족임을 밝히는 순간 쩍 하고 금이 간다. 아버지의 체면을 지키려는 안간힘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충격과 연민을 감추지 못한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제부터 우리 가족처럼 지내요.” 둘은 포옹하지만 떠나는 아디는 씁쓸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부피의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디가 좀더 머물길 바라지만 차마 붙들지 못한다.

08/17

<판타스틱4>에 대한 혹평은 일약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탄 느낌이다. <뉴욕타임스>의 A. O. 스콧은 “인비저블 우먼(케이트 마라)의 남을 투명하게 만드는 파워를 본 영화에 행사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안 그래도 1, 2주면 저절로 안 보이게 될 영화지만”이라고 썼다. 평소 호평을 퍼주는 편이던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도 “차원이라고 할 만한 걸 갖지 못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극중에서 다른 차원으로 텔레포트되는 원숭이가 부러워진다”라고 악평했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 비하면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은 <다크 나이트>”라는 일타이피성 독설도 어디선가 읽었다. <판타스틱4>는 제작과정부터 잡음이 꾸준히 흘러나오다보니 부정적 기대가 미리 형성된 블록버스터다. 몇해 전 <월드워Z>도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비슷했지만, 하향 조정된 기대에 비해 완성된 영화가 그럭저럭 즐길 만해, 결과적으로 가산점을 얻기도 했다. 불운하게도 오늘 확인한 <판타스틱4>는 특이한 관점으로라도 부각시킬 만한 장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주피터 어센딩>처럼 철저히 허술하거나 뒤죽박죽이라 아이로니컬하게 즐길 수 있는 부류도 아니다. 어느 쪽으로도 비상구가 없어 보이면 평 쓰는 사람들은 영화의 어디가 어떻게 미비하고 역기능을 일으켰는지 상술할 의욕을 잃고, 영화가 실망스러운 정도를 개성 있게 표현할 문장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08/18

이십세기 폭스는 2005년작 <판타스틱4>와 2007년작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과 차별화되는 비주류 감성을 리부트에 끌어들이겠다는 목표로 <크로니클>의 조시 트랭크 감독을 선택했다. 그러나 완성된 <판타스틱4>는 허망하게도 기성 슈퍼히어로영화의 단골 블록으로 조립돼 있다. 부당하게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소년, 직접 연구한 신기술의 피실험자로 나섰다가 입는 부작용, 좌절한 이상주의를 인류멸망론으로 비화시키는 악역 등이 등장한다. 웬만한 히어로물이면 하나씩 돌려쓰는 클리셰지만 <판타스틱4>는 개수가 많다. 얄궂은 점은, 그러면서도 서사 장르의 훨씬 유서 깊은 공식인 3장 구조나, 발단-전개-절정-결말 구성은 포기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판타스틱4>는 영화 전체가 100분짜리 발단처럼 보인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를 보며 액션 클라이맥스가 너무 길다고 투덜거리긴 여러 차례였지만, 액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나서야 클라이맥스인 줄 깨닫기는 <판타스틱4>가 처음이다. 그러나 진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세부가 독창적이라면 상투성이나 구조의 미비함에 대해 히어로물 관객은 상당히 너그러워질 수 있다. 한데 <판타스틱4>는 에피소드와 대사도 연방 빗나간다. 주인공 리드(마일스 텔러)와 벤(제이미 벨)의 고교 시절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당황했다. 무려 순간 차원 이동 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연구자들이 비책을 찾아다니는 곳이 고등학교 과학경진대회장이라니! 소싯적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했던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류의 청소년 모험물을 추억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리드가 박스터 연구소에 발탁된 이후 전개도 김이 빠진다. 일종의 과학 영재 호그와트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배경에서 청춘영화로서, SF로서 개발할 수 있었던 풍부한 드라마와 유머는 잠재성으로만 남았다. 고작 오가는 말이 “너, <해저 2만리> 읽었니?” 운운이다. 말난 김에 대사를 돌아보자면 <판타스틱4>의 언변은 <허큘리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그것만큼 둔탁하다.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어”, “그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지만, 우리를 전부 합친 것보다는 강하지 않아!” 등의 하나마나한 회화 예문이 결정적 순간 주인공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쓰고 보니 후자의 대사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주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차이는, 조스 웨던 감독은 같은 메시지를 기승전결이 있는 액션과 이미지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텔레포트 기계를 완성한 리드와 조니(마이클 B. 조던) 일동은 본인들이 아니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전문 파일럿들이 장치에 탑승할 거라는 말에 펄쩍 뛴다. 고생은 우리가 하고 유명세는 비행사들이 누린다고 분노하며 술김에 텔레포터를 작동한다(그러면서도 여성 동료 개발자인 수에겐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만든 자가 반드시 장치를 운행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청년들의 발상이라기엔 부연 설명이 필요한 응석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런 유치함과 객기는 <판타스틱4>를 조시 트랭크 감독다운 영화로 차별화할 스프링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우연히 얻은 초능력을 지리멸렬한 현실을 달래기 위해 오남용하다가 피투성이 파국을 맞는 <크로니클>의 안타까운 소년들을 회상해보라. <판타스틱4>의 대리 보호자인 프랭클린 스톰 박사(레그 E. 캐시) 역시 “그들은 겁먹은 어린아이들일 뿐이야”라는 대사로 4인조의 미숙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판타스틱4>의 네 주연배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로 보이진 않는다. 결정적으로, 인물들이 돌연변이 능력을 얻은 시점부터 영화는 급격히- 이 시점에 감독이 배제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로- 캐릭터의 속성을 외면한 선악 대결 노선으로 달려간다. 젊은 주인공들의 미성숙과 더불어 <판타스틱4>가 발전시켰으면 어땠을까 싶은 두 번째 계기는, 신체 호러로서의 가능성이다. 특히 바윗덩이 괴물로 영영 변해버린 벤과 고무처럼 몸이 늘어나게 된 리드는 그들에게 닥친 변화를 혐오한다. 침상 위 리드의 늘어난 다리를 하염없이 훑어가는 숏은 <판타스틱4>에서 거의 유일하게 잊을 수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부적응, 그리고 적응의 시간을 생략하고 이들을 액션에 투입함으로써 벤의 광물성 피부와 리드의 고무 사지를 그저 우스꽝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무기로 활용하는 데에 그친다. 여기서 엄한 상상 하나. <판타스틱4>에 스튜디오가 재도전한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에게 전화라도 한번 넣어보는 것이 어떨지?

08/19

<오피스>는 “사표를 칼처럼 품고 다닌다”라는 관용어에서 비유를 지워버린다. 정말 칼 한 자루를 안주머니에,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이 나온다. <숨바꼭질> <소셜포비아>도 그랬지만, 개인과 조직을 불문하고 능동적 목표보다 낙오의 공포가 행위의 큰 동기로 작용하는 한국 사회 양상에 잘 착안한 장르영화다. 동시대 집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역에 기초한 호러는 쇼크와 무서움도 중요하지만, 히스테리와 노이로제의 뿌리를 드러낼 때에 긴 전율을 남긴다. <오피스>는 이 대목에서 미흡하다. “고위 간부들은 가혹하다”, “동료들은 이기적이다”, “인턴은 착취당한다”, “중간관리자는 고독하다”는 만인이 동의할 만한 정서에 호소하지만, 여러 인물의 스트레스와 폭력 충동이 어떻게 맞물리고 전이되는지 회로를 그리지는 못한다. 존속살인부터 사내 연쇄살인까지 초래하는 ‘몬스터’가 초자연적 힘인지, 사람인지 혹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양자가 접속했는지 종장 이전에 명백히 하고 밀어붙였다면 <오피스>는 끝까지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아무튼 <오피스>는 다시 확인시켜준다. 소재만 따져도 한국 공포영화는 훨씬 무서워질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몽테뉴와 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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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화해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몽테뉴와 함께 춤을>은, 몽테뉴를 번역하는 불문학자 어머니(심민화)의 현지답사 여행에 카메라를 들고 동행한 이은지 감독의 기록이다. 자연히 영화의 토픽은 양 갈래다.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엿보는 번역이라는 작업의 정체가 하나, 그리고 모녀관계에 대한 사색이다. 세상 모든 가족여행이 그렇듯 감독 모녀도 길 위에서 다툰다. 단, 푸는 장면이 특별하다. 딸은 아이처럼 엄마 무릎을 베고 문제를 지적하고, 엄마는 정면의 공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을 정확히 전할 단어를 고른다. 내 마음은 연약해졌는데 너는 날 여전히 노인으로 여기지 않아 부딪치는 것 같구나. 모녀 대화라기보다는 어쩌다가 먼저 늙게 된 친구가 배려를 청하는 말로 들린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딸에게도 평생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60대 여성의 불안, 인생의 다음 단계를 잠시 유예한 채 엄마의 삶을 견학 중인 딸의 불안이, 두 사람의 자세가 만든 삼각 구도 안에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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