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이진욱] 가을처럼 차차 깊어질 배우
2015-09-07
글 : 윤혜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뷰티 인사이드> <너를 사랑한 시간> 이진욱

“이진욱씨가 요즘 핫하긴 한가봐요. 하루가 멀다하고 이진욱씨에 관해 묻는 전화가 오네요.” 이진욱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그와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니 돌아오는 답이다. 싫은 내색 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들려주는 걸 보면 이진욱은 분명 괜찮고 편안한 동료였던 것 같다. 듣다보니 그를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일종의 환상 혹은 로망처럼 여겨지는 이진욱의 ‘실체’가 궁금했다. <뷰티 인사이드>가 개봉한 지 불과 일주일, TV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이 종영한 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에게 서둘러 만남을 청한 것도 그래서였다.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하게 되거나. 이진욱이 앞에 있다면 보통은 둘 중 하나다. 작품을 통해 만난 로맨티스트를 이미 사랑하고 있거나 허술하기도, 집요하기도 한 의외의 허당을 사랑하게 되거나. <수상한 그녀>(2014)의 한승우 PD, TV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의 최원 부사무장처럼 무엇이든 어렵지 않게 척척 해낼 것 같은 사람일 줄 알았다. 뜻밖에도 이진욱은 TV드라마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2013)의 박선우 기자나 영화 <표적>(2014)의 순진한 의사 이태준과 더 가까워 보인다. 호기심 많고 끈질기지만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배우가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표현에도 꾸밈이 없다.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분명 장점이다. 그의 직선적인 말과 행동은 상대의 장점을 발견할 때나, 즐거운 것 좋은 것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인다. 속에 담은 싫은 말을 굳이 감추지도 않는다. 다만 잔뜩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쓸면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까닭을 서둘러 덧붙일 뿐이다. 메이크업이 지워지든 말든 얼굴을 자주 긁는 것 같기도 하다. 하얀 스웨트 셔츠 소매 끄트머리에 묻어난 파운데이션이 그 ‘허당기’를 말해주고 있는 걸 보니.

처음 만난 상대에게조차 친근하게 구는 양을 보면 이진욱이 격의 없고 활기찬 사람이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한 칭찬하기’는 동료와 빨리 친해지는 나만의 방법이다. (<너를 사랑한 시간>에서 상대역 하나를 연기한) 하지원 선배에게도 부러 더 그렇게 했다. 17년간 소꿉친구로 지내온 사이라는 게 관계 안에서 드러나야 했으니까. 평소에도 극중 이름으로 ‘하나야’라고 부르곤 했다.” 원작인 대만 드라마 <연애의 조건>(我可能不會愛你, 2011)을 리메이크하며 가장 달라진 지점은 남자주인공의 캐릭터다. <너를 사랑한 시간>의 최원은 <연애의 조건>의 리다런(진백림)처럼 한없이 다정다감하고 너른 품을 가진 ‘남자 사람 친구’가 아니다. 까칠한 듯 자상하고, 무심한 듯 챙겨주는 ‘츤데레’다. 많은 드라마를 통해 이진욱이 익혀온 캐릭터의 연장이다. 많은 부분 원작과 다른 방향으로 각색됐지만 그럼에도 드라마가 잃지 않으려 했던 건 30대 이상의 남녀가 공통으로 공감할 만한 선택의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이진욱은 최원과 같은 나이, 서른다섯살이다. “꼭 같은 나이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신기하고 축복된 경험이다. 나는 후회를 안 하려는 타입이라 내가 원하는 걸 먼저 선택하려 한다. 그 덕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남 탓은 안 하게 된다. 그런데 군 제대 후 최근 3, 4년 사이에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주변과 시간을 나누고 어울리는 게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는 걸 부쩍 실감하고 있다. 이번엔 원이를 하며 ‘주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양보하고 배려하고 인내했을 때 얻어지는 즐거움이 있단 걸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게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선택이다. <뷰티 인사이드>의 한 장면. 회사동료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이수(한효주)는 초조하게 우진을 기다린다. 날마다 얼굴이 변하는 남자친구가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몹시 궁금하고, 동료들에게 어떤 말로 이 복잡한 남자를 소개해야 할지도 난감하기 짝이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이수의 불안이 극에 달한 순간, 믿지 못할 만큼 근사한 외양의 남자가 거짓말처럼 그곳에 등장한다. 이진욱의 우진이다. 등장과 동시에 파티장에 깔리는 은근한 탄성. 스크린 바깥의 객석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전의 우진에겐 없었던 자신감과 여유가 우진을, 이진욱을 더욱 멋진 남자로 만든다. 이진욱의 우진은 이수의 지인들과 처음 만나는 우진이고, 이수의 공간에 처음 들어서는 우진이고, 이수와 처음 섹스를 하는 우진이다. 그 어떤 우진보다도 인상적이다. “내가 그 장면을 욕심냈다.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지점, 사랑의 절정에 놓인 우진을 연기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우진은 자신의 변화를 즐기는 사람이다. 등장하자마자 이수에게 장난을 거는 여유도 거기에서 나온다. 일단 그런 삶을 사는 우진의 정신상태가 정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사람인 거다. 도덕심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악당일 수도 있었을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따뜻하고 예쁜 내용이니까 그럴 순 없고. (웃음)” 물론 이진욱에게 관객이 탄성을 토해내게 만들 이미지와 환상이 없었다면 백감독도 그 중요한 장면을 이진욱에게 주지 않았을 거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잘생긴,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줄 배우가 그 순간의 우진을 연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진욱씨를 우선으로 고려한 게 맞다. 현장도 진욱씨 덕분에 굉장히 쾌적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든 스탭들이 그 파티장의 손님들 같았으니까.”

누가 봐도 이진욱은 로맨스를 연출하기에 최적인 배우다. 하지만 정작 이진욱은 자신이 멜로드라마에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낯간지러워서 어떻게 하나, 20대 초반에 모 감독님이 바보같이 좀 웃지 말라고, 웃으면 깨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다. 내가 어떻게 웃는지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지만 그때 내가 웃는 게 바보같이 보인다는 걸 알았다. 트라우마였다. 지금은 그 감독님 취향이 촌스러웠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웃음)” 웃음기 어린 다정한 얼굴을 빼면 이진욱에게 대체 어떤 표정이 남을 수 있을까.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2>(2012)는 안 웃던 이진욱을 웃게 만든 작품이었다. <로맨스가 필요해2>의 이정효, 장영우 PD, 정현정 작가, 상대배우 정유미는 이진욱이 “배우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많은 얘길 나눠본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스스로가 이렇게나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사람인 줄 그들과 말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처음 알았다고 했다. “웃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배우일 수 있었겠나. 지금은 친한데 당시엔 작가님과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석현의 행동을 못 견디겠다, 그러니 다음 회에 떠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작가님은 너나 그렇게 살라고, 석현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그런 과정들이 충격이었다. 내가 얼마나 소통에 둔하고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었는지 알았다. 그나마 나의 장점이라면 뭔가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좋은 것들을 눈여겨본다는 거다. (웃음)”

좋은 눈썰미는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이건 어디서 온 감정일까. 저 사람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보고 겪는 무엇에든 물음표를 붙여보는 건 어릴 때부터의 습관이다. “고등학생 때까진 과학자가 되길 꿈꿨다. 뭐든 궁금해했다. 배우가 되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해보니 천직인 것 같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었을 직업 중 최고로 적성에 맞는 듯한 직업이란 의미다. 배우를 하고 있어서 나란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듯하다.” <표적>을 함께했던 창감독은 이진욱을 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질 배우”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는 배우에게 재능보다 중요한 건 태도일터.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의사 태준이 온 마음을 다해 상대방과 싸우고자 할 때, 태준에게선 당연히 마음만 앞선 허술한 움직임이 나왔을 것이다. 창감독은 굴다리 아래 태준과 여훈(류승룡)이 맞붙는 장면에서 액션 합을 짜지 않았다. “약속된 동작 없이 감정적인 액션을 요구했다. 그렇게 싸우는 게 체력적으로 훨씬 힘들다. 여섯 테이크를 연속으로 찍었고, 이진욱은 인공산소를 흡입해야 할 정도로 힘겨워했다. 그러면서도 다음 테이크를 가자며 일어나더라. 활짝 웃는 얼굴로 말이다.” 끝모를 호기심과 자기긍정, “나를 아끼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스스럼없는 태도. 이진욱이 가지고 있는 것들, 이진욱에게서 보이는 모습들이 이진욱의 지금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제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다.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하게 되거나 또는 사랑할 수밖에 없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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