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생의 주변부에서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앙: 단팥 인생 이야기>
2015-09-09
글 : 박소미 (영화평론가)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 소녀 같은 대사를 수줍게 읊는 사람은 일흔이 넘은 도쿠에(기키 기린) 할머니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봄날, 도쿠에는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가 운영하는 동네의 작은 도라야키 가게를 찾는다. 구인광고를 본 도쿠에는 50년 넘게 팥을 만들어왔다며 단팥빵을 만드는 그의 가게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센타로는 정중히 거절하지만 도쿠에는 손수 만든 팥소를 들고 다시 그를 찾는다. 팥을 맛본 센타로는 망설임 없이 도쿠에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하고, 그녀의 솜씨 덕분에 가게는 점점 손님들로 북적인다. 센타로는 물론이고 매일 가게에서 끼니를 때우는 중학생 와카나(우치다 가라)도 도쿠에와 금방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지만 도쿠에가 앓았던 병이 알려지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하나둘씩 끊기기 시작한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줄곧 나라현에서 작업을 해오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처음으로 도쿄에서 만든 영화다. 직접 각본을 써오던 작업방식에도 변화를 주어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하였다. 제작방식에는 변화가 있지만 가와세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생의 주변부에서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응시한다. “단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도쿠에의 대사는 도쿠에와 센타로, 와카나의 이야기를 어루만지는 감독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가와세가 초기작에서부터 일관되게 담아왔던 자연의 풍광 역시 여전히 아름답다. 흐드러진 벚꽃나무와 그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혹은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자연스럽게 화면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과거 그녀의 대표작들에서 숲의 정경이 다른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영화적 존재감을 지녔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이나 사건을 부연하는데 머물렀다는 인상을 준다. 클라이맥스에서 자연에 관한 상징적인 대사나 설정들이 두드러지게 사용된 것이 그 예다. 가와세의 신작에 대한 기대를 한편에 접어두고 본다면 마음을 울리는 장면들이 있는 소박하고 잔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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