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에드거 앨런 포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면 예상한 대로 검은 고양이, 갈가마귀 혹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포의 사진이 나온다. 그리고 구글에서 다시 러브크래프트의 이미지를 검새해보면 역시 예상한 대로 러브크래프트의 사진과 함께 그가 창조한 무시무시한 괴물들의 이미지가 나온다. 물론 그가 창조한 악마의 서적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도 함께다. 자, 그럼 이번엔 “포&러브크래프트”로 검색해보자. 예상한 대로 둘을 함께 그린 일러스트레이션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데, 둘을 동업자/형제/라이벌 등으로 묘사한 그림들이다(한번 찾아보라. 졸귀).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오른쪽 그림이다. 포는 갈가마귀를 머리에 얹고 있고, 러브크래프트는 어항에 그의 피조물- 크툴루- 을 담아서 가지고 있는데, 러브크래프트가 말을 걸고 있다. “포씨, 머리 위에 갈가마귀가 앉아 있는 거 아세요?” 포가 대답하길, “네, 알아요”. 그러자 러브크래프트의 반응은… “그니까요”. 한마디로, 둘은 할 말이 없다. 말이 안 통한다. 전혀 다르다.
내부의 공포와 외부의 공포
포와 러브크래프트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고딕 공포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약 한 세기 정도의 터울로 그들이 미국 호러문학/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혹은 엄청나다 같은 표현으론 부족하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도 그들의 영향력은 미국 호러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둘은 많이 비교되고, 또 많이들 비슷하다고 알고 있지만 실은 “말이 안 통하는” 저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전혀 다르다. 일단 포는 “내부의 공포”를 다룬다. <검은 고양이> <함정과 진자> <어셔가의 몰락> 등에서 보여지는 포의 공포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 죄책감/절망감/증오심- 이 만들어낸 죽음에의 공포와 집착이다. 여기서 집착이란 단어는 가장 포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포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죽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은 자신이 무능하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고양이를 죽이고, 또 그 고양이가 다시 살아나서 자기를 죽이러 왔다는 망상에 집착하고, 그 망상은 결국 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가져온다(안 읽어보신 분은 꼭 읽어보세요. 포의 입문으로 딱). 다시 말해 포의 인물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고, 좀더 정확히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끊임없이 인지하는 죽음에의 충동이다(이렇기 때문에 그 숱한 정신분석학자들이 포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일 테다.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 이론은 다시 봐도 어렵구나야).
반면 러브크래프트는 “외부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명징하게도 러브크래프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그가 창조한 수많은 괴물들이다. 크룰루/데이곤/히드라/니알라토텝 등의 괴물들은 생긴 것도 요상하게 생겼지만- 거대하고/바다 밑에 살고/냄새도 나고/인간과 교미까지 하지만-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은 그들의 기원이 태초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 살기 전부터, 아니 공룡이 지구에 살기 전부터, 아니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그들은 존재해왔고 지금까지도 해저 깊숙한 곳에서 재림을 기다리며 인간들을 조금씩 지배해나가고 있다는, 기괴함을 넘어선 종말론 사이비교주 같은 정신병적인 설정!(그래서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엔 “영겁의 세월”이나 “무한한 시간” 등 니체가 미쳐서 썼을 법한 단어들을 빈번히 볼 수 있다.) 이런 설정 속에서 러브크래프트의 주인공들은 괴물들에게, 포의 주인공들처럼 집착하는 게 아니라, “쫓긴다”. 물론 괴물들의 정체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수사해가는 플롯은 러브크래프트가 자주 쓰는 “와꾸”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수사한다기보다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조종당하며” 이끌려간다. 더구나 괴물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은 “이상하게도” 그 종교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고, 심지어 <인스머스의 그림자> 같은 작품에선 자신이 실은 그 괴물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한다.
요약하자면, 포의 공포는 저 어둡고 깊은 마음의 밑바닥이 만들어내는 “개인적 공포”이고,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는 저 어둡고 깊은 해저의 밑바닥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공포”이다(뭐 그래서 포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러브크래프트는 “융적 집단무의식”을 묘사했다고 또 어떤 정신분석학자들은 말할 수 있으려나). 요렇게 확연히 다르기에 그들이 작품 내내 물고 늘어지는 비주얼- 알레고리- 도 확연히 다를 수밖에. 거의 모든 포의 (공포)작품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비주얼은 ‘생매장’이다. <검은 고양이>에선 아내를 생매장하고, <어셔가의 몰락>에선 누이를 생매장하고, 심지어 <함정과 진자>에선 생매장되어서 깨어나고, <적사병의 가면>에선 역병이 인간들을 시체로, 궁궐을 무덤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생매장’ 이미지를 통해 포는 세상을 무덤으로, 인간은 곧 죽을 시체들, 아니 생매장당한 산송장으로, 그리고 이런 생매장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죄책감 혹은 무의식적 죽음 충동)으로 보고 있었으리라. 반면, 러브크래프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밀교’다. 크툴루 같은 태곳적 괴물을 숭앙하는 비밀스런 종교집단의 궁극적 목표는, 역시 정신병스럽게도 괴물종족의 번식이다. 이 종교집단의 신도들은 숭앙의식을 통해 결국엔 괴물로 변형되어 해저 밑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 변형/번식이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집단교미/집단수간의 이미지가 떠오르기까지 한다(러브크래프트, 제한상영가감이다. 아, 드러워).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 존 카펜터의 위엄
본론이 너무 늦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포와 러브크래프트가 미국 호러영화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당연하게도 그들은 미국 호러영화의 전부다. 러브크래프트의 피조물들이 단번에 떠오르는 크리처 장르는 말할 것도 없고, 러브크래프트의 광신도들을 계급적으로 치환한 조지 로메로의 공에 힘입은 좀비 장르, 포의 탐정물들과 정신분열증적인 주인공들에게 영감받은 슬래셔 장르(이탈리아 지알로 필름은 말할 것도 없고) 등 그 어떤 호러 장르도 포와 러브크래프트의 자장을 피해갈 순 없다(단, 뱀파이어 장르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한 듯). 그렇다면 호러영화 작가 중 포와 러브크래프트를 가장 사랑한 작가는 누구일까? 단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로저 코먼과 스튜어트 고든이다. 로저 코먼은 B영화의 제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포의 작품을 쉴 새 없이 영화화한 포빠이기도 하다(<리지아의 무덤> <적사병의 가면> <때이른 매장> <어셔가의 몰락> 등 그가 영화화한 포의 작품엔 명배우 빈센트 프라이스가 빠짐없이 출연하며 포가 무덤에서 걸어나온 듯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셨다).
스튜어트 고든 감독은 자타 공인의 러브크래프트빠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러브크래프트적이지 않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리애니메이터>(Re-Animator)를 영화화해(우리나라 제목은 기발하게도 <좀비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인 <지옥인간>, <데이곤>, (<마스터스 오브 호러스> 시즌1의 한 에피소드인) <마녀의 집> 등에선 러브크래프트의 “태곳적 집단공포”를 온전히 재현하면서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무한한 “밀교적” 숭앙심을 드러내고 있다(또한 스튜어트 고든은 <마스터스 오브 호러> 시즌2에서 포의 <검은 고양이>를 영화화하기도 했는데, 제프리 콤스의 포 연기는 빈센트 프라이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의 명연기).
하지만 로저 코먼도, 스튜어트 고든도 이분의 필모 앞에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와 러브크래프트마저도 울고 갈, 아니 사랑해 마지않았을 호러 작가, 바로 존 카펜터다. 그의 묵시록 3부작인 <괴물>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 <매드니스>엔 러브크래프트적 공포가 있고(이중 <매드니스>(In the Mouth of Madness)는 제목부터가 대놓고 러브크래프트의 오마주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광기의 산맥>(At the Mountains of Madness)에서 따왔다), <크리스틴> <더 포그>는 포의 훌륭한 “카펜터적” 재해석이 아니던가((심지어 <더 포그>는 포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Is all that we see or seem but a dream within a dream?”). 그러고도 모자랐던지 존 카펜터는 단 하나의 작품으로 포와 러브크래프트를 요약정리 올킬했으니, 바로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즌1의 에피소드 <담배 자국>(Cigarette Burns)이다. 관객을 광기로 몰아넣은 악마의 영화를 찾으러 나선다는 설정은 분명하게도 러브크래프트적이고 (악마의 책을 찾으러 다니는 <더니치 호러> 설정과 판박이) 그 영화를 찾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건 자신의 죄책감이란 설정은 분명하게도 포적이다(죄책감이 분노와 살의로 바뀌는 <검은 고양이>와 <리지아> 설정과 판박이). 그리고 이런 요약정리 과정에서 과연 존 카펜터다운 비주얼이 나왔으니, 바로 죄책감이 담겼을 인간 내부를 사람들을 광분케 하는 시네마적 밀교의식으로 외부화하는 비주얼이다(아흐 스포일하고 싶지만 참는다… 아호 입 간지러워). 포의 내부적 공포와 러브크래프트의 외부적 공포를 하나의 비주얼로 올킬하는 존 카펜터의 저 악마적 스킬!(아흐 마지막 장면에서 영사기가 차르르 돌아갈 때의 그 시뻘건… 아호 입 간지러워). 포와 러브크래프트가 천국에서 (혹은 지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저건 내가 말하려던 건데”라고 서로 우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서로 말이 안 통하는 포와 러브크래프트를 말문이 트이게 할 분은 역시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 존 카펜터 한분밖엔 없는 듯(스튜어트 고든은 러브크래프트 옆에, 로저 코먼은 포 옆에 착석해 있겠지… 천국에서 혹은 지옥에서).